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한국인 피랍 사건을 둘러싼 국내에서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대체로 세 가지 원인이 거론된다. 그러나 사태의 정황을 따져보았을 때, 그런 논의는 더 면밀히 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 논의는 자칫 이번 사태의 본질을 흐릴 가능성이 있을 뿐 아니라, 국내 여론을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호도하고 있어 더욱 우려가 된다.
기독교의 '공격적 선교'가 문제인가?
첫째 기독교 선교지상주의 책임론이다. 많은 이들이 이번 사태의 원인을 한국의 보수 기독교의 선교지상주의에 입각한 행동에서 찾는다. 한국 기독교 일각에서 무분별한 과열 외국 선교 열풍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고, 이는 분명 비판 받을 여지가 있다. 필자도 평소에 이에 대해 늘 비판적인 생각을 지녀왔다. 그러나 과연 이번 사태가 그것에서 비롯됐는지는 의문이다.
선교에는 타문화와 타종교를 완전히 부정하며, 자신의 신앙을 타인에게 강요하면서 노골적으로 개종을 촉구하는 태도를 지닌 배타적 선교도 있지만, 타문화를 존중하며 봉사와 나눔의 성격에 주안점을 두는 보편적 인도주의를 실천하는 포용적 선교도 있다. 전자는 대단히 위험하고 비판을 받아 마땅하나, 후자는 일반적으로 지지를 받아 왔다.
만일 피랍자들이 이슬람교를 부정하는 현지 민중에게 거부감을 주는 행동으로 현지 민중으로부터 빈축을 샀다면 정확히 선교지상주의를 원인으로 지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랍자들이 기독교를 앞세워 이슬람교를 자극했고 배타적 선교로 일관했기 때문에 이 일이 발생했다는 증거는 없다.
이번 사태의 구체적 의제는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종교 갈등이 아니다. 피랍자들은 한국인 기독교도이기 이전에 '현 아프간 정권과 그의 친미 동맹국의 비호 속에 아프간에 와서 활동하는 외국인'이라는 범주로 무차별적으로 간주돼 납치됐을 뿐이다. 한국인인지 모르고 납치를 했다는 탈레반의 진술에 주목한다면, 이는 그간 끊임없이 진행돼 왔던 중동의 급진 무장 이슬람 세력의 서방 기자. 국제 비정부기구(NGO) 활동가 납치 등의 통상 관행과 그 성격이 전혀 다르지 않다.
따라서 현 상황의 본질은 민감한 분쟁 지역에서 외세에 의해 축출된 후 재기를 노리는 토착 정치 집단이 (배경이야 어떻든) 그 지역의 민중에게 도움을 주려고 찾아온 중립의 외국인을 납치해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이루려는 가운데 인권 억압과 심지어 살인을 자행하고 있는 실상에 맞추어 파악돼야 한다.
30년의 비참한 내전 속에 피폐한 아프간 민중을 향해 (예수든 석가든 알라든) 누군가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자신의 비용과 시간을 들여 아프간 사회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 지금과 같은 핍박을 받을 사유로 정당화 될 수는 없다. 나아가 특정 극렬 집단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결과만 놓고, 피랍자들을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요, 선교제국주의자들이라는 식으로 도매금으로 매도하는 것도 과한 해석이다.
요컨대, 이번 사태를 놓고 종교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다. 그것은 자칫 탈레반의 행위를 놓고 이슬람 일체에 대하여 적대감을 품게 만드는, 또 다른 비이성적이고 잘못된 결론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다. 다만, 한국 교회가 반성할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알아서 그리고 철저히 반성해야 한다. 현재의 한국 기독교와 분쟁 지역의 선교를 주관하는 주체들이 이슬람과의 대화를 통해 건강한 소통과 공존을 추구할 정도의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피랍자의 안전 불감증에만 책임을 돌릴 수 없다
둘째는 안전 부주의론이다. 그들은 위험 지역을 그것도 눈에 띄는 낯선 전세버스를 타고 육상 이동을 하다가 탈레반의 시야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혹시 그것이 한국 사회 내에 만연된 안전 불감증과 무사안일주의적 생각의 연장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아마도 이는 앞으로 세계로의 진출을 지향하는 우리 국민들 모두 진지하게 깨닫고 바꾸어야 할 관행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개인들의 안전 불감증이라는 식으로 행위자의 틀에서만 해석하는 것은 협소한 시각이다. 한국 사회에서 늘 빈번히 발생하는 대형 참사도 하나는 구조상의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러한 결함을 인지하고 예방하는 프로그램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임을 감안하면, 사고에 대한 책임을 단순히 피랍자들의 부주의로만 돌릴 수 없지 않을까?
