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파업 보도', 한국 언론처럼 하다가는 당장 '퇴출'"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파업 보도', 한국 언론처럼 하다가는 당장 '퇴출'"

박명준의 '유럽에서의 사색'〈20> 독일 언론의 파업 보도

1990년대 후반 이후 극심하게 펼쳐진 한국 사회의 양극화와 그에 대한 조직 노동의 무딘 혹은 더딘 대응은 한국의 '부자 언론'에게 비조직 노동을 조직 노동과 떼어 놓는 절호의 기회를 선사했다. 그들은 비조직 노동자에게 조직 노동자의 단체행동 전략에서 당신은 아무런 덕을 볼 여지가 없을 뿐 아니라 그러한 '이기적' 행동의 피해자라는 인식을 불어넣었다.

기업별 노조가 임금 인상 투쟁을 해도, 산별노조가 정책 참여를 추구해도, 그들은 손바닥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국민'의 이름으로 '파업 혐오'의 사회심리를 일관되게 부추겨 왔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고, 그러한 논지가 지속되는 이유는 지난 수년간 그것이 대다수 국민들에게 말하자면 '먹혔기' 때문이리라.

사회과학의 다양한 조류 가운데 설득력 있는 입장 가운데 하나가 '사회적 이해(social interest)'를 물질적인 조건으로부터 자동으로 유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상황 속에서의 '정의(definition)'의 문제로 바라보는 흐름이다. 몇 개의 부자 언론이 대중의 사회 인식과 심리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국에서 그들이 대중의 '자기이해 정의과정'에 중차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결과 궁극적으로 조직 노동의 동원력이 오히려 자신의 장기적인 이해를 지키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경제적 조건에 처한 사람조차 이를 단기적인 시야에서 부자언론이 가리키는 대로 재단하며, 급기야 자신의 이해에 '반하는 것'으로 정의 내리게 된다. 애당초 사회 연대나 계급 연대의 시멘트가 될 강고한 대항 이데올로기를 역사적 경험 속에서 뚜렷이 키워내지 못한 한국 사회의 대다수 노동대중은 그렇게 부자언론이 함부로 내뱉는 언술의 채찍에 휘둘려 21세기를 더욱 혼돈 속에 살아가고 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독일 언론에서 배우는 파업 보도의 ABC

한국 언론에도 보도되었듯이 어제, 오늘 독일에서 철도가 멈추었다. 특별히 여행할 일이 없어서 기차역에 나가보지는 않았지만 신문을 펼쳐 보고서 파업의 현실을 보도하는 독일 언론의 태도를 접한 필자는 정말로 그 지면의 구성과 내용 앞에서 감동을 느꼈다.

이번 파업은 정상적인 임금교섭 과정에서 특히 기관차 운전자들이 주도한 '경고 파업'이었다. 경고 파업은 1차 임금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 일정한 냉각기간을 거친 이후에 노동조합에게 보장된 분쟁권이다. 독일에서건 한국에서건 기관사야 같은 회사의 역무원이나 다른 저숙련 노동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은 임금을 받는 사람들일 것이다.
▲ 기차역에서 농성중인 독일철도 노조원들. ⓒ로이터=뉴시스

아마도 '파업 파괴 담론 만들기'의 달인인 한국의 언론이었다면 "연봉 수천만 원을 받는 귀족 노동자인 기관사들이 파업을 한다", "시민의 발목을 잡고 볼모로 삼아 이기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노조"라, "넌더리가 난다'는 등등의 수사를 노동조합의 파업에 서슴지 않고 갖다 붙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늘 '파업에 관한 보도=노조 욕하기'라는 등식에 너무나 익숙해져서일까. 그런 류의 제목이 달려 있지 않은 독일 신문을 보자니 왠지 허전함마저 느껴지는 걸 보니, 아마도 부지불식 간에 우리나라 부자 언론들의 '노조 때리기' 논조에 나도 물이 들어 있었나 보다. 섬뜩한 일이다.

그렇다면 독일 언론은 어떤 식으로 파업을 보도할까? 파업 보도의 공식화된 범주 설정은 보수 언론이든 좌파 언론이든 독일 언론도 한국 언론과 크게 다르지는 않아 보인다. 다만 그러한 형식에 담은 내용의 논조가 다르다.

