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가 22일 SK,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S-Oil 등 국내 4대 메이저 정유회사들이 지난 2004년 4~6월 가격 담합을 통해 2400억 원의 부당 이익을 취했다고 발표하자, 해당 정유회사들이 석유협회의 입을 빌어 이를 반박하고 나섰다.
하지만 가격담합, 특히 석유업계의 가격담합은 포착하는 것 자체가 극도로 어려운 현실에서 공정위가 해당 정유사들의 가격담합 행위에 대해 검찰 고발 및 과징금 부과 등 초강수 조치를 취한 것은 구체적인 증거물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공정위는 이날 4대 정유사의 가격담합 사실을 폭로하며 이 사실을 입증할 자료들도 추가로 제시했다.
문건 속 가격담합 증거들…'공익모임, 가격인상 협의, 할인폭 축소, 경쟁 자제…'
석유협회는 22일 "국내 석유시장은 수출입이 자유로운 완전 경쟁시장으로 5개의 정유사 등 시장 참여자들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위가 구체적 물증과 명확한 근거 없이 담합으로 무리하게 판정해 과징금을 부과하고 검찰 고발까지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공정위 발표 내용을 반박했다.
석유협회는 "고유가 등으로 경제 여건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 업계와 관련해 사회적으로 논란이 일게 돼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공정위는 가격담합을 했다는 판정을 받은 정유사들의 내부 문건과 상호 교환 문건들을 입수한 상태다. 이날 공정위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이 문건들에는 '공익모임', '시장가격의 인상 (…) 협의', '할인폭 축소 시기', '경쟁 자제 시기' 등 가격담합을 명시하는 표현들이 여럿 나와 있다.
- "2004년 4월 이후 정유사 간 공익모임 운영 중." (2004년 6월 A사 시장동향보고 자료)
- "4월부터는 타 정유사의 주간 공장도 가격 Posting(게시)에 대폭적인 조정이 없는 한 시장가격의 인상은 리터당 5원 수준에서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것으로 협의(시장가격의 과도한 인상폭을 규제하는 것은 과도한 시장가격 하락 방지에도 효과가 있을 것임." (2004년 4월 D사 가격대책보고서)
- "4월 1일부로 할인폭 축소(휘발유/등유/경유 7,000/10,000/10,000)." (2004년 4월 1일자 A사 가격동향보고 자료)
공정위에 따르면, 이들 4개사가 담합을 통해 정유 가격을 인상했을 당시에는 정유의 원료가 되는 원유의 국제가격이 완만한 상승세를 보이면서 정유의 판매가 대비 제조원가가 감소했다. 국내 정유사들이 내수시장에서 활발한 경쟁을 벌였다면, 국내가격(내수가격)이 국제가격(수출가격) 아래로 충분히 떨어질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들 정유사는 경쟁을 통해 정유가를 인하하는 대신 오히려 담합을 통해 가격을 인상했다. 카르텔 형성 전인 2003년 11월 국내 최대의 외국계 석유수입사였던 페타코가 부도 처리되면서 사실상 국내에 이들 메이저 정유사들만 남게 됐다는 점이 바로 이런 카르텔 형성의 간접적인 배경이 됐다.
이들 정유사는 가격담합 과정에서 서로 상대방을 믿지 못하는 전형적인 게임 이론식 행태를 보였다. 공정위가 입수한 문건의 내용을 보면, A사는 D사가 가격담합에 완전히 협조하지 않고 슬쩍슬쩍 가격 인상폭을 줄인다며 불만을 표시했고, D사는 이는 일부 거래의 경우에만 국한될 뿐이라고 변명하는 '웃지 못 할 일'까지 일어났다.
- "(B사는) 할인폭 축소 시기에는 자영대리점을 활용해 시장 관리." (2004년 5월 A사 시장동향보고서)
- "(B사는) 경쟁 자제 시기에도 독자적인 추가 할인 지속." (2004년 5월 A사 내부보고서)
- "타 정유사(A사)는 다음 기준으로 작성한 4~5월 중 사별 가격비교 자료를 제시하면서 당사의 시장가격 정상화 비협조에 불만 표명." (2004년 6월 D사 자료)
- "손익제고를 위해 공익모임을 통한 시장 안정화를 추진하고 있으나 시장 안정화 추진 시 경쟁사 일부 가격 대응. (…) 공익모임을 통한 가격 안정화의 실효성이 떨어지고 있음." (2004년 6월 A사 시장동향보고 자료)
공정위 "가격담합 더 있을 것"…석유협회 "법적대응도
공정위는 이날 국내 4대 정유사들의 가격담합 행위를 발표하며, 이들 정유사의 반박 내용까지 예상한 듯 이에 대한 답변도 사전에 준비했다.
공정위는 특히 "정유사 간 '공익모임'은 유사휘발유인 세녹스에 대한 대책회의"이며 "가격 안정화 추진은 유사휘발유 단속 추진"이라는 정유사 측 주장에 대해서는 "문건에 나온 전후 문맥상 시장 안정화, 시장가격 안정화, 가격 정상화는 '가격인상'을 의미하는 것이 명백하다"고 반박했다.
공정위는 "공정위가 제시한 증거가 정유사들의 가격담합을 입증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정유사 측 주장에 대해서도 "가격 관련 의사 연락을 위한 직접적인 공익모임 결성 및 가격정보의 교환을 통한 상호 이행 감시에 대한 확인만으로도 공정거래법에 위반된다"고 반박했다.
공정위는 또한 "문제가 된 기간에는 가격담합으로 인한 시장성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면서 "석유제품 시장과 가장 유사한 시장구조를 가지고 있는 일본의 경우 같은 기간 원유가와 내수 도매가의 차이가 상당히 좁혀진 반면 한국은 오히려 그 마진이 확대됐다"고 지적했다.
이밖에 공정위는 2003년에도 이들 정유사가 가격담합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관련 자료의 내용을 일부 공개했다.
- "가격인상에 합의해도 이는 현물시장에 한시적으로 적용하고 (…)." (2003년 6월 D사 시장동향보고 자료)
- "당사 가격을 yardstick(척도)으로 시장 가격을 상향 조정하자는 합의를 한 적도 있지만 (…)." (2003년 7월 D사 시장동향보고 자료)
공정위는 2003년에도 이들 정유사들의 가격담합 행위가 있었는지 계속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석유협회는 "향후 각 정유사는 공정위의 결정문을 정밀 검토한 후 법적대응 등 입장을 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공정위의 시정 조치가 '공정위의 추가 시정 조치 대 메이저 정유사들의 법적대응'과 같은 '전면전'으로 확대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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