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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 지리학계의 일원이라는 게 부끄럽다"

[기고] 한반도 대운하, 왜 지식인은 침묵하나?

국내 5대 건설 기업의 한반도 대운하 컨소시엄이 구체적으로 구성되는 등 밀어붙이기식 진행이 발 빠르게 가시화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한반도 대운하 계획이 시행됨으로써 발생할 침수 예정지 문화재 이전에 대한 비판과 지난 글에서 지적한 대통령 인수위 대변인 박형준 의원과 시민사회 위기에 대한 지적, 마지막으로 한반도 대운하를 둘러싼 비판적 공간 담론에 대한 지식인의 침묵에 대한 지적을 하고자 한다.

문화재에 대한 저열한 인식 수준

한반도 대운하의 착공으로 예상되는 침수 지역에는 상당수의 문화재가 있다. 매장된 문화재의 발굴 작업도 문제지만 기존에 알려진 침수 위기 문화재의 단순 이전을 해결책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다. 그러니까 문화재의 장소를 바꾸는 것 또한 문화재를 손상시키는 것만큼이나 또 하나의 훼손이라는 의미다.

충북 제천 청풍면 충주호에는 '청풍 문화재 단지'가 있다. 이곳은 지난 군부정권 시절 4대강 유역 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구축된 충주댐(1978년 시공)에 의해서 수몰된 지역 문화재를 한 곳에 모아둔 곳이다. 이런 수몰의 역사를 모르고서 방문한다면 사람들은 후덕한 인상의 석불, 충주호의 절경에 감탄사만을 연발할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허름한 수몰 역사관이 있어 수몰 이전에 문화재가 있었던 위치를 알린다. 개발주의가 한창이던 시절의 실무 공무원도 문화재에 대한 최소한의 교양은 있었던 것이다. 수몰 역사관에 표시돼 있는 수몰 이전 문화재 위치는 단순히 수리적 위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재가 위치한 고유한 장소의 흔적을 기억하게끔 하는 최소한의 미학적 장치다.

문화재 자체의 물적 가치뿐만 아니라 문화재가 위치한 문화 역사적 나이테가 켜켜이 새겨진 주변 환경도 문화재이다. 단순히 문화재 자체의 물적 가치밖에 모르는 촌스런 문화 인식은 제국주의 시대 침략국이 식민국에서 강탈한 신성한 제단으로 자신의 박물관 내부를 장식하거나, 도심에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것과 같은 싸구려 문화 의식의 표현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맥락을 보지 못하는 태도의 뒤에는 운하를 통해서 국토를 뒤집겠다는 자연에 대한 자본의 정복 욕구가 있다. 요컨대 자연이 인간을 위한 전유물이라는 발상이 변하지 않는 이상은 인간의 창작물인 문화재에 대한 이런 인식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불도저' 이명박 당선인이 시장 시절 콘크리트 수조 - 흔히 청계천 복원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 조성에 이어 대통령이 되자마자 콘크리트 운하를 만들겠다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거대한 콘크리트 댐을 짓겠다며 수몰지의 문화재를 옮긴 것과 단 1㎜의 차이도 없다. 무려 30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말이다.

시민사회의 위기, 박형준의 자기기인(自欺欺人)

지난 번 글(☞관련 기사 : "한반도 대운하, 유우익과 박형준이 막아라")에서 '읍소'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이명박 당선인의 측근인 박형준 한나라당 의원에게 정치인으로서의 본인이 했었던 발언을 들려주며 대운하 계획의 철회를 부탁했다. 다음에 쓰게 될 글에선 진보 학자 시절 당시 박형준 의원의 글을 통해 비판하겠다는 예고도 했었다. 개인적으로 참으로 독하고 민망한 작업이 아닐 수 없지만 박형준 의원 개인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에 대한 고찰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지난 1992년 박형준은 이병천 강원대 교수와 함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암출판 펴냄) 1, 2권을 편저했다. '시민사회론과 민주주의론'을 주제로 한 2권은 박형준 의원의 '시민사회론의 복원과 비판적 재구성'이 서장을 장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간단히 그가 당시 시민사회가 대두하기까지의 한국 사회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들어보자.

