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으로는, '88만 원 세대'라는 말이 거의 모든 매체에 연일 오르내리고, 심지어 '2007년의 유행어'로 빠지지 않고 언급되고 있음에도 '고작 이 정도밖에' 팔려나가지 않았다는 현실 또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대형 서점에는 여전히 자기 계발서와 재테크 서적으로 넘쳐난다. 그 책들 사이에 꽂혀있는 <88만 원 세대>가 참 생뚱맞다. '자기 계발'에 미친 한국 사회의 알량한 알리바이로 기능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엊그제 수첩을 정리하다 보니, '88만 원 세대'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낸 날은 2007년 3월 16일로 기록되어 있다. '119×0.74=88.06'의 계산과 함께 "1000유로 세대 아류 느낌"이라는 부정적 코멘트도 적혀 있다. 그 후 9개월이 지났다. 이 단어는 어느새 필자의 손을 떠나 자가 발전하여 이름 없는 세대의 비극적 이름으로 자리 잡은 모양새다.
출간 이후 인터뷰와 강연을 주로 우석훈 박사가 전담하기로 했지만 필자 역시 어림잡아 100여 명의 88만 원 세대들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 글은 '88만 원 세대'라는 말이 대한민국의 현실과 만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변화를 일으켜야 하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그리고 꽤 정치적인 사족이다.
개인과 구조
88만 원 세대와의 만남에서 많이 받았던 질문은 "20대라고 다 같은 20대가 아니"라는 항변이다. 어떤 이는 계급적 시각에서, 어떤 이는 학벌의 관점에서 세대론을 비판한다. 갑부의 자식과 서민의 자식이 같은 88만 원 세대로 묶일 수 있느냐, 서울대 출신과 '지잡대(요즘 젊은이들이 지방대를 낮추어 부르는 말)' 출신이 같은 처지냐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88만 원 세대>라는 책은 소위 '엄마친구 아들딸'들과는 별 관련이 없다. 필자는 한국 사회의 평범한 20대에게는 관심이 많지만, 극소수 잘나가는 20대 또는 부잣집에 태어나 구김살 하나 없이 자라난 준수한 20대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 사람은 대한민국에 다시 외환 위기가 와도 여전히 잘 먹고 잘 살 사람들일 테다. 요컨대 상위 5% 계층에 속해 있는 20대들은 88만 원 세대가 아니다.
또 한 가지 자주 들었던 질문은 "개인의 문제를 사회 구조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나태한 20대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88만 원 세대>의 문제의식은 개인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개인의 노력만으로 극복하기 힘든 구조적 압력이 존재하며 그것이 더욱 거세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데 있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몇몇 '슈퍼맨'은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사회구조적 문제의 반증 사례가 될 수는 없다. 이것은 본래 결정론적 문제라기보다 차라리 확률론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학벌사회이기 때문에 신정아 씨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아니다. 학벌사회이기 때문에 신정아 씨는 거짓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확률론적 문제라는 건 그런 의미다.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데 크게 일조하는 것이 바로 자기 계발서의 범람이다. 일본 출판계를 선도해온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의 오스카 노부카즈 전 사장은 지난 11월 한국을 찾았을 때 베스트셀러의 90% 이상이 자기 계발서와 재테크 서적인 한일 양국의 출판 시장에 크게 우려한 바 있다. 동감이 가는 지적이다. 자기 계발서를 읽느니 차라리 로또를 사는 게 낫다.
잘 쓴 자기 계발서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읽는다. 수백만 부 씩 팔려나간다. 성공하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는데 물경 수백만 명이 '성공하는 비법'을 공유하게 되는 셈이다. 경쟁 압력은 그만큼 더 늘어나고 성공할 확률은 그만큼 희박해질 게 뻔하다. 그렇다고 '안 팔린' 자기 계발서만 찾아 읽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자기 계발서를 그렇게들 읽어대는가(<88만원 세대>는 잘나가는 자기계발서 판매량의 10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답은 간단하다. 자신이 성공할 가능성이 절망적으로 낮아서다. 희망을 구입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다. 마약으로 배고픔을 달래듯, 오늘도 자기계발서는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이명박의 지지율이 불가사의하다고?
이번 대선에서 결국 누가 당선되든 선거기간 동안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압도적 지지율은 많은 이들에게 그 자체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더구나 검찰의 BBK 수사 중간 발표는 이명박 후보에게 '절대 반지'를 끼워준 격이 됐다. 숱한 의혹과 도덕적 흠결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은 요지부동이었다. 절반 이상의 시민들이 도덕성을 의심하면서도 또 지지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어떤 가치도, 어떤 이념도, 어떤 윤리·도덕적 칼날도 이명박 후보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여러 가지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이번 대선을 압도한 단 하나의 이념 때문에 그렇다.
