이 천문학적인 금액이 고작 40명의 기부금으로 모은 액수라는 사실에 놀라게 되고, 더욱이 이들 40명의 기부자는 미국의 전체 슈퍼리치의 1/10도 안 된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라게 된다. 이들의 기부문화가 확산되면 나머지 슈퍼리치들의 기부행렬도 이어질 것이고, 그래서 그 기부액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인 바, 이것이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주춧돌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 빌게이츠. 그를 포함한 미국 억만장자 40명은 지난 4일 기부 사이트 '기빙 플레지'를 통해 생전 혹은 사후에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
우선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밝히는데, 필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의 반 이상을 기부하기로 결정한 이들 슈퍼리치의 결정을 폄훼할 생각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이들에 대해서는 일정한 존경심마저 가지고 있다. 이들은 주어진 규칙의 범위 내에서 남다른 노력과 창의력으로 최선을 다해서 경제적 부를 일구어낸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는 단순히 돈을 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영역을 앞장서서 개척해 간 '시대의 디자이너'라는 점에서 그들의 위대성은 더욱 부각된다. 1년 내내 온갖 사술(詐術)을 부려가며 부를 쌓다가 연말에 우아한 자선파티에서 찔끔찔끔 기부하면서 지난 1년간의 패악을 속죄 받으려는 삼류 부자들과는 격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여기에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슈퍼리치의 선의를 의심하거나 이들의 기부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기부행위가 선행으로 칭송받고 영웅시되는 사회는 분명 건강한 사회는 아니라는 것이다.
기부를 약속한 슈퍼리치 중의 한 사람인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는 자신의 암울했던 고교생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의 기부금을 교육 발전에 사용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지 루카스의 기부가 미국의 수많은 암울한 고교생 모두에게 보다 나은 삶의 기회를 주지는 못한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가 조화된 공화국이라면, 개인의 기부가 아닌 국민의 세금으로 튼튼한 공교육의 기반을 만들고, 이 기반 위에서 개개인의 창조적 수월성을 계발(啓發)할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들 슈퍼리치의 기부로 미국의 교육이 핀란드식 교육으로 발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슈퍼리치의 재산을 모두 모아서 보건의료 사업에 기부를 하더라도 미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저소득층의 건강보장의 문제와 의료양극화를 해결하지 못한다. 교육과 의료와 같은 공공성이 강한 재화는 정부가 제도적으로 제공하는 양질의 보편적인 공공서비스를 근간으로 해야 하며, 결코 개인의 선행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공화국의 시민이라면 어느 누구도 한 개인의 영웅적 기부행위로 자신의 삶의 조건이 바뀌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삶의 조건의 변화는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정부정책을 통해 이루어야할 정부의 제도적 책무이지, 시장에서 뛰는 기업가의 자선 책임은 아닌 것이다. 기업가들은 자신의 사업영역에서 열심히 일해서 고용을 확대하고 부가가치를 생산하고, 이에 상응하는 세금을 정부에게 내면 되는 것이다.
이들 슈퍼리치들이 다수 몰려있는 곳이 미국이다. 미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 국가들 중에서 가장 소득불평등 정도가 심한 나라로서, 사회의 신뢰도, 국민의 기대수명, 사회이동성 그리고 아동교육 성취도 등의 지표는 가장 낮은 한편, 영아사망률, 범죄, 십대임신, 정신질환자, 그리고 마약 중독자의 비율은 가장 높은 나라(Wilkinson and Pickett, 2009)이다.
이런 미국 사회에서 그나마 수퍼리치들의 기부행렬이 이어진다는 것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어쩐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는 우리 사회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를 잃어버리기 전에 정부가 나서 튼튼한 외양간, 즉 양질의 보편적 복지체계를 잘 갖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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