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대선을 맞아 <프레시안>은 기존 매체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연재를 마련했다. 여론조사의 통계 수치로만 존재했던 20대의 생생한 목소리를 독자에게 들려주기로 한 것. 그간 정치 평론을 독점해 온 40대 이상과는 다른 위치에서 정치 현상을 바라보는 이들의 '새로운' 시각이 오는 대선을 둘러싼 얘깃거리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리라고 본다. 이번에 소개할 필자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한윤형 씨다. 그는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아흐리만'이라는 필명으로 한국 사회를 상대로 거침없는 논평을 쏟아내 주목을 받았었다. 그의 뾰족한 글은 적지 않은 팬을 가지고 있다. 한 잡지 칼럼을 통해 그의 글의 팬임을 공개리에 밝힌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은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들이 부리는 지식과 정보의 총량은, 그리고 그 앎에 떠밀리는 생각과 느낌의 포물선은 이들 나이 때의 나에게 견주어서는 물론이고 지금의 나에게 견주어서도 한결 크고 아리땁다. 나이는 한 사람의 지적 정서적 윤리적 성숙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알겠다. 나는 이들보다 두 배는 더 산 듯싶다. 다행이다. 나이 차가 이만큼 크지 않았다면, 나는 질투심 때문에 이들의 글을 읽기 힘들었을 테니." |
검증된 이무기냐, 미확인 생물체냐
검증된 이무기를 택할 것이냐, 미확인 생물체를 믿어볼 것이냐. 이것은 정치인의 능력을 평가할 자료가 부족한 한국의 유권자에게 고유한 문제다. 미국의 대선을 살펴보면 대개 주지사를 역임한 정치인들이 유력 정당의 대선 후보로 나온다. 유럽에서 정치인은 거듭되는 정권 교체 속에서 자신이 속한 정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 책임 있는 위치에서 역량을 발휘해볼 기회를 가진다. 반드시 그런 경험이 있어야만 훌륭한 정치인이 될 수 있는 걸까?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유권자의 평가를 받기 위해선 결국엔 그런 식의 증빙 자료가 있어야 한다.
1997년에 와서야 최초의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한국에선, 애초에 야당 지도자의 정치적 역량을 검증할 기회가 없었다. 자당 소속 국회의원을 관리하고, 정국의 담론을 유리한 쪽으로 끌어오고, 여당 정치인과 '쇼부'를 보는 등 우리가 흔히 '정치적 역량'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정권을 잡기 위한 능력이지 정부를 운영하는 능력은 아니다. 1997년 이전의 상황에서 국정 운영 경험을 상위의 가치에 두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무조건 1번을 찍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판단을 따른다면, 민주주의는 부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2002년 대선은 정치인의 역량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이런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이른바 개혁 성향의 유권자는 '아직까지는 경험으로 역량을 파악할 수 없다'는 답변을 제출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몇 번이나 낙선했고 대선 주자의 '가오'를 위한 정치적 배려였던 짧은 기간의 해양수산부 장관 경력 밖에 없었던 노무현이, 당내 경선에서는 경기도지사 출신이었던 이인제를 꺾고 대선에서는 국무총리 경력을 지닌 이회창을 꺾었다. 정책적 지향이 동일하면서도 정치 경험이 있는 후보를 찾기 힘든 실정에서, 대다수의 유권자는 경험은 없을지라도 지향은 같은 방향에 있다고 믿은 후보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지역주의에 대항한 투사'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그 투사 근성을 발휘하여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향해 싸움을 걸기 시작했다. 그에겐 하나의 원칙이 있었는데, 그 싸움이 반드시 '세치 혀'의 영역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원칙을 표어로 표현해 본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한나라당처럼 행동하되 <조선일보>와 불화하라.'