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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고래'가 활개치는 '연못'을 들여다보니…

[연못 속 고래, 국민연금③] 모순과 역설의 국민연금

"연못 속 고래" 국민연금이 '주주가치'를 쫓아 자본시장을 자유롭게 헤엄칠 때 그 연못에는 어떤 파장이 일어날까? 향후 몇 년 간 이 땅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를 상상해 보자.

◇ 론스타로부터 외환은행 되찾기?

국민연금 운용본부는 이미 외환은행을 인수하는 데 뛰어들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토종자본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과 맞물려 정부의 지지를 받고 있다. 연금의 막대한 자본으로 IMF 금융위기 후 외국자본에 넘어간 국내 금융기관들을 되찾자는 것이다. 내년 초 민영화될 예정인 우리금융지주를 국민연금이 인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같은 논리에서 나왔다.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국내 금융자본은 일단은 비판적인 입장이다. 국민연금이 외환은행이나 우리금융을 인수하면 이들은 '공기업형 은행'이 될 것이고, 이는 정부의 은행 민영화 정책과 어긋난다는 것이다. 사실 국민연금이 정부기관처럼 행동할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데도,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속셈은 따로 있다. 공기업형 은행의 양산을 막기 위해서라도, 재벌이 은행을 소유할 수 있도록 금산분리 원칙을 철폐하자는 것이다.

나라 밖에서는 영미 선진국들이 "'국민연금 토종자본 역할론'은 전형적인 외자 차별에 해당한다"며 연일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즈(FT)는 지난 7월 국민연금의 외환은행 인수설이 나오자마자 "국민연금의 한국 내 지위는 한국 자산으로부터의 외국인의 이익 회수를 반대하는 보호주의자들과 잘 어울린다"고 비판했다.

◇ 상장된 삼성생명의 대주주로 등극?

지난 4월 생명보험사의 증시 상장을 허용하는 법이 통과된 후, 삼성생명의 증시 상장은 삼성그룹의 소유지배구조 운명을 결정할 문제로 주목받고 있다. 국민연금이 삼성생명의 대주주가 되면 어떨까? 이건희 회장이 삼성차 채권단에게 상장 후 현금화해 넘기기로 약속한 삼성생명 지분 350만 주(17.5%)가 증시에 풀리면, 이 지분을 국민연금이 사는 것이다. 이는 국민연금을 동원해 삼성을 진정한 의미의 '국민기업'으로 만들어 보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제안하는 방안 중 하나다.

그러나 이 같은 '꿈'이 실현될 경우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삼성생명은 '민간보험', 그 주인인 국민연금은 '공적보험'이라는 기묘한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최근 삼성생명은 고령화의 진전과 함께 급속도로 커지고 있는 연금보험 시장에서 자신의 몫을 키우기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삼성생명의 대주주로서 주주가치를 쫓을 경우, 이같은 삼성생명의 움직임을 적극 밀어줘야 한다. 그런데 이는 공적연금으로서 국민연금의 영역과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기도 하다.

◇ 한국판 벡텔 양성?

지난 7월 정부는 상하수도 사업을 민영화해 이 분야의 글로벌 토종기업을 키우겠다는 내용을 담은 '물산업 육성 5개년 세부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이 야심찬 계획에 '토종자본'이라는 국민연금이 투입되면 어떨까? '주주가치경영'에 입각한 투자 행태를 따르면, 국민연금이 투자한 물 기업은 물 값을 올리고, 수지가 맞지 않는 농어촌 지역에서의 물 공급을 중단하고, 필요하다면 노동자를 해고하거나 비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수익은 국민연금의 '주주'들에게 돌아갈 것이며, 이로 인한 피해는 국민연금 가입자인 '시민'들이 입게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주주'와 '시민'은 동일인물이다.

어쩌면 국민연금 운용자가 국민연금의 공공성을 강조하며 양질의 물을 어디에서나 싼 가격에 공급하는 방향으로 기업을 이끌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벡텔, 베올리아, 비방디와 같은 세계 유수의 다국적 물 기업들과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다. 한미 FTA가 통과되면, 국민연금의 이같은 경영행태가 투자자-국가 소송제(ISD)의 제물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 MS나 GE 같은 미국기업의 주인?

대한민국 국민이 국민연금을 통해 마이크로소프트(MS)나 제너럴일렉트릭(GE)과 같은 미국 굴지 기업들의 주인이 되는 짜릿한 상상도 해봄직하다. 현실에서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했던 것만큼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과거 수십 년 동안 개발도상국의 알짜배기 기업들, 특히 공기업을 민영화해 사고파는 방식으로 천문학적인 금융수익을 올렸던 선진국들이, 개도국들이 똑같은 움직임을 보이자 이에 대해서는 제동을 걸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런 움직임을 극명히 보여준 것은 얼마 전 미국에서 세계은행(World Bank) 주최로 열린 '국부운용포럼'이었다. 이 포럼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들은 '연기금과 같은 국부 운용기관의 국제투자에 대한 규제방안을 만들자'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했다. 그 명분은 국제금융시장의 안정을 도모하자는 것이었지만, 그 속내는 제조업에 이어 금융업 부문에서까지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고 있는 중국, 러시아, 한국 등 개도국들을 따돌리자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제2의 '사다리 걷어차기'가 시작된 것이다. (결국 이 포럼이 끝나자마자 중국은 독자적인 국부운용포럼을 열겠다며 반격에 나섰다.)

