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환경 조항은 '환경 보호 의무'를 언급하고 있다. 기존의 환경 법규를 성실히 집행하고 더 나아가 투자 촉진을 위해 기존의 환경 보호 수준을 떨어뜨리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일반인이 환경 피해를 입었을 경우 적극적으로 구제하는 것도 강조했다.
이런 기조는 별도의 '한미 정부 간 환경 협력에 관한 양해 각서'에서도 나타난다. 이 양해 각서에서는 양국 간에 환경에 관한 공동 연구, 인적 교류 등을 촉진할 체계를 구축하고, 양국 정부 고위급 관계자로 구성된 환경협력위원회(가칭)를 발전시켜 나갈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환경 관련 내용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가 환경 분야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한 우려가 크다. 그 중심에는 바로 '투자자 국가 소송제(ISD)'가 있다. 그간 수 차례에 걸쳐서 이 제도가 도입되면 보건ㆍ환경 영역 등에서 공공 정책이 투자자의 공격에 노출될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이런 지적은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환경 정책의 수립ㆍ집행은 '사전예방(Preventive and Precautionary)' 원칙을 기초로 한다. 이 원칙은 경제정책 및 행위가 낳을 환경적 리스크(Risks)를 미리 방지, 관리하는 것이 더 낫다는 그간의 경험에 기초한다. 그러나 환경적 리스크의 존재 여부, 그 규모, 그것이 미치는 영향에는 '과학적 불확실성(Scientific uncertainty)'이 놓여 있다.
이런 사정 탓에 사전예방 원칙의 적용 여부, 방법 등은 한 나라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정치적 전통이라는 맥락에서 결정된다. 환경 정책이 단순히 '과학적 확실성'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 문제'로 취급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투자자 국가 소송제는 이렇게 적용되는 사전 예방의 원칙을 무력화한다.
일단 투자자 국가 소송제는 중재자 및 중재 규정ㆍ절차가 양 당사자에 의해 정해진다. 또 중재 심리 과정이 철저히 비밀(confidentiality)에 붙여진다. 이런 성격은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공공 정책을 다루는 데는 부적합하다. 국민 대다수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환경 정책이 특정 기업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논의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제도는 정부 정책의 반사 효과로서 투자 자산의 경제적 가치가 저하되는 이른바 '간접수용'까지도 구제 대상으로 보고 있다. 즉 정부의 특정한 환경 정책으로 한 기업이 애초 예상했던 (합리적인) 영업 이익을 얻지 못할 것으로 판단한다면 국가를 상대로 제소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간접수용'은 국내 헌법의 해석상 수용 불가능하다(김민호 교수).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이 제도에 따라 투자자가 중재 심판을 청구한다고 해서 모두 인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형 법률회사가 대리하는 심판청구 그 자체만으로 적극적 보건ㆍ환경정책의 수립ㆍ집행이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된서리 효과). 이런 사례는 숱하게 많다.
물론 한미 FTA에 '환경, 공중보건, 안전 등 공공의 목적을 위해 시행되는 정부 정책은 간접수용으로 보지 않는다'는 문항이 들어가 있다. 이 때문에 정부는 한미 FTA로 인해 국내의 정당한 환경 규제가 침해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일단 투자자 국가 소송제로 특정 환경 정책의 정당성은 언제든지 시빗거리가 될 수 있다.
어떤 정책이' 환경 정책'인지 아니면 '규제 수용(regulartory taking, 수용과 같은 효과를 내는 규제)'인지를 결정하는 것 자체가 제3의 민간 중재인단에 맡겨지기 때문이다. 일단 이렇게 시비가 붙으면 국내 환경 정책의 정치적, 과학적 정당성은 (환경에 문외한인) 비전문가인 중재자에 의해 침해될 수 있다.
한국 정부가 부동산 정책과 조세 조치를 투자자 국가 제소의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부동산 정책 등이 제소에 휘말릴 가능성을 염두에 둔 탓이 아니겠는가. 보건ㆍ환경 등 공공 영역에서 적극적 보호주의와 개입주의 정치 전통을 가진 국내 사정을 염두에 두면 투자자 국가 소송제는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간의 FTA처럼 삭제돼야 마땅하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