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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노조 파업 철회, 기뻐할 일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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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철도노조 파업 철회, 기뻐할 일 아니다"

박명준의 '유럽에서의 사색'〈28> 독재의 유산, 직권중재

현대에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사관계의 관건은 어떠한 방식으로 민주적 거버넌스(democratic governance)를 구축할 것인가에 있다. 노사관계라고 하는 장은 상이한 이해를 지니는 복수의 집단 간의 각축장이며, 이들 간에 어떻게 민주적인 방식으로 권력 균점을 이루도록 할 것인가가 핵심 과제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타협과 화합의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화합이 야합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일정한 갈등의 과정은 기능적으로 필수불가결하다. 갈등적 상호작용을 통해 밀고 당기며 채를 터는 과정에서 쭉정이와 알곡이 가려지고 궁극에 타협의 실마리가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갈등이 없는 자본주의는 의심스럽다.
  
  지금 독일은 파업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세계화의 광풍 속에서 과거 사회적 합의 모델, 코포라티즘 등으로 알려진 이른바 '독일 모델'은 지난 10년간 적지 않게 바뀌어 오고 있다. 오랜 산업 평화의 시대는 가고, '갈등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년에는 수개월간 공공 서비스 부문 전체적으로 파업이 일었고, 올해는 철도 파업이 굵직한 파업 가운데 가장 여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파업은 거의 반년 동안 이어지고 있으며 오늘까지도 타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독일 철도 노사 갈등에서 새삼 시선을 끄는 모습은 한국에서 자주 말하듯이 "시민을 볼모로 자신의 이해 추구에만 혈안"인 노동조합의 극렬 투쟁 노선에 국가가 공권력을 투입하거나 주동자들을 구속하거나 해서 갈등의 씨를 순식간에 뿌리 뽑지 않고 반년이 지나도록 관망하는 것이다.
  
  왜 독일 정부는 관망만 할까? 어떠한 명분을 들이대서라도 개입하려면 못할 법도 없는데 말이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노사 당사자가 "자율적으로 알아서 하라"는 이른바 '교섭자율주의(Tarifautonomie)' 원칙을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독재의 유산, 직권중재
  
  한국 경제는 5ㆍ16 쿠데타 이후 현재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전시 경제'나 '위기 경제'가 지속되어 왔고 지금도 그 범주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전쟁의 위협'이나 '국란' 등의 수사는 위정자와 국가가 국민들의 강제적 통합과 기존의 정치질서를 재생산하기 위한 의도를 관철시킬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국란 앞에서 통합력을 발휘해서 위기를 극복하는 형태는 분열로 인해 주저앉는 것보다는 바람직하다. 그러나 시장이라고 하는 본원적으로 불완전하고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실체를 끌어안고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쩌면 위기란 상존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상황을 언제나 위기담론의 조성을 통해 색칠을 하면서, 국가의 개입을 정당화하고, 결국 국가가 원하는 방식대로 해법을 마련해 가는 데에 있다. 국가중심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키워온 한국에서 특히 노사관계의 영역에서 위기담론의 조성을 통해 국가의 개입을 정당화했던 대표적인 관행이 '직권중재'라고 하는 제도이다.
  
  직권중재는 궁극적으로 특정한 법률적인 장치를 통해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 중 하나인 파업의 자유를 금지시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 어떠한 이유로든 노동자들과 그들의 자주적인 이해를 대변하는 노동조합의 파업을 금지시킨다면 그만큼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직권중재의 존재는 한편으로는 국가가 공익의 절대 대변자요, 절대 수호자로 나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사회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의 증거다. 즉, 노사양측이 충분한 인내와 관용의 태도를 가지고 문제를 협상을 통해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의심하는 생각이 짙게 배어 있다.
  