이론의 공백

이처럼 자본시장 안으로 걸어 들어간 국민연금은 론스타의 '먹튀', 생보사 상장 및 삼성그룹의 소유지배구조 문제, 수자원 민영화와 같은 국내 문제에서부터 선진국과 개도국의 금융시장 쟁탈전과 같은 국제적 차원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엮이게 된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은 아직까지는 상상에 불과할 뿐이다. 게다가 두서가 없는 상상이다. 하지만 바로 이 '두서없음'이 국민연금의 핵심적 성격이기도 하다. 국민연금은 이해당사자들의 필요에 따라 공적기금이 됐다가 사적자본이 됐다가 하는 회색지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피터 드러커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연기금들은 이상하고도 진실로 역설적인 현상이다. 연기금들은 거대한 공동자본(pool capital)을 통제하고 그것을 투자하는 '투자자들'이다. 그러나 연기금을 운영하는 관리자들뿐만 아니라 연금 기금의 소유자들도 '자본가'는 아니다. 연금 기금의 자본주의는 자본가가 없는 자본주의이다. 법적으로 연기금들은 '소유자들'이다. 그러나 법률적으로만 그렇다."

이 이상하고도 역설적인 연기금의 존재는 이미 우리 앞에 닥친 현실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정치경제적 이론은 아직 그 기초조차 마련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이론적 공백을 틈타 대한민국의 국민연금은 사적 펀드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 26일 국회 예산정책처는 '사회보험성 기금 자산운용 동향분석'라는 보고서에서 "2001~2006년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비중이 연평균 10%포인트 더 높았다면 11조8364억 원의 추가수익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국민연금의 최근 수익률은 6~7%대인데 비해 , 2004~2006년 미국 캘리포니아 공무원 퇴직연금(CalPERS)과 캐나다 연금제도(CPP)의 수익률은 각각 13.4%와 12.3%나 된다고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툭하면 국민연금의 낮은(?) 수익률을 비판하는 데 동원되는 미국 CalPERS와 캐나다 CPP는 사실 연기금 중에서도 예외적인 경우다. 이들을 제외하고는 세계 어느 나라도 연기금을 주식시장에 퍼붓지 않는다. 연기금의 운용은 민간 펀드의 운용과는 달라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인식'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국민연금이 처한 상항은 이같은 당연한 인식이 끼어들 공간마저 없어 보인다. 심지어 국민연금 운용자들은 "의결권 행사의 제1원칙은 주주가치 제고"라면서 "주주가치를 떨어뜨리는 사안은 용납할 수 없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국민연금은 무엇인가?
▲ 국민연금에 대한 입문서로 손색이 없는 <국민연금, 공공의 적인가 사회연대 임금인가> (오건호 지음, 책세상 펴냄, 2006). ⓒ프레시안

'당연한 인식'의 문제로 돌아와 질문을 던져보자. 212조 원짜리 '돈다발'이 아니라, 212조 원 규모의 '공적기금'으로서의 국민연금은 과연 무엇인가?

공적기금은 "특정한 공익적 목적을 위해" 국민의 부담을 전제로 조성된 것이다. 국민주택기금을 조성하고 사용·운용하는 목적은 "국민의 주거안정과 주거수준의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지 수익성 제고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국민연금의 조성 및 사용·운용도 공익적 목적에 부합해야 마땅하다. 그 특정한 목적이란 "국민의 노령·폐질 또는 사망에 대하여 연금급여를 실시함으로써 국민의 생활안정과 복지증진에 기여"(국민연금법 제1조)하는 것이다.

국민연금의 운용에 관한 한 '수익성 제고의 문제'는 본질을 비껴간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물론 이는 우리 모두의 소중한 노후자금을 아무렇게나 굴려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수익성 제고가 경영 원칙일수밖에 없는 민간보험과 달리, 공적기금인 국민연금의 운용에는 '다른 가능성'이 얼마든지 열려 있다는 뜻이다.

국민연금은 사회 구성원들의 끊임없는 조정과 합의를 통해 보험료율과 연금수급률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재정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세대 간 신뢰를 전제로, 자기가 낸 돈으로 자기의 노후를 책임지는 현행 '적립식' 자금조달 방식을 이번 세대의 노후를 다음 세대가 부담하는 '부과식' 자금조달 방식으로 전환할 수도 있다.

반성과 과제

한국의 노동자들은 이 같은 국민연금의 본질을 잊는 듯하다. 보험수급률을 낮추는 내용을 담은 7월의 개편안에 대해서는 '개악'이라며 한 목소리로 비판하더니 (이 '개악'이 통과됐어도, 국민연금이 되돌려주는 돈은 민간연금이 되돌려주는 돈의 2배 이상이다) 자신들의 노후자금을 금융화 연료로 쓰겠다는 위험천만한 내용을 담은 9월의 개편안에 대해서는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현재 국민연금 기금의 운용방안과 관련해 진보 진영이 내놓고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은 '사회책임투자(SRI)'인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면, 기업들이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환경 관련 의무를 준수하며, 나아가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나 금융시장의 안정과 같은 거시경제적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책임투자는 건전한 대안이다. 실효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책임투자를 국민연금의 기본 운용 원칙으로 삼기에는 그 한계가 분명해 보인다. 사회책임투자란 건전한 국민연금 '주주'를 육성하자는 것이지, 국민연금이라는 거대한 공적기금을 어떤 원칙에 입각해 어떻게 운용해 어떤 모습의 한국사회를 건설해야 할지에 대한 근본적인 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계속해서 커지고 있는 이 어마어마한 뭉칫돈은 어쩌자는 것인가. 그 답은 오직 이 돈의 주인, 즉 가입자만이 내놓을 수 있다. 올해로 20돌을 맞은 국민연금, 지난 20년 동안 국민연금을 보살피고 가꾸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했는가? 민주화 세력의 '경제적 무능'을 다시금 반성해야 할 때다. 반성이 개혁의 시작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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