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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에 갇힌 '세계적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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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에 갇힌 '세계적 대통령'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19〉칠레와 대한민국

지금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국제연합(UN) 산하의 노사정 3자 기관인 국제노동기구(ILO) 제96차 총회가 한창이다. 해마다 열리는 국제노동기구 총회는 국제노동기준을 채택하고, 회원국들의 노동기준 이행 여부를 점검하며, 예산과 결산을 승인하고, 집행이사를 선출한다. 한국에서도 매년 노동부, 경총, 한국노총, 민주노총으로 이뤄진 대표단을 보내 한국의 노동 상황을 알리고 국제사회의 정보를 모은다.

"사회정의 없이 경제성장 없다"

국제노동기구는 총회 기간에 회원국 정부의 수반을 초청하여 연설을 들어 왔는데, 올해는 미첼 바첼렛 칠레 대통령이 180개 회원국에서 온 노사정 대표단을 앞에 두고 연설하는 영광을 누렸다.

대통령과 같은 칠레 출신 후안 소마비아 국제노동기구 사무총장은 "사회정의 없이는 지속가능한 경제성장도 없으며, 경제·사회·환경 정책의 균형 없이는 지속가능한 발전도 없다"면서 총회 참석자들에게 바첼렛 대통령을 "사회정의를 향한 투쟁으로 일생이 점철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연설에 나선 바첼렛 대통령은 1990년 칠레 민주주의가 복원된 이후 "평등과 함께 하는 성장과 사회정의와 함께 하는 발전을 결합한 새로운 사회 모델을 건설해 왔다"면서 "칠레는 1919년 열린 첫 번째 국제노동기구 총회에 참석했고,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8개 모두를 채택한 아메리카 대륙의 첫 번째 나라"라면서 국제노동기준을 향한 칠레 정부의 노력을 자랑스레 알렸다.

민주화 역사, 칠레 17년-한국 20년

독재자 피노체트의 철권통치를 경험한 칠레와 마찬가지로 한국도 고문과 학살로 얼룩진 쿠데타와 군부독재를 극복하고 민주화에 이르렀다. 칠레가 17년의 민주화 역사를 갖고 있다면, 한국은 6월 항쟁 일어난 1987년부터 셈해서 20년, 김영삼 정권이 출범한 1993년부터는 14년이라는 민주화 역사를 갖고 있다.

1987년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노동계의 요구를 수용해 한국 정부가 국제노동기구에 가입한 게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91년이니, 한국이 국제 수준의 노동권 보장을 약속하면서 국제사회에 참여한 지도 칠레의 민주화 역사와 비슷한 16년이 흘렀다.

군부정권 하에서 급속한 산업화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한국과 칠레는 민주화 이후에도 견실한 경제성장을 이룩함으로써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룬 대표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국제노동기준, 칠레가 한국보다 한 수 위

국제 수준의 노동권 측면에서 칠레는 한국보다 훨씬 건강하게 성장했다. 이는 국제노동기구가 정책의 1순위로 강조하는 핵심노동기준의 기본협약(the Fundamental human rights Conventions)에 대한 두 나라의 비준 현황에서 잘 드러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관련하여 미국 측의 재협상 요구로 유명해진 국제노동기구의 핵심노동기준 8개 가운데 칠레 정부는 8개 모두를 비준한 데 반해, 한국 정부는 그 절반인 4개만 비준한 상태다. 참고로 '인권의 종주국'임을 자임하는 미국은 2개, 미국이 최악의 인권침해국으로 규정하는 중국은 4개를 비준해놓고 있다.
▲ 한국, 미국은 국제노동기구의 국제노동기준을 거부하는 대표적인 나라다. ⓒ프레시안

칠레와 한국의 사례를 분석해보면 두 나라 모두 민주정부의 등장이 핵심노동기준의 비준으로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칠레는 평등대우와 차별금지를 명시한 제100호와 제111호를 사회주의 정부였던 아옌데 정권(1970~1973) 시절 비준했고, 군사독재의 동면기를 거치며 주춤했다가 1990년 민주화 이후 등장한 민주정부들이 나머지 핵심협약들을 모두 비준했다.

