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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편지'에 숨어 있다

[협정문 따라읽기·2] '독소조항 찾기' 가이드

지난 25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이 공개된 후, 정부와 시민단체·언론·국회 간의 '독소조항' 공방이 뜨겁다.

누군가 협정문에서 독소조항을 찾아내 비판하면, 정부는 이 조항의 내용은 인정하면서도 '그래도 아무 문제 없다'거나 '우리 제도의 선진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반박하는 양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협정문이 공개되기 전에도 상황은 이와 비슷했다.

일반 시민들은 헷갈린다. 하나의 조항을 놓고 한 쪽은 '독소'라고 하고 다른 한 쪽은 '선진화 계기'라고 하니,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 걸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한미 FTA 협정문 내용을 판단하는 데 있어 어느 한 쪽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를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미 FTA 협정문은 '고도의 추상성(high level of abstraction)'을 기초로 쓰여졌기 때문에 얼마든지 '해석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협정문이 한미 FTA 발효 후 벌어질 일들에 대한 법률적 판단 근거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한미 FTA 협정문은, 일단 발효만 되면,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

<프레시안>은 독소조항으로 지적되는 사항을 독자 스스로 협정문에서 확인해 보기를 권장한다. 독자가 적극적으로 '독소조항 찾기'에 나선다면 더욱 좋겠다. 꼭 통상 지식이나 법률 지식이 있어야만 한미 FTA 협정문을 해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협정문에 대한 전문가들의 법리적 해석에는 항상 그 법리적 해석을 요구하는 이해당사자의 '상식적인 해석'이 선행한다.

1300쪽이나 되는 협정문에서 직접 독소조항을 찾아보라니, 무책임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신의 관심 분야 또는 생업 분야를 중심으로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을 참고하면 독소조항을 찾기는 한결 쉬울 수도 있다.

◇ 독소조항은 주로 본문 '밖'에 있다

FTA 협정문은 본문(Text)과 부속서(Annex), 부록(Appendix), 서한(Letter) 등으로 구성돼 있다. 그런데 독소조항은 주로 본문 밖에 있다. 본문이 한미 양국의 통상과 관련된 '일반' 원칙을 다룬다면, '특정' 통상 사안이나 현안은 부속서나 부록, 서한에서 다뤄지기 때문이다.

특히 '대한민국'이 '미합중국'에 보내는 서한에는 여러 독소조항들이 들어가 있다. 협정문이 나오자마자 언론과 시민단체 등이 일제히 지적한 독소조항들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 대표적인 것이 무단 다운로드를 허용하는 인터넷 사이트는 폐쇄하겠다거나 대학가 복제서적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겠다는, 정부의 '간 큰' 약속이다.

"대한민국은 또한 소위 웹하드 서비스를 포함하여 무단 다운로드(및 그 밖의 형태의 불법복제)를 허용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폐쇄하고 (…)." (18장 부속서한)

"대한민국은 대학 구내에서의 저작권 침해행위의 서적 불법복제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저작물의 불법복제 및 배포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계속적으로 강화하는 것에 동의한다. 이에 더 나아가, 대한민국은 이 협정의 발효로부터 6월 이내에 가능한 한 조속히 다음의 조치를 취하는 것에 동의한다." (18장 부속서한)

이런 내용이 독소조항이라는 비판에 대한 정부의 답은 이미 준비돼 있다. 국내법이 이미 이러한 내용들을 담고 있으며, 또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논리대로라면 굳이 이런 것들을 서한의 형태로 미국에 약속해 줄 이유가 없다. 그냥 우리가 알아서 잘 하면 될 일이다.

논란이 된 다른 서한들의 내용을 보자. 서한 중에는 유독 우리 우체국에 관한 것이 많다. 미국이 우리 우체국의 택배 서비스와 보험 서비스에 불만이 많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우편법 시행령 제3조를 개정하여, 협정의 발효일까지 모든 국제서류 배달서비스를 포함하기 위하여 대한민국 우정 당국의 독점에 대한 예외를 확대할 것이다." (12장 부속서한)

"우정사업본부는 변액생명보험, 손해보험 및 퇴직보험을 포함하여 새로운 상품을 출시하여서는 아니된다." (13장 부속서한)


부속서한에 들어간 독소조항의 결정타는 우리 정부의 이른바 '자발적인 자유화 조치'를 미국 측에 약속해 준 것이다. 국내에서도 아직 첨예한 논란이 되고 있는 자본시장통합법의 도입이나 2단계 방카슈랑스의 이행 등이 바로 이 서한의 형태로 미국에 약속됐다.

"자국을 금융허브로 확립하기 위한 전략의 일부로서 이행하기 위하여 대한민국이 취하고 있는 긍정적인 조치를 인정하면서, 미합중국은 진행 중인 대한민국의 세 가지 주요 규제 이니셔티브를 환영하였다. 가. 금융서비스 분야에서 예외목록 규제방식으로의 전환, 나. 방카슈랑스 규제의 제2단계의 이행, 그리고 다. 보험서비스 공급에 있어 외환보유 요건의 추가적 자유화." (13장 부속서한)

이에 대해 정부는 "이는 협정 본문 및 부속서의 내용이 아니라 부속편지에 들어 있는 내용으로, 구체적인 약속이나 법적 구속력이 없는 내용"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처럼 서한을 폄하하는 정부의 설명과는 달리, 통상 협정에서의 서한은 통상장관의 명의로 '정교하게' 작성되는 경우가 많다.