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내세웠던 경제 정책을 하나씩 실현에 옮기면서도 이 정부는 <조선일보>와 싸우는 것으로 자신의 개혁성을 확인하려 했다. "홍보가 곧 정책이다"라는 대통령의 신념은 국정홍보처의 비대화를 낳았고 이 기관을 중심으로 정부는 줄곧 언론사와 줄다리기를 했다. 이렇게 정부가 정책의 생산자이기를 포기하고 담론의 영역에서 언론과의 말싸움에 몰두하는 동안, 그 지지자들이 내걸었던 희망, 상식, 개혁 등의 구호는 내용 없는 우스갯소리로 전락했다. 그러나 여전히 노무현과 그 (열성) 지지자는 이 모든 사태의 책임마저도 말싸움이나 홍보를 통해 한나라당과 조·중·동에 넘길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차라리 박근혜가 이명박보다 나은 이유
이 얘기는 코미디 같지만 우리 일이라서 웃기 힘들다. '검증된 이무기를 택할 것이냐, 미확인 생물체를 믿어볼 것이냐.' 딜레마는 여전히 남는다. 한 번의 선택이 실패로 끝났더라도, 전자를 택하는 것이 반드시 올바른 선택도 아니다. 이것은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 힘든 상황에서 나온 선택의 문제, 말하자면 도박장의 베팅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올해의 대선 정국에서는 이러한 베팅마저 허용되지 않을 듯하다. 각 정파에서 '검증된 구렁이'를 후보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구렁이는 대선을 약 2개월 남겨둔 지금까지 50%가 넘는 지지율로 고공 행진하고 있는 한나라당 대선 후보 이명박이다. 이명박의 핵심 정책은 이미 경선 과정에서 같은 당의 홍준표 의원에게 논박 당했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경부 운하는 '환경 재난'이다. 만일 물류 운반이 문제라면 경부고속도로에 화물 전용 도로를 보강하면 된다. 7-4-7 경제론(7% 성장, 국민소득 4만 달러, GDP 세계 7위)은 잠재 성장률을 무시한 허구일 뿐이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인 대한민국의 사회 문제를 해결할 방안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CEO 대통령'이라는 수식어와 서울시장 경험이 훈장처럼(!) 남는다. CEO 출신 대통령이 경제를 살려줄 거라는 기대는 그야말로 지지자의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 그리고 '서울 시장 이명박'을 돌이켜보면 '대통령 이명박'이 해치울 일들이 걱정스러워질 뿐이다.
차라리 CEO도 서울시장도 안 해 본 박근혜가 이명박보다 나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유는 경제적인 것이다. 박근혜는 일종의 자유방임 경제를 약속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명박이 약속하고 있는 '토건 국가'에 비해 되돌리기 쉽다. 규제는 풀었다가 나중에 다시 만들면 그만이지만, 한번 파기 시작한 운하는 되돌릴 수 없다. 둘째 이유는 정치공학적인 것이다. 만일 박근혜가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나온다면, '독재자의 딸은 안 된다'는 정서를 가진 사람이 반대편으로 결집해서 이명박에 비해 상대적으로 근소한 차로 당선될 것이다. 이 경우 당선되더라도 박근혜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의 요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인 면에서나 정치적인 면에서나 박근혜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통나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으로는 '통나무'가 '돌진하는 구렁이'보다 낫다.
박근혜가 이명박보다 나은 마지막 이유는 민주주의의 성숙에 관한 것이다. 박근혜가 전통적인 한나라당 지지층에 기대고 있다면, 이명박은 2002년에 노무현을 지지했던 사람의 지지마저 업고 있다. 이런 토양에서 당선된 그는 반대파의 의견을 묵살하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사안을 처리하는 그의 '리더십'을 좀 더 강하게 밀어붙일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전격적으로 추진한 노무현에 이어 이명박의 '불도저' 공정이 시작되면 우리는 '민주적 리더십'이 무엇인지 논의할 공간마저 잃어버릴 것이다.