겉보기에는 모든 유력 후보가 '경제 살리기'를 강박적으로 내걸고 경제라는 프레임 안에서 경쟁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국가의 경제 정책에 대한 대선 후보의 토론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렇다고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지표가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다. 경제가 정말로 화두라면 시민들이 자신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지지해야할 텐데,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즉, 사람들이 지금 말하는 경제는 경제의 탈을 쓴 다른 무엇이다. 그것을 필자는 '먹고사니즘'이라 부른다. "나도 좀 먹고살자"는 말 앞에서 다른 모든 가치는 하릴없이 녹아내렸다. 먹고사니즘은 경제적 측면을 거짓 환기시키는 정치 이데올로기다. 이것이 정치적인 이유는 탈정치성이야말로 가장 노골적인 정치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제주의와 실용주의를 표방한 탈정치주의는 본래 산업화 세력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민주화 이전에 그들이 강요한 정치적 이념은 '반공'이었고, 다른 이념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이 산업화 세력이 내세운 탈정치주의의 정체였다. 다시 말해 산업화 세력의 탈정치성은 곧 반공 이외의 모든 정치적 가치를 말살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절차적 민주화를 거치며 민주화 세력이 의미 있는 사회 세력으로 부상하게 됐고, 산업화 세력 역시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먹고사니즘'의 탄생
먹고사니즘은 이런 정치 세력 구도, 즉 민주화 세력 대 산업화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서서히 자라났다. 외환 위기 이후의 급격한 사회구조적 변화를 거치면서, 정치와 경제의 분리 현상이 강화됐다. 제도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 양자 모두에서 이런 분리가 진행되었다. 정치 세력과 관료에 의해 경제가 통제되던 상황은 정경유착과 관치금융이란 이름의 '악성 종양'이 되어 대대적인 수술이 벌어졌다.
1990년대의 대중문화의 팽창과 자유주의 세력의 득세는 "모든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테제 아래서 계급운동보다는 시민운동에 더 천착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다양성을 강조하는 세련된 자유주의자에 의해 거대 정치 담론이나 정치 세력화는 촌스럽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은 비정규직의 급격한 양산이 가져온 노동시장 양극화로 인해 헤게모니를 상실해갔다. 민주화 세력이 집권한 10년 동안 빈부격차는 날로 심해지고 빈곤선을 들락거리는 영세자영업자의 수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났다. 개인들은 파편화되었다. 사회통합의 가치는 정치인의 입 발린 연설에서도 듣기 힘들게 됐다. 대신에 "자기 경영"과 같은 '각개전투의 단어들'이 어느새 사회를 뒤덮었다. 먹고사니즘은 시대 정신이 되었다.
특히 88만 원 세대를 포박하고 있는 승자독식 이데올로기는 먹고사니즘의 하위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모슨 일이든 용인되며, 승자독식의 룰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절박한 인식이 보편화됐다. 먹고사니즘은 민주화 세력에게도 산업화 세력에게도 공히 위협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회창 후보의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느냐"는 일갈에서, 그리고 이명박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정동영 후보 지지까지 선언한 이장춘 전 대사의 호소에서, 먹고사니즘, 다시 말해 경제 제일주의에 의해 위협받는 이른바 '정통 보수 세력'의 위기의식이 절묘하게 드러났다. 정치로부터 분리된 '경제'가 이제 보수주의의 가치마저 집어삼키려하고 있는 것이다. 탈정치화한 '경제'는 이미 특정 정치세력은 물론이고 시민들의 민주적 통제조차 불가능한 괴물로 우리 앞에 당도했다.
다시, 문제는 정치다
20대들에게 '88만 원 세대의 연대'가 해법이라고 이야기할 때 즉각 튀어나오는 반응이 바로 "우리 보고 뭐 어쩌라고!"다. 짱돌과 바리케이드를 구경조차 못했던 20대가 어떻게 연대하고 싸우겠냐는 얘기다. 1990년대 중반에 20대에 들어선 세대는 그래도 선배들이 연대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목격한 세대다. 하지만 그 이후 세대에게는 (아무리 비유라 할지라도) '짱돌'과 '바리케이드'는 그저 '외계어'일 뿐이다.
어느 독자가 지적한 것처럼, "내가 짱돌과 바리케이드를 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혼자 공부해서 출세하면 나만 손해"다. 정말 그렇다. 게임이론을 봐도, 경제학적으로 사고해 봐도, 88만 원 세대들이 도달할 내시 균형은 '취업준비 열심히 하는 것'이다. 개별 해법으로서는 그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상위 5%를 제외한 88만원 세대의 상황이 절망적인 것은 그래서다. 아무리 '짱구를 굴려보아도' 답이 안 나온다.
유일한, 그리고 근본적인 해법은 개별 해법이 아닌, 정치라는 이름의 집단 해법뿐이다. 정말 입이 아플 정도로 반복하지만, 88만 원 세대의 연대가 필요하다. 그들은 연대하는 법을 배운 적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386'들 역시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연대는 학습되는 것이고, 지금부터 88만 원 세대 학습을 시작하면 된다. 누구에게서? 아무도 없다. '자습'이다.
몇몇 기성세대가 연대할 수 있고 반드시 그래야 하지만, 결국 88만 원 세대 자신이 배워나가야 한다. 그것이 거대한 스크럼이 될지, 튼튼한 바리케이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어떤 형태일지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되찾게 되는 것은 '다시, 정치'일 것이다. 경제의 탈정치화가 빚어낸 작금의 상황은 한국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에 정치의 귀환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상황이다. 먹고사니즘과 같은 괴물을 낳은 '정치의 경제화'가 아니라, 88만원 세대가 봉착한 죄수의 딜레마를 끊어버릴 수 있는 '경제의 정치화'가 절실하다.
<반지의 제왕>을 보면, 중간계에서 가장 약한 종족인 호빗이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지금은 기성세대가 무시하고 비웃지만 88만 원 세대가 스스로를 구하고, 잃어버린 정치 또한 다시 우리의 곁으로 되찾아올 프로도 혹은 샘이 될지 누가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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