특히 행위자들의 부주의만 강조하는 것은 정부에게 손쉬운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낳는다. 정부는 분쟁 지역이든 안전 지역이든 자국민을 끝까지 보호하고 그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이를 계속해서 강화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 정부가 모든 개인을 일일이 상대하기 어렵고 정부에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사전에 아프간에 민간 봉사단들이 활동하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면, 과연 해당 단체들과 어느 정도의 교감을 했고,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어떠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는지 점검해야 하지 않을까.
그랬을 리 없으리라 믿지만, 행여 '마음대로' 와서 있으니 현지의 안전도 '알아서' 하라는 식의 태도를 취했다면, 이는 자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니는 정부의 모습이 아니다. 또 사건이 난 후에 관계 당국의 실무 담당 공무원을 처벌하거나, 이번처럼 '출입 자제 국가'를 선정하여 그곳에 출입을 하는 국민들을 처벌하는 '처벌주의식 사고'도 궁극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과연 파병 때문에 피랍됐을까?
셋째는 파병 원인론이다. 이는 우리 정부가 아프간 파병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사태 발생의 빌미를 주었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사태의 진행을 살펴보면, 이번 사태가 과연 한국이 파병을 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일까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탈레반은 처음에는 한국군의 파병 철회를 요구하는 듯했으나, 이제는 금전적 보상이나, 포로와 인질의 맞교환을 요구하고 있다. 애당초 한국인인 줄 모르고 납치했다면, 한국군의 철군도 궁극적인 요구사항이 아닐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듯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수세에 처한 탈레반은 미국 중심의 국제사회에 대해 매우 광범위하게 '적' 개념을 설정해 놓고 있다. 현재의 친미 아프간 정부의 정당성을 부인하지 않고 현정부 하에서 진행되는 아프간 재건에 도움을 주는 일체의 외국 정부는 군대의 파견과 무관하게 탈레반의 적으로 간주되고 있다. 한국 정부의 군대 파병과 한국 민간의 봉사활동 프로그램간에 관련성이 없다는 사실도 탈레반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현재 피랍자들은 탈레반이 원하는 포로 교환의 수단으로 이용할 가치가 있는 민간 외국인일 뿐이다. 파병국이 아니더라도 현 아프간 정부를 지원하는 국가의 국민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국의 민간인은 탈레반의 전략에 충분히 이용될 수 있다. 따라서 정부가 파병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민간 차원의 봉사 활동이 진행되었다고 해도 이번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아프간을 얼마나 알고 있나?
그럼에도 분명 파병이라는 수단의 적실성에 대해서는 적절한 성찰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필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아프간 문제를 군대를 통해 해결하는 것은 궁극적인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개입을 대안으로 주장하기도 어려운 상황으로 보인다. 가급적 군대 없이 아프간 시민사회의 강화를 통한 재건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겠으나, 그 길이 맞닿을 또 다른 위험과 한계를 극복하는 것도 분명 용이치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따져보고 싶은 점은 그러한 결론이 도출되는 과정에서 이른바 '공론의 인프라'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갖추어져 있는가이다. 정부는 앞뒤 돌아볼 것 없이 미국의 요구이기 때문에 일단 응할 수밖에 없었고, 파병 반대론이 미국의 군사주의 전략 일체와 우리 정부의 친미사대주의 외교의 문제점에 맞추어져 있다면, 여기에는 공히 '아프간의 현실'에 대한 꼼꼼한 점검이 빠져 있다.
우리보다 더 적극적으로 아프간과 세계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독일 내 정치 세력도 파병을 놓고 입장이 분분하다. 독일은 이라크전에는 참전을 거부하였으나, 현재 아프간에는 약 3000명 가량의 군인을 주둔시키고 있다. 최근에는 아프간 남부 분쟁 지역에 정찰기를 상시 가동하는 등의 증파문제를 놓고 사회적으로 논란을 벌여 왔다.