"1960년대 이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극심한 불균형발전은 한국사회의 국가-경제-시민사회의 관계를 기형적이고 편향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정글식 자본주의의 도구적 합리성에 입각한 경제 체계의 조직화, 그와 유착된 국가 권력의 소수집단에 의한 점유는 경제와 국가 양자에 민주주의의 논리가 내재화되는 것을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발전마저 국가 관리 체계로 흡수해버리는 시도들을 낳았다." (43~44쪽)

한반도 대운하 자체의 생태적, 경제적 타산을 따지기('정글식 자본주의의 도구적 합리성에 입각한 경제체계의 조직화') 이전에 한반도 대운하를 둘러싼 국민적 합의 혹은 전문가의 의견수렴이 부실한 상황('민주주의의 논리가 내재화되는 것을 저지')에서 국내 5대 건설기업이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움직임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박형준 의원 자신도 1992년의 인식과 현재 본인의 인식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필자의 지난 글이 <프레시안>에 실린 직후에 박형준 의원은 "일단 한반도 대운하를 건설한다는 그 대전제에는 변함이 없다"면서 공론장에서의 논의 자체를 봉쇄해버렸다. 1992년 당시 본인이 문제라고 보았던 "시민사회의 발전마저 국가 관리 체계로 흡수해버리는 시도"를 바로 본인이 저지르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시민사회의 대안은 없는 걸까.

"우리 사회에서도 노동자의 수직적, 수평적 분화의 심화 및 생활양식 변화, 그리고 시민사회 내 갈등 쟁점의 분화에 주목하면서 강한 조직운동(정당, 노동운동, 학생운동 등)과 공론 및 네트워크 형성의 시민운동들을 잇는 상징적, 정치적 질서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가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렇게 해서 형성되는 민주적 연대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다른 집단의 이익으로 곧장 전치하는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또는 제반 요구들을 단순히 중립화시키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수평적이면서 아울러 확장적인 새로운 집합의지를 형성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개혁적 진보정치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시민사회론의 비판적 재구성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본 제언은 박형준 의원의 동일한 논문에 발췌한 것이다. 이 논문이 아니더라도 현재 시민사회의 위기에 대한 전략은 충분히 제시되어 있다. 다만 박형준 의원이 자신의 글을 읽고서 더 늦기 전에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 같은 희망에서 언급했을 뿐이다.

덧붙여 지적하고자 하는 점은 박형준의 본 논문은 여전히 시민사회를 연구하는 진보적 학자들의 논문에 곧잘 참고문헌으로 인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학자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논문을 결코 저자와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다. 더욱이 이념적 정초에 기반 한 사회과학 연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굳이 인용이 필요하다면 지식인의 변절 사례로 참고할 수는 있을지언정 시민사회의 전략을 짜는 데 있어서 시민사회를 발전을 막는 사람의 글을 참고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식인의 침묵, 자기기인(自欺欺人)의 부끄러움 알아야

<교수신문>에서는 2007년을 상징하는 사자성어로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인다는 의미의 '자기기인(自欺欺人)으로 선정했다. 한반도 대운하를 둘러싼 지식인의 침묵이야말로 이 사자성어로 잘 설명할 수 있다.

지난 글에서 비판했던 유우익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가 한반도 대운하를 기획함으로써 그간 사회과학계에서 소외되었던 지리학을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는 점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관심의 촉발이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 색채가 강했다는 점이다. 한반도 대운하 주제만큼 지리학계에서 인문지리와 자연지리 양 진영에서 교차연구를 할 수 있는 소재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애당초 대운하 담론의 각질화(角質化)가 초래하기 전에 지리학계에서는 학술지를 통해서 충분히 한반도 대운하를 다루어 정제시켰더라면 현재의 혼란은 상당 부분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이 없던 결과, 프로파간다에 기댄 검증 안 된 정책 제안이 세상에 불쑥 나오게 되었다.

몇 해 전 국내 지리학계는 국토연구원을 상대로 산맥체계론 논쟁에 활발히 개입하면서 언론을 통해서 주목받은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국내 학술지에 실린 지형학 논문을 읽으면서 가슴 뻐근한 감동을 느낀 경우는 유일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왜 한반도 대운하를 둘러싸고서는 인문지리학계든 자연지리학계든 함구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지리학뿐만 아니라 공간을 다루는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다. 가령 늪지의 축소에 신랄한 비판을 퍼붓던 중진학자들이 늪지 파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토를 파괴하는 한반도 대운하에는 왜 이렇게 침묵하는가? 도시 계획에는 그렇게 한 마디씩 거들던 이들이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국토 개조 사업에는 왜 입을 닫고 있는가?

이런 침묵이 차기 정관에 밉보일까봐 또 이리저리 얽힌 학맥ㆍ인맥 때문이라는 것을 알 만한 이들은 다 안다. 이른바 중진학자들은 도시계획, 도시행정, 환경생태를 공부하고 있는 각 분야의 소장학자들이 이런 상황을 얼마나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며 부끄러워하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런 비판 작업이 한반도 대운하 추진에 제동을 걸지 못하는 바위에 달걀 치기 격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뻔히 문제점을 알면서도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자기기인(自欺欺人)이 될 수는 없다. 모름지기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지식인이라면 최소한 자신이 공부한 것과 배반되는 사회적 발언은 중지해야 한다. 또 자신이 공부한 것과 배반되는 일에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한반도 대운하, 토건국가의 위기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지식인의 위기도 함께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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