김영삼 1개, 김대중 3개, 노무현 0개

하지만, 한국은 김영삼 정권의 1997년 '제100호 동일노동 동일임금 협약' 비준을 시작으로 김대중 정권이 3개 협약을 비준했지만, 이른바 '참여정부'를 자칭한 노무현 정권 들어서는 단 한 개의 핵심협약도 비준하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의 모태였던 신한국당이 여당으로 있던 김영삼 정권 시절 시작됐던 핵심노동협약 비준 흐름은 "1987년 민주화투쟁 이후 민주주의의 정점"에 달했다고 자임하는 노무현 정권에서 멈춰 섰다.

이러한 역설적인 사정은 민주주의를 '정치적 자유화'로 좁게 이해하면서 '사회경제적 민주화'와 연결 짓지 못하고, 한편으론 세계화를 FTA 같은 시장개방으로만 이해하면서 (국제노동기준 같은 국제 사회가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마련해놓은) 사회경제적 인권기준과 연결 짓지 못하는 '집권 386세대'의 천박한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2006년 3월, 국제노동기구는 한국정부에 '노동법과 노사관계 개혁에 관한 권고문'을 보냈다. 권고문에는 △소방관의 노조 결성 허용, 공무원의 단체행동권 억제 제한 등 공무원 노동권의 보장 △기업단위 복수노조의 허용, 노조 전임자 임금의 노사 자율 결정, 파업권을 억제하는 필수공익사업의 재정리, 노조원 자격과 임원 선출의 자율성 보장 등 노사관계 로드맵의 개정 △업무방해 혐의로 인한 인신구속 억제, 폭력적인 경찰력 사용의 자제, 건설노동자들에 대한 공격 금지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이 권고문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반응은 한마디로 '대략 무시'다. 한국은 이미 국제 수준의 노동권을 법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으니 국제노동기구 같은 국제사회가 더 이상 간섭하지 말라는 입장이다. 여태껏 국제노동기구가 권고한 내용들 가운데 한국 정부가 진지하게 개선한 사항은 단 하나도 없다. 오히려 한국 정부는 2006년 여름 폭력적인 경찰력을 동원해 포항에서 부당한 하도급 관계의 정상화를 요구하던 건설노동자 한 명을 "때려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이러한 한국 정부의 태도를 두고 국제노동계는 "건방지다(arrogant)"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세계적인 대통령"의 진정한 모습

지난 6월 2일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평가포럼 강연에서 "저는 과장급 대통령일 때도 있지만, 그러면서도 세계적인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수출과 내수의 양극화가 날로 심해지고, 수출증가가 고용창출이나 서민의 소득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수출액이 사상최고이니 "세계적인 대통령"이라는 걸까. 아니면 국민의 대다수가, 특히 서민의 절대다수가 주식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나라에서 주가가 1700선을 돌파해 한국 부자들과 해외 금융가들의 주머니를 불룩하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세계적인 대통령"이라는 걸까.

그도 아니면, 국민의 절반 이상이 주택과 토지를 소유하고 있지 못한데도 동탄의 신도시 보상금으로 6조 원이라는 단군 이래 최대금액을 풀어 부동산 투기꾼들에게 돈다발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세계적인 대통령"이라는 걸까. "그놈의 헌법" 발언과 더불어 실없는 농담으로 치부하지 않는 한 "세계적인 대통령"을 언급한 노 대통령의 말귀를 도대체 알아들을 길이 없다.

외교여행을 가장 많이 한 대통령 가운데 한 명이 노무현 대통령이라고 한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 '노동자의 벗'이었고 국회 노동위원회 활동에서 얻은 정치적 명성으로 시작해 마침내 집권에 성공한 노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해에 열린 국제노동기구 총회에서 "사회정의 없이 경제성장 없다"는 연설을 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멋졌을까.

"세계적인 대통령"이라는 평가는 끼리끼리 모여 자화자찬하는 '밀실'이 아니라 국제노동기구 같은 역사와 권위를 인정받는 '광장'에서 이뤄져야 한다. 자신의 정권에서 일하던 장관을 인권의 최후보루라는 여겨지는 유엔의 사무총장으로 만든 대통령이라면 더욱 그래야 할 것 아닌가. 바첼렛 대통령의 국제노동기구 총회 연설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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