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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한글 민주주의'를 짓밟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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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한글 민주주의'를 짓밟는가?"

홍성태의 '세상 읽기' <9> 위대한 한글 창제의 문화정치

10월 초순은 우리에게 문화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때이다. 햇곡식이 풍성하고 날씨가 좋아서 놀기가 좋다는 말이 아니다. 물론 놀기에도 아주 좋을 때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기념일들이 있다.

먼저 10월 3일 '개천절'이다. 잘 알다시피 이 날은 4340년 전에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처음으로 만든 날이다. 다음에 10월 9일 '한글날'이다. 이 날은 세종 28년(1446년) 10월 9일에 '훈민정음'이 반포된 것을 기리는 날이다. 애초 한글날은 국경일이 아니었지만 2006년부터 국경일로 승격되었다.

두 날 중에서 어느 날이 더 중요할까? 단군은 '한민족'이라는 민족의 형성에서 중요한 문화적 상징이다. 이에 비해 한글은 한민족의 말을 그대로 적을 수 있게 해 주는 글로서 한민족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다. 이런 면에서 한글은 단군보다 중요하다. 아마도 단군께서도 이런 사실을 인정하실 것이다.

한글은 민주주의의 상징

한글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세종실록>에는 세종대왕이 세종 25년에 훈민정음을 만들어서 세종 28년에 반포했다고 되어 있으나, 1960년에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에 의해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학사들이 만들었다고 해서 세종대왕의 업적이 줄어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세종대왕은 참으로 위대한 일을 이끌었다.

한글의 창제는 단순히 우리말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글자를 만든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한글은 한민족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자 참으로 위대한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용성만으로 한글을 평가하는 것은 그 가치를 폄하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한글은 민본주의 또는 위민주의의 사상을 구현한 발명품이다. 세종대왕은 모든 사람이 자기 생각을 잘 나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 현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이것은 더욱 더 중요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정보와 지식의 올바른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모든 시민이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민주주의의 작동은 불가능하다. 한글의 창제는 문화혁명이자 정치혁명의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최만리를 비롯한 양반들의 격렬한 반대가 잇따르게 되었다. 그들의 기득권은 단순히 물리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자가례'를 이용한 규율 정치와 생체 정치에 의해 확립되었다. 그 바탕에는 한자라는 글자의 독점을 통해 작동하는 진리정치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자는 중국을 어떻게 지배했는가>와 같은 책에서 보여주듯이, 옛날에 글자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신비한 것이었다. 특히 한자와 같은 상형문자는 그런 성격을 더욱 강하게 갖는다.

한글은 한자의 신비적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문화적 민본주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한 줌의 양반들을 넘어서 모든 사람들이 정보와 지식의 생산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올바른 사회 발전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문은 양반들의 격렬한 반대 때문에 사실상 곧 닫히고 말았다.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지고 결국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된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양반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한글의 사회적 가치를 죽였다. 기득권에 사로잡힌 수구보수 세력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그들은 흔히 사대적 논리로 자신들의 잘못된 기득권 논리를 정당화한다. 중국 때문에, 미국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일찍이 김시양은 17세기 초에 쓰인 <부계기문>이라는 자신의 문집에 다음과 같은 비판의 글을 남겼다.

우리나라 사람은 비록 박습하고 통달하고 뚫어질 듯 관통하고 있는 사가라고 이름이 있는 자도, 일찍이 동국의 역사를 읽지 않는다. 그러므로 겨우 수십 년을 경과하여 귀로 들을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게 되면 어질고 어리석고 사악하고 바른 것을 거의 알지 못한다. 우리나라 상말에 우리나라 사람이 나쁜 일하는 자를 일컬어 말하기를, "무엇 상심할 것이 있는가. 동국통감을 누가 읽는 사람이 있는가"라고 한다(<부계기문>, 남성만 역(1981), 삼성미술문화재단, 227쪽).

누가 한글을 두려워하는가

양반들은 자기의 역사를 무시했을 뿐더러 한글에 대해서는 아예 '가짜 글자'로 몰아붙이고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한자만이 '진짜 글자'이며 한문을 익혀야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황당한 주장이 횡행했다.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말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을 제쳐두고 한자나 영어로 우리말을 표현한다면, 그는 결코 내게로 와서 꽃이 될 수 없다.

'도시공사'를 '都市公社'나 'SH공사'로 쓰는 것이 한 예이다. 노랑, 파랑, 빨강을 제쳐두고 Y, B, R을 쓰도록 한 이명박 전 시장의 서울 버스 정책도 그렇다. 멀쩡한 '동사무소'를 '동주민센터'로 바꾸는 것은 예산 낭비의 면에서나 한글 문화의 면에서나 그야말로 최악이다. 불행히도 오늘날 정부와 공공기관은 재벌보다 더 심각한 한글 파괴의 가장 강력한 주체가 되었다. 정부와 공공기관의 개혁은 정말이지 시급한 국가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말에 한자어가 많기 때문에, 또한 중국이 갈수록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에, 한자를 섞어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한자 병기는 한자를 자기 글로 표기하는 데 큰 장애를 안고 있는 일본어에서나 필요할 뿐이다. 어떤 보수 언론은 한자 병기를 하고 병기한 한자 옆에 작은 글씨로 그 한자의 발음을 적어 놓고 있다. 이것은 그야말로 완전한 일본식 한자 병기법이다. 일본은 한자를 소리로도 읽고 뜻으로도 읽는다. 우리처럼 소리로만 읽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복잡한 일본식 한자 병기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일본식 한자 병기법은 물론이거니와 어떤 한자 병기법도 사용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것은 한글을 모독하는 것이고 정보사회의 현실도 거스르는 것이다. 한자나 영어를 익히는 것과 한글을 올바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한자나 영어의 중요성을 들어서 한글을 훼손하는 문화적 잘못은 하루빨리 전적으로 시정되어야 한다. 한글 창제의 문화정치는 오늘날 갈수록 더욱 더 중요해지고 있다. 어쩐지, 김수영의 '풀'을 읽고 싶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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