◇ '다만', '일반적으로', '~한 경우' 등의 표현에 주목하라

본문 안에서 독소조항을 찾는 것은 이보다는 조금 더 어렵다. 그러나 여기에도 힌트가 있다. '일반적으로', '다만', '~한 경우에는' 등과 같은 표현이 보일 때는, 그 안에 독소조항이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일반 원칙을 기술하게 돼 있는 본문에서 굳이 '일반론'임을 명시하는 표현을 넣는 의도는 이 일반적인 원칙의 예외가 되는 사항을 규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이 예외조항이 독소조항의 주 서식지가 된다.

미국식 FTA의 최대 독소조항으로 꼽히는 '투자자-국가 소송제(ISD)'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정부는 25일 관계부처 합동으로 발간한 <한미 FTA 상세 설명자료>에서 "조세조치는 직접 수용으로 간주될 수도 있어 별도 부속서에서 조세조치는 원칙적으로 간접수용뿐만 아니라, 직접 수용에서도 제외됨을 명시했다"고 설명했다.

자, 이제 협정문을 보자. 정부가 주장한 대로 "조세조치는 직접 수용에서 제외됨"이 명시돼 있나? 없다. 그 대신 어떤 과세 조치가 수용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때는 "조세부과는 일반적으로 수용을 구성하지 아니한다"는 고려사항을 "고려한다"고만 나와 있다.

"과세 조치가 특정의 사실 상황에서 수용을 구성하는지 여부의 결정은 사안별, 사실에 기초한 조사를 필요로 하며, 그러한 조사는 (…) 다음의 고려사항을 포함하여 그 투자에 관한 모든 관련 요소를 고려한다. 가. 조세부과는 일반적으로 수용을 구성하지 아니한다." (부속서 11-바)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일반적으로'란 단어다. '일반적으로'란 말의 반대말, 즉 '특별히' 혹은 '예외적으로' 조세부과가 수용을 구성하는 경우란 무엇일까? 답은 다시 협정문 안에 있다. "수용이라고 주장되는 과세 조치"는 수용이라는 것이다.

"제11.16조(중재의 청구 제기)는 수용 또는 투자 계약이나 투자 승인의 위반이라고 주장되는 과세 조치에 적용된다." (제23.3조 5항)

이런 말장난은 '다만'이나 '~한 경우에는' 이라는 표현에서도 똑같이 되풀이된다. '다만'의 활약이 눈부신 대목은 정부가 한미 FTA의 전리품으로 극찬하는 외환 세이프가드의 경우다. 정부는 "세이프가드는 투자자-국가 소송제(ISD)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선전해 왔다. 그런데 공개된 협정문에는 "다만 일정한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 요건을 충족하지 못 하면, '외환 세이프가드는 ISD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한 경우에는' 이라는 표현은 ISD에서 다시 한 번 힘을 발휘한다. "공공복지를 위한 정책은 ISD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강변하던 정부조차 "보건, 안전, 환경, 부동산가격안정화정책 등 공공복지 목적의 조치도 그 목적이나 효과에 비추어 해당 조치가 극히 심하거나 불균형적인 드문 상황의 경우에는 간접수용에 해당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 떠오르는 독소조항의 온상 '각주'

협정문이 공개된 후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독소조항의 온상은 바로 '각주'다. 각주의 원래 역할은 본문의 어떤 부분의 뜻을 보충하거나 풀이하기 위한 것이지만, 통상 협정문에서는 강대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해석이나 논리를 명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알 듯 말 듯 애매모호한 내용의 각주로 최초로 지목받은 것은 본문 제5장 '의약품 및 의료기기' 2조 '혁신에의 접근'에 작은 글씨로 덧붙은 각주다. 이 각주에 대해 의료·보건 관련 시민단체들과 민주노동당 등은 '건강보험 약값 적정화 방안을 무력화시키는 독소조항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

"의약품 처방전 개발 및 관리는 정부조달에 관여하는 보건의료 기관을 위한 의약품 정부조달의 한 측면으로 간주한다. 의약품의 정부조달은 이 장의 규정이 아닌 제17장(정부조달)이 규율한다." (제5.2조에 첨부된 각주)

여기서 '의약품 처방전 개발 및 관리'를 '건강보험 약값 적정화 방안(약값 대비 약효가 우수한 의약품만 선별·등재해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게 하는 포지티브 리스트 방식)'으로, '정부조달에 관여하는 보건의료 기관'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 해석하면, 약값 적정화 방안이 정부조달에 해당돼 사실상 무력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관련기사 보기)

이에 대해 정부는 비슷한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인 PBS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호주도 미국과의 FTA 협정문에 이 각주를 넣었으나 이 제도의 시행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반박했다. 이 각주에 대한 일각의 우려는 '오버'라는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는 이같은 정부의 반박에 타당성이 없다고만은 할 수 없다.

하지만, 호주와 한국은 분명히 다른 사회 시스템을 갖춘 각각 다른 국민국가이고, 미국 정부나 미국 제약회사들이 '해석의 여지'가 있는 협정문 조항을 양국에 동일하게 해석하리란 보장도 없다. 지금 당장은 독소조항이 아닐지라도 언제 독소조항으로 변할지 모르는 '예비 독소조항'쯤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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