누구보다 나서서 반전과 평화를 주창해 온 녹색당조차 파병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있다. 당 지도부는 군대의 필요성에 공감을 하고 있는 상황이며, 이는 아프간의 치안이 너무나 불안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치안 유지를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 당의 일부 지부는 어떠한 명분에서든 군대 주둔이 초래할 부작용을 경계하면서 그러한 방법론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녹색당은 내적으로 최종적인 입장조율을 하기 위하여 올 가을에 전당 차원의 대규모 토론회를 계획하고 있다.
필자가 주목하는 점은 결론 이전에 그들의 논의가 '아프간의 현실'에 대한 진단에 방점을 두고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는 비단 녹색당만이 아니다. 독일의 정치권과 사회세력들은 아프간의 현실에 대해서 다각적인 채널을 구축하며 꾸준히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며, 그것은 중요한 국가적 결정을 하는 데 필요한 공론장의 인프라를 두텁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예컨대 사회민주당 산하의 프리드리히에버트재단이나 녹색당 산하의 하인리히뵐재단 등 주요 정치 재단은 현지에 사무소를 설치해, 시시각각 동태를 파악하고 자료를 수집하며 자당의 정책 형성에 기여할 뿐 아니라, 독일과 유럽 내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학문적, 실천적 논의를 주도해 왔다. 또 전국적으로 내전, 분쟁, 평화 등의 문제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5~6개의 민간 연구소들이 대학과 연계를 긴밀히 하여 현지 연구와 대안 모색을 추진해 왔고, 정부는 재정적으로 이러한 곳들을 지원하면서 정부 정책에도 중요한 근거로 삼아 왔다.
그에 비하면 아프간 현실의 심각성을 인지하는 수준에 있어서도, 그에 대한 처방에 있어서도 우리는 너무나 얕은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더러, 그나마도 적극적으로 소통되고 있지 못한 상황으로 보인다. 아프간에서 할 일이 많고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영역이 매우 많다면, 그에 대해서 정부든 선교단체든 보다 적극적으로 국민적인 호응을 불러일으키고 체계적으로 접근을 해야 할 것이다. 행여 파병 결론을 내릴지라도 보다 많은 정보와 소통의 인프라에 기반을 둬야 하며, 반드시 그 목적과 한계가 명확히 정의되는 가운데 내려져야 할 것이다.
그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이다
이번 사태의 본질을 직시하는 가운데, 우리는 평화지향적인 사해동포적 관점에 서서 더 거시적으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분쟁 지역의 외국인 납치는 이제 세계인의 보편적 관심사가 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분쟁지역에서 활동하는 언론인, 정치재단, 종교단체, 시민단체, NGO들의 구성원들은 시시각각 납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끊임없이 납치소식이 들리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활동이 결코 무용하다고 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먼저 사해동포적인 관점에 섰을 때, 피랍자의 구출을 염원하고 인류의 평화 공영을 염원하는 문명세계의 다수의 지지자들에게 보편적 연대를 호소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랍자를 한국의 왜곡된 기독교가 추구하는 편향되고 과도하며 어색한 실천의 담지자들이요, 한국인의 무사안일적 행동주의 문화에 젖어 함부로 움직이던 철없는 외국인들이요, 그리고 미국의 눈치를 보며 비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무원칙한 군사외교국의 국민이라는 이미지에 집착해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이번 피랍자는 한마디로 강도 만난 이웃을 구하러 팔을 걷어 부친 착한 사마리아인의 범주에 속할 자격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이 시대 외세와 내전의 강도를 만나 피폐해진 중동의 한 후진국을 모른 척하고도 충분히 잘 살 수 있었다. 종교적 이유든 양심의 발로든 피 흘리는 먼 이웃을 돌보려고 잠시 멈추어 섰다가 어처구니없게 다시 강도를 만난 그들이 지금 기다리는 건 또 다른 착한 사마리아인이다. 외환위기를 당했을 때 금모으기를 하던 연대의 열정과, 효선이, 미순이가 미군의 장갑차에 유명을 달리하였을 때, 촛불을 들고 서울 시내로 뛰쳐나오던 양심의 열정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바로 당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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