이명박의 당선은 "너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줄 테니 알아서 우리를 잘 살게 해줘"라는 식의, 책임지지 않는 표를 행사하겠다는 남미식 '위임 민주주의' 모델에 가깝다. 이런 모델이 정착되면 사람들은 반복적으로 한 인물에게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을 가져다주고 일이 잘못되면 그 사람에게 화를 내는 일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사실상 민주화의 뒷문을 열어 제꼈고, 이명박은 그 문을 나서 역행의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을 위인이다. '독재자의 딸'이라는 박근혜보다 더 말이다. 이렇게 이명박은 본인의 캐릭터로 보나 지지받는 방식으로 보나 문제가 많은 사람이지만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가 되고야 말았다.
차라리 이해찬이 정동영보다 나은 이유
그보다 좀 작은 구렁이는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가장 큰 정동영이다. 대통합민주신당의 후보군은 매력은 없지만 특색은 있다. 유시민을 흡수한 이해찬은 "열린우리당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세력과는 연대하지 않겠다"라는 출사표로 알 수 있듯이 노무현 정부의 노선을 계승하겠다는 사람이다. 그에겐 교육부장관, 국무총리의 경력이 있다.
한나라당에서 뛰쳐나온 손학규는 호남을 순방하며 '햇볕 정책' 지지의사를 밝혔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비한나라당 진영을 통째로 규합하려는 사람이다. 그에겐 경기도지사의 경력이 있다. 그렇다면 정동영은? 통일부장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 열린우리당 당의장을 역임한 나름대로 굵직한 경력의 소유자이건만 뚜렷이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다.
그의 발언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두 가지 정도다. 하나는 2002년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당시 후보 노무현을 일컬어 '극좌'라고 칭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이 다수로 등극한 2004년 총선 직후 열린우리당의 향후 노선을 '실용주의'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 자신을 '중도 실용주의자' 정도로 여기고 있는 모양인데 그 내용이 무엇인지 어떤 정책에 대한 뚜렷한 입장을 통해서 밝힌 적은 없다. 실용주의는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갖추어야 할 종류의 것이며, 혼자서 활동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이념과 결부시켜야 맥락을 가질 수 있는 말인데, 그는 그 맥락을 보여준 적이 없다.
그의 특색, 그리고 그의 성공 요인은 정책적 지향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그는 과거 노사모의 조직을 운용하던 사람을 설득해서 자신의 운동원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열혈 노무현 지지자의 성향은 이해찬에 가깝지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데는 정동영 캠프를 당할 수 없다. 자발적인 지지자들 중에서도 가장 열심히 일하던 사람을 그가 데려갔기 때문이다. 그는 2002년 대선 정국에서 개혁당과 노사모의 자발적인 봉사 활동을 보고 크게 느낀 바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느낀 것이라고는 고작, 저 자발적인 사람의 조직력이 다른 동원 조직보다도 강력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시민의 '참여'에서 '내용'을 소거하고 그들을 '자발적인 동원조직'으로 전락시켰다. 애초에 2002년의 참여자들이 뚜렷한 소신을 지녔다기보다는 감성적으로, 공동체적으로 모였다는 측면도 있지만, 정동영은 그 맹점을 탁월하게(?) 이용한 것이다. 이것이 그를 정책적으로는 그와 흡사한 대부분의 무색무취한 정치인들과 구별시키는 점이다.
그는 참여정부의 '참여'가 공허한 것임을 과격하게 증명하는 변론가다. 내용이 없는 그가 대선 정국에 나와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추상적인 구호로 자신과 한나라당의 차이를 강조하고 이명박을 깎아내리는 것뿐이다. 그보다는 정직하게 참여정부의 노선을 심판받으려고 나오는 이해찬이 한국 정치의 발전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열혈 지지자의 생각처럼 이해찬이 정동영보다 훨씬 나은 인물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민주노동당은 왜 권영길을 선택했나
슬프지만 가장 작은 구렁이는 민주노동당의 대선 후보로 확정된 권영길이다. 민주노동당은 한국의 정당 중에선 유일하게 당원 중심의 정당으로, 원래 인물에 크게 치중하는 정당은 아니다. 인물보다는 정당을 보고 투표하면 된다. 그럼에도 현 시점에서 민주노동당의 대선 후보 경선의 결과에 실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현재의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만큼이나 조직의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문제는 중앙당의 상근자들의 임금이 체불되고 있다는 구체적인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바깥에선 임금을 올리려는 노동조합을 두둔하는 일이 많은 이 정당이, 안에선 자기 조직원에게 월급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정당은 국고 보조금을 받는 정당이므로, 이 사실은 이 정당의 운용에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의 의정활동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는데, 그 바탕에는 우수하고 헌신적인 보좌관과 정책위의 활동이 있었다. 하지만 조직이 흔들리면 그런 바탕도 사라진다. 민주노동당은 지금 김정일 정권보다도 더 위험한 상태다.