  지금 진행 중인 우리나라의 철도 노사갈등이 붉어져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기 무섭게, '직권중재' 결정이 뒤이어 내려지는 모습을 함께 보았다. 매우 놀랐다. 그 속도는 거의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순식간의 사형집행을 방불케 하는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였다.
  
  그리고 직권중재가 내려진 사업장의 노조는 "그래도 파업을 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나섰지만, 결국 조직행동에 나서지 못하였다. "노조원 개인에게까지 손해배상과 형사책임을 물리겠다"는 사용자 대표의 엄포까지 가해진 상태에서 집행부의 선택은 조금만 앞으로 나아가도 모험주의적인 것이 되고 마는 상황이었다고 보인다.
  
  개입 주저하는 독일 정부
  
  한국에서 중앙노동위원회가 전광석화와 같이 직권중재를 결정해 버리고 노동자들의 파업을 금지시키고, 과거 민주화 운동의 화신으로 활약했던 지금의 철도공사 사장이 마치 그의 청년시절 그를 옥죄었던 권위주의 정권이 엄포정치를 펴던 모습을 방불케 하는 으름장을 놓으며, 철저한 불관용의 태도로 일관할 때, 독일은 계속해서 철도파업을 둘러싼 노사 간의 공방이 지루하게 지속되고 있었다.
  
  독일 노사분규는 기관사들(Lokführer)의 독자적인 노조인 게데엘(GDL)과 독일 철도 도이췌 반(Duetsche Bahn)과의 싸움이다. 게데엘은 임금 30% 인상과 독자적인 단체교섭 권한을 요구하고 있고, 도이췌 반은 이들을 10% 인상선에서 달래고 포괄교섭의 틀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 사이 간헐적으로 총파업과 부분파업이 수차례 병행되면서 때로는 전국 수준에서 때로는 지역 수준에서, 때로는 고속 기차가 때로는 지역 기차가 가동을 멈추었다. 당연히 철도에 출퇴근 교통수단을 의존하는 시민들의 경우 불만이 컸고, 언론 역시 노사 모두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면서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부분에 대해서 곱지 않은 입장을 취했다.
  
  노사 모두 기자회견의 장이나 기타 언론과의 노출의 접점을 통해서 상대방을 비난하면서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중재단이 타결을 추구하였으나 독일의 통상적인 노사관계에서의 견해차보다 훨씬 심한 이러한 상황에서 중간 지점을 찾아내는데 실패했다.
  
  애당초 독일은 노동조합이 복수로 존재할 수 있는 제도적인 기반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노동운동은 연대와 통합의 통큰 모습을 이뤄 '노조의 난립' 현상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소위 통합노조(Einheitsgewerkschaft)의 전통은 과거 노동조합 일체를 불법화했던 나치시대를 겪으면서 역사적인 반성의 차원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를 잡았다.
  
  독일의 철도부문은 과거 공공부문에 속했으나 1990년대 부분적으로 민영화를 거치면서 노사관계상에서도 변화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트란스넷(Transnet), GDBA등의 대형노조가 형성되어 이미 상당수의 철도노동자들을 조직원으로 삼고 있다.
  
  2001년에 결성된 서비스 산업 부문의 거대한 단일노조인 베르디(Ver.di)도 준공공서비스에 해당하는 이 부문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대형 노조들이 알게 모르게 경쟁 관계를 형성하면서, 이들 간의 조율도 쉽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노사갈등 뿐 아니라 노노갈등의 양상도 간혹 드러났다.
  
  반면, 기관사 노조 게데엘은 철도산업에 종사하는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 가운데 약 2만여 명 가량의 소수를 차지하는 기관사들만을 조직 대상으로 삼는 특별한 노조이다. 독일에서는 통합노조의 원칙의 바깥에서 따로 독자적인 이해집단화를 추구하는 이러한 노조들을 '직능노조(Berufsgewerkschaft)'라고 명한다.
  