우선 공공서비스에 해당하는 철도의 파업이기에 그러한 서비스의 제공을 받지 못하여 불편을 겪는 사람들에 대한 스케치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취재원은 퍽 공정히 배치되어 있다. 보수 언론인 <벨트(Welt)>나 좌파 언론 <타게스차이퉁(TAZ)> 모두 파업을 지지하는 사람, 그에 무관심한 사람, 불평을 하는 사람들 모두의 의견을 다 소개한다. 일부 막말하는 누리꾼의 의견을 전체의 의견인 양 편파적으로 인용하는 한국의 부자 언론과 다르다.

다음은 임금 요구의 정당성에 대한 헤아림이다. 이 정당성 게임에서 독일 언론이 가장 먼저 살피는 건 기업으로서 '독일철도(Deutsche Bahn)'의 수익이 어느 정도인가이다. <프랑크푸르트알게마이네차이퉁(FAZ)> 같은 보수 언론조차 근래 독일 철도의 경영 흑자가 막대한 수준이기 때문에 이를 적절한 분배하라는 노동조합의 요구는 정당하다는 입장을 싣고 있다. 한국의 노동조합이 파업을 할 경우, 불투명한 경영을 하는 기업의 경영 실적은 끝내 베일에 싸인 채, 그저 노동조합만 무리한 요구를 하는 떼쓰기 집단으로 낙인찍히는 것과 아주 대조적이다.

마지막으로 '노조 때리기'의 감정적 언설을 담은 제목은? '일부(!)' 보수 언론이 이번 파업의 배후에 담겨 있는 노동조합과 기업 간 권력 관계를 헤집거나, 파업 비판자의 석연치 않아 하는 표정을 담은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노골적으로 노동조합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실은 표제어는 그 어떤 기사에서도 찾기 어렵다.

한국 언론처럼 보도하다가는 당장 '퇴출'

그렇다면 왜 독일 언론은 한국의 부자 언론과 같은 식으로 보도를 하지 않을까? 단적으로 독일 언론이 한국 언론처럼 보도를 할 경우, 한편에서는 정론이기를 포기한 태도로 간주되며 그를 견제하는 또 다른 사회적 세력의 강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언론 상품의 소비자들로부터 구매가치를 상하고 조용히 퇴출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전자는 사회의 논리요, 후자는 시장의 논리라 할 수 있다. 언론 권력이 정도를 포기할 때 그것을 견제하는 다른 사회 세력이 취약한 한국 사회와 그렇지 않은 독일 사회, 저질의 언론 상품을 유통시켜도 그것을 구매하고 소비하는 소비자들로 구성된 우리의 언론시장과 그렇지 않은 소비자들로 구성된 독일의 언론시장은 대조를 이룬다.

파업은 어쩌면 꽉 짜인 자본주의 사회의 숨 막히는 작동을 잠시 세우고 성찰하는 기회이다. 해당 부문의 기업주가 배를 불릴 때 이를 나눌 권리를 지니는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행사가능한 정당한 정치적 수단이다. 그것이 이성적으로 보장되고 이성적으로 사용되는 한 오히려 생산 현장의 활력이 될 수 있으며, 미래 노사관계 혁신의 계기이자 전환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사회적 관용과 연대의 미학 그리고 중립의 정신을 다 함께 담고 있는 독일 언론의 파업 보도 기사에는 그렇게 너른 시야에 기초한 헤아림도 내포되어 있다.

부자 언론의 언로 독점 횡포에 맞서는 대항 언론이 힘을 갖게 되고, 이들이 언론시장의 소비자로부터 신뢰를 얻고 더욱 선호되는 날을 고대해 본다. 이미 국가권력조차 부자 언론 길들이기에 실패하지 않았던가. 그러한 날의 도래를 위해서는 교육이 함께 제대로 서야 하고, 직장의 민주주의가 살아서 작동해야 하며, 성찰하고 나누는 지역 공동체가 잘 조직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실질과 내실을 기하는 일일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