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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도난마'는 물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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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쾌도난마'는 물렀거라

[화제의 책] <한국경제 새판짜기>

최근 발간된 <한국경제 새판짜기>는 장하준 캠브리지대 교수를 주축으로 재벌과 사회 간 대타협을 주장해온 대안연대 그룹의 경제학자들과 이들의 교과서격인 <쾌도난마 한국경제>(이하 <쾌도난마>)를 다분히 '의식해' 만들어졌다.

'쾌도난마 한국경제'에 대한 대구(對句)로 '한국경제 새판짜기'라는 제목이 붙은 것이 그러하고, <쾌도난마>의 형식처럼 한국경제에 대한 중진 경제학자들의 대담을 언론인이 진행·정리했다는 점이 그러하다. 심지어 책 표지의 색깔도 <쾌도난마>의 '오렌지색'의 보색인 '연두색'으로 차별화됐다.

무엇보다도 <한국경제 새판짜기>는 곳곳에서 대안연대의 주장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들이 주장한 사회적 대타협론은 "소비자, 노동자와 소액주주 등 약자에 대한 보호가 없고, 일방적으로 재벌을 옹호하며, 시대착오적인 박정희식 국가주도 개발전략, 내용이 없는 사회적 대타협, 공정성이 모자란 국가·관료의 과도한 개입을 주장하는 변종 국가사회주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쾌도난마>를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나온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책은 '한국경제 새판짜기'란 제목에 걸맞게 한국경제를 재정립하기 위해 필요한 새 패러다임과 각종 실현전략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시장 합리주의 △중소기업 중심 △동반성장 △사람 중심 지식경제 등이다.

대담에 참여한 경제학자들은 "합리적 시장개혁론자"를 자처하는 김상조 한성대 교수, 유종일 KDI(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그리고 홍종학 경원대 교수이다. 이들은 모두 시민단체를 경제개혁의 주체로 상정하고, 경실련, 참여연대, 경제개혁연대 등에서 활발히 활동해 왔다.

재벌의 자본파업? 통계에 속지 마라
▲ <한국경제 새판짜기>(김상조, 유종일, 홍종학의 대화를 곽정수가 엮음, 미들하우스 펴냄, 2007). ⓒ미들하우스

김상조, 유종일, 홍종학 세 명의 교수들은 저성장-양극화의 위기에 처한 한국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재벌이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이들은 '재벌이 경영권을 방어하느라 저투자-저성장의 늪에 빠져있다'는 대안연대의 진단을 통계를 제대로 읽지 못한 데서 비롯한 오류라고 비판하며, 각종 통계를 종합해 '재벌의 투자율은 결코 낮지 않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홍종학: "불행하게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투자 규모를 나누어 놓은 통계가 거의 없어요. (…) 대기업 투자는 엄청나게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산업은행 자료를 보면 IT 산업 같은 경우는 2003년도 54.7%, 2004년도에는 72.8%까지 증가했습니다. (…)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구분했을 때 제조 대기업의 경우 설비투자가 20%, 30%씩 증가했습니다. 오히려 투자가 증가했기 때문에 2005년 이후에는 상대적으로 대기업 투자가 줄어든 겁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한국은행 국민소득계정 통계상의 설비투자가 굉장히 낮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는 중소기업 투자가 초토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 재벌은 하도급 중소기업들을 약탈하는 방식으로 이들을 '저투자-저성장'의 악순환에 밀어 넣고 정작 자신들은 '고투자-고성장'을 구가(이른바 '빨대 효과')하는, 한국경제의 암적인 존재다. 따라서 재벌이 반칙을 일삼지 못하도록 시장경제의 규칙부터 투명하고 공정하게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대안연대의 사회적 대타협론이 현실적으로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비판한다. 무엇보다 사회적 대타협의 주체가 되어야 할 재벌과 노동이 이런 타협에 관심을 가질 유인(incentive)이 없고, 또 이런 시스템을 작동하게 하는 또 다른 핵심주체인 정부 관료조직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상조: "대안연대나 장하준 박사가 구상하는 모델은 정부가 산업정책을 설계하고 은행을 통해 집행함으로써, 정부가 재벌을 비롯한 대기업의 경영에 사전적 조정자와 사후적 감시자 역할을 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이 작동하기 위한 전제조건 중에 현실적으로 가장 결여돼 있는 것이 바로 관료시스템입니다."

재벌-관료 동맹의 합창 "기업하기 좋은 나라"

이들에 따르면, 대안연대만이 통계의 허구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 역시 통계에 속는다. 재벌과 지대(rent)를 공유하는 경제관료들, 즉 모피아가 재벌에 대한 각종 합리적 시장규칙을 제거하는데 이런 허구적 논리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이미 출자총액제한제도가 유명무실해졌고, 이제는 금산분리 원칙이 무너지기 일보직전이다.

홍종학: "관료들이 설비투자를 못하고 있는 중소기업이 포함된 국내 총생산 설비투자 통계를 가지고 보고를 하면서, 설비투자가 굉장히 나쁘니까 대기업에 대해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보고하는 겁니다. 반면에 2004년도 산업자원부 보도자료를 보면 (…) 대기업 투자 통계와 한국은행의 국민계정 통계 사이에 괴리가 있고, 이것은 중소기업의 투자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밝혀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대통령 앞에서는 대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보고한단 말이에요. 이건 대통령을 속이는 것과 같습니다."