  (직능노조의 또 다른 대표적인 예는 의사들이다. 독일의 대학병원이나 시립병원 등에 종사하는 의사들의 임금교섭은 마부거분트(Marburger Bund)라고 하는 '직능노조'와 공공서비스부문의 통합노조인 '베르디'가 일종의 경쟁적인 관계를 맺으며 추진된다.)
  
  철도 기관사 노조 게데엘은 그간 대형노조들을 중심으로 한 포괄적인 단체교섭 과정에서 자신들의 독특한 지위와 업무역량에 걸맞는 처우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피해의식을 키워왔다. 그것이 폭발한 것이 현재의 철도분규를 낳고 있는 것이고, 현재 가장 큰 관건은 이들을 어떻게 '통합노조'의 범주 안으로 넣을 것이냐에 있다.
  
  철도노조 파업 철회, 기뻐할 일인가
  
  게데엘의 투쟁은 오늘도 지속되고 있고, 매주 독일철도의 소비자들은 언제 파업이 진행되는지, 또 언제 끝나는지에 관심을 갖고 계속해서 언론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독일 철도의 지리한 분규의 지속은 공공서비스의 소비자의 한 사람으로 매우 짜증나는 일이다. 효율성이라고 하는 자본주의 본연의 체제정신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건 너무나 비합리적인 소모전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노사분규를 다루는 방식에는 사회적으로 또 다른 중요한 가치와 그 가치를 수호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것은 관용과 타협의 정신이다. 그리고 파업이 계속해서 진행됨에도 여기에 쉽게 개입하지 않는 것은 그 동안 관용과 타협을 통해 문제를 풀어왔던 관행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민주적 노사관계의 제도를 먼저 지키려는 정신이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노사관계를 바로 잡지 않으면 한국이 선진국으로 가는 것은 분명히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노사관계를 바로 잡는 수단이 직권중재나 공권력 투입 등의 방식이라면, 행여 선진국으로 갈지언정 손가락질 받는 선진국, 민주주의가 살아 숨쉬지 못하는 기형적인 선진국에 불과할 것이다.
  
  직권중재제도의 버젓한 실행, 그에 대한 친숙한 수용은 아직도 우리가 '자율적 사회통합'이 아니라 '강제적 사회통합'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다. 사회적 관용과 타협을 이루는 이성이 아니라 명령과 타율에 의해서 경제가 운용되고 있는 것이다.
  
  국민경제가 마비되고 기업이 파업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 등은 모두 파업의 후유증이고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단기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일들에 공권력이라도 개입되어서 빨리 수습을 하는 것이 낫고, 걸핏하면 파업을 시도하는 철도노조가 없어져 버리는 게 낫다고 누군가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식의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국가 개입이 결국은 노사 당사자 간의 성숙한 관계고양을 통해 그들이 주체적이고 책임 있는 당사자로 거듭나는 길을 차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나아가 노조의 위축은 결국 국민 대다수인 노동자들의 무력화를 초래하며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지 않는다.
  
  계엄령이 아니어도 정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신념이고, 증명 가능한 경험이라면, 노사관계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직권중재는 노사관계의 계엄령적 조치이다.
  이제 직권중재 제도는 내년부터 폐지가 된다고 한다. 사멸해 가는 법률이 그 마지막 효력을 철도노동자들을 향해 한방 뿜어댄 해프닝으로 보기엔 여전히 직권중재에 기대려는 사회심리는 뿌리가 깊다.
  
  향후 직권중재가 폐지된 자리에는 파업시 50%까지 대체인력을 투입하는 것을 합법화한다며 '조삼모사'식 대안이 자리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마도 인력회사를 통해 비정규직들이 그 자리를 메울 것이 뻔하다. 어쩌면 정규직이 파업할 때만 손꼽아 기다리며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비정규직들이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꿈꾸는 민주적 노사관계라는 게 과연 이런 식의 것인가? 지금 이런 상황에서 철도노조가 파업을 철회한 것이 과연 기뻐할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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