또한 정치적으로 볼 때 민주노동당은 당내 자주파의 입김에서 나오는 지나친 민족주의 정책을 탈피해야 할 필요가 있고, '민주노총당'이라는 이미지를 벗어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을 대변할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결국 민주노동당의 대선 후보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지만 심상정, 노회찬과 달리, 권영길은 이런 문제의식이 절박하지 않다. 과거 그는 '말 많은 조직의 말없는 지도자'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민주노동당 각 정파들을 조율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세 번째 대권 도전을 위해 자주파를 적극적으로 껴안고 특정 정파의 대변인이 되었다. 경선 승리 직후 그가 내세운 것이 '코리아 연방제'와 '100만 민중대회'다. 구태의 습속에서 여전히 머물고 있다. 남들은 다 변하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정작 민주노동당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며 배 째라고 거리에 드러누운 격이다.
권영길의 경선 승리는 정치공학적 시각을 넘어서 민주노동당이라는 정치 세력의 존립 의의를 뒤흔든 사건이다. 이들이 한국 사회에 어떤 면에서든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를 쉽게 할 수 없는 것이다. 토론에 강한 노회찬과 경제에 해박한 심상정이라는 매력적인 카드를 짓밟고, 권영길은 이번 대선을 가장 재미없게 만드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구렁이들의 전쟁
이제 이 세 사람이 대선을 앞두고 TV토론에 나왔다고 상상해 보시라. 이명박은 대운하의 정책 타당성이나 재산 축적 문제와 관련된 상대편의 질문을 능구렁이처럼 회피하는 데에 토론의 목표를 설정할 것이다. 정동영은 준엄하고 비장하지만 구체성이 결여된 논변으로 이명박을 공격하는 데에 치중할 것이며, 참여정부와의 연계는 되도록 부정하려 들 것이다. 권영길은 전날 외워온 당 정책을 두 사람의 공방의 맥락에 맞춰 힘겹게 풀어내느라 자신도 지치고 시청자도 지치게 만들 것이다.
세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토론을 통해 뭔가를 얻어낼 수 있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명박이 얻어야 할 것은 '위임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이들의 지지이며, 정동영이 얻어야 할 것은 이명박은 절대로 안 된다는 사람들의 지지다. 권영길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민주노동당 골수표밖에 없다. 2002년에 노무현, 이회창, 권영길이 보여줬던 만큼의 대립각도 화면에 보이지 않는다. 바야흐로 구렁이들의 전쟁, 'K-War(Korean Ratsnake's War)'가 도래했다.
심형래 감독의 <D-War>에 따르면, 이무기가 여의주를 얻으면 용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구렁이가 여의주를 물면 이무기는 될 수 있을까? 십중팔구 구슬을 탐내 자기 뱃속에 집어삼키고 배탈이 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권자들은 5년 후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식칼을 들고 구렁이 배를 갈라 그 구슬을 다시 토해내게 해야 한다. 이렇게 결과가 뻔히 보이건만, 다른 방도는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 대선은 기권을 비난할 수 없는 선거라는 것이다. 유의미한 정치적 실천은 특정한 후보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다른 부분에 있을 테니, 정치를 염려하는 사람들은 그 점을 고민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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