재벌-모피아 동맹의 행동강령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국가 상(image)으로 집약돼 나타난다. 그러나 아직 국어사전에 등재되지도 않은 '기업하다'라는 동사가 현실에서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재벌과 관료들의 필요에 따라 변주를 거듭한다.

김상조: "우리나라의 재계나 보수진영은 굉장히 모순된 얘기를 하고 있어요. 하위제도 중에서 노동시장의 유연화, 하도급 관계에서의 아웃소싱 확대, 조세 부담 경감, 사회복지 부담 경감 등의 측면에서는 영미식 모델의 도입을 주장하면서, 기업지배구조 측면에서는 경영권 방어 장치의 도입, 금산분리 원칙의 폐기 또는 완화, 인내 자본으로서의 은행의 역할 등에서는 유럽대륙식 모델의 도입을 주장하거든요."

정답은 '경제민주화'

따라서 한국경제 새판짜기의 출발점은 사회적 대타협이 아니라, '재벌 개혁'과 '모피아 개혁'이라는 양 날개를 축으로 시장경제의 올바른 작동을 가능하게 할 '경제민주화', 그리고 이를 견인할 '정치개혁'이라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다.

물론 이들의 강조점은 각각 다르다. 김상조 교수와 홍종학 교수가 각각 "시장규율의 강화, 소액주주운동, 사적소송의 활성화 등과 같은 미시적 운동방식"과 "소비자 혁명"이라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강조한다면, 유종일 교수는 "정치적 리더십"과 함께 "지식경제의 발전과 사회적 자본의 구축"이라는 보다 큰 밑그림을 강조한다.

유종일: "경제가 발전할수록 자본, 노동, 토지 등에 비해 지식이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가 되며, 지식의 증가에 의한 생산성 향상이 경제성장을 견인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경제죠. 한국경제의 성장동력을 회복하는 길은 한국경제를 본격적인 지식경제로 만드는 데서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모든 제도와 정책이 인적자본과 지적자본의 축적을 고취하고 효율화하는 방향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김상조: "모든 국민이 다 동의하는 그런 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또는 그런 뉴 패러다임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초조해하기보다는, 투명하고 공정한 게임의 규칙만 만들어주면 우리 국민의 에너지는 다시 한 번의 도약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투명하고 공정한 게임의 규칙, 그것이 저는 바로 뉴 패러다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보 대타협 혹은 新진보 출연의 희망

<한국경제 새판짜기>는 '먹고 살게 해주겠다'는 구호만이 요란한 가운데 정작 한국경제에 대한 총체적인 상이 부재한 대선 판을 앞에 두고 체계적, 일관적으로 한국경제의 현실을 진단하고 그 앞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또한 많은 이들이 <쾌도난마>를 비판해 왔지만 그 비판의 지점과 내용이 흩어져 있었던 현실에서 이를 한데 모아 정리했다는 점도 이 책의 중요한 업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경제학자 역시 대안연대의 주장이 지닌 의의를 의도적으로든 아니든 지나쳐 버렸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금산분리 원칙'에 대한 대담 부분에서인데, 이들은 '재벌의 경영권을 보장해주자'는 대안연대의 주장을 '재벌에게 은행소유나 금융지배를 허용해주자'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대안연대가 사회적 대타협론을 주장하는 것은 재벌을 마냥 좋아 해서가 아니라, 과거 각종 폐해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산업자본의 역할을 수행해 왔던 재벌이 '금융화(financialization)'됨으로써 국민경제 전체가 공동화되는 것을 막자는 근본취지에서 나왔다는 점이 고려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오해(?)는 대안연대에서 자초한 측면이 크다. 대안연대에서 재벌과 타협을 해서라도 살려야할 '국민경제'와 '산업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공백으로 비워둔 채 그 자리를 '박정희 시대의 교훈'과 '국가의 역할'이라는 추상으로 대체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긋남'은 보다 근본적으로는 주주자본주의를 미시적 경제개혁 도구로 긍정하는 "합리적 시장개혁론자"들의 현실인식과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쾌도난마 진영과 새판짜기 진영이 가장 크게 대립하는 지점은 '재벌 개혁'이라기보다는 '주주자본주의' 또는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관점에서이기 때문이다.

유종일: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맞는다면 주주자본주의에 가장 근접했다고 하는 미국기업들은 모두 단기 실적주의에 빠져 투자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미국 기업은 갈수록 첨단산업이나 새로운 기술개발에서 뒤처져야 하는데, 실제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 경제를 주주자본주의나 금융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의문이고요. (…) 현재 우리나라 재벌 대기업의 지배구조는 아마 총수자본주의라고 해야 할 텐데요, 이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소액주주 권리의 강화와 경영권 방어 장치 약화는 개혁의 지렛대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를 두고 반드시 주주자본주의를 지향한 것이라고 볼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지금 한국경제는 "총수자본주의"가 '총수지배형 금융자본주의'로 진화하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중차대한 시점에 절실한 것은 이러한 진화를 막아낼 진보진영 내의 대타협 또는 신(新)진보의 출연이 아닌가 싶다. <한국경제 새판짜기>가 이러한 희망의 씨앗이 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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