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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적 자본가'에 몰리는 노동자 보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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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전투적 자본가'에 몰리는 노동자 보듬어라"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12〉이상수, 그 성공의 조건

이번 달 들어 이상수 장관이 노사관계에서 중요한 발언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8일 오후에 전경련 국제경영원이 주관한 '2007년 최고경영자 신춘포럼'에서 "기업은 편법으로 비정규직을 쓰는 일을 지양해야 한다"고 말했고, 9일에는 한국경영자총협회 초청강연에서 법 테두리 안에서 "경영 일부에 노조를 참여시켜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 장관이 이들 자리에서 꺼낸 "전임자 문제보다는 복수노조가 더 큰 문제"라든가 "중앙 중심적이고 의제도 많은 노사정위를 기업별 직종별로 운영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들도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중요한 발언들이다.
  
  "기업의 속성이 이익을 지향하는 것이긴 하나, 사람에 관한 문제는 단기이익을 좇는 데서 벗어나서 인재를 키워내고 투명한 경영과 사람을 아끼는 경영을 해야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문제 등 양극화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며 '사람 중심'의 경영을 강조하기도 했다. 지난달에는 1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KTX 승무원 문제의 해법으로 철도공사가 직접고용을 고민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은 바도 있다.
  
  틀어질 대로 틀어지고 꼬일 대로 꼬인 노사정 관계 때문에 노와 사로부터 큰 호응을 받진 못하고 있지만, 신년 들어 이상수 장관이 보이는 행보가 민주주의가 성숙해지고 경제구조가 고도화될수록 더욱 요구되는 '사회적 대화(soical dialogue)'를 위한 바닥을 다지는 데에 작지만 의미 있는 디딤돌이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노조만 바뀌면 되는 걸까
  
  하지만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장관의 행보와는 달리 2007년 노사정 관계의 전망은 그리 밝지 못하다. 그것은 이 장관이 8일 모임에서 지적했듯이 "국민경제를 고려하지 않고 비정규직과 하청업체 근로자 등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지 못한 일부 대기업노조의 이기적 행태와 도덕적 해이", 또 "노동운동의 바뀌지 않고 있는 전투적 운동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만이 희망적인 노사정 관계를 예측하기 어려운 이유의 전부가 아님은 이 장관이 더 잘 알 것이다.
  
  대기업노조 이기주의, 비정규직과 하청업체 노동자 소외, 소상공인과 농민 등 어려운 이웃에 대한 무관심 등 노동운동이 비판받을 바가 많다. 하지만 이 장관도 잘 알고 있듯이, 대기업노조 이기주의의 가장 큰 수혜자는 노조운동이 아니라 해당 기업이었다. 노동운동이 비정규직과 하청업체 노동자를 소외시켜 얻은 열매는 회사도 (대부분의 경우 훨씬 더 많이) 나눠 가졌다. 노동조합이 농민이나 철거민 등 사회적 약자의 어려움에 함께 하려면 '정치화된 노동운동'이라는 비난이 가해졌다.
  
  한국의 노조운동은 대기업의 울타리를 벗어나려고, 비정규직과 하청업체 노동자를 소외시키지 않으려고, 또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하려고 산별노조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사용자들은 이러한 노조운동의 노력을 진지하게 평가하고 그 발전에 보탬이 되는 게 뭔지를 고민하기 보다는 합법적인 단체교섭 요구에도 응하지 않는 등 훼방 놓기에 여념이 없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노동운동, 전략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 그러나…
  
  벌써 2007년이다. 21세기가 된 지 일곱 해나 지났고, 1987년 민주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에 있은 지 20년째 되는 해다. 시간이 흐르고 사회가 변했는데도 왜 노동운동의 전투적인 방식이 바뀌지 않는지, 그게 노동운동만의 잘못인지에 대해서 노사정 모두가 곰곰이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오래전부터 필자는 노동운동이 전략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중앙 노사정 대화에 참여하고, 지역과 업종별 노사정 대화 역시 발전되어야 한다. 대통령과 장관이 툭하면 시비를 거는 '대기업노조 이기주의'를 낳은 기업별노조 체계를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을 강화하면서까지) 도입한 게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이었음을 논외로 한다 하더라도, 자기 사업장의 단위노조 울타리를 벗어나 상급단체에 진출해서 일하는 노조간부들에 대해서는 회사가 따로 임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고도 생각한다. 몰론 이는 법으로 강제할 것이 아니라 노사 간에 자율적인 교섭과 단체협약을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
  
  당연히 복수노조는 기업 수준까지 모두 허용해야 할 것이고, 노동운동이 국민경제를 고려하고 미조직 영세사업장의 노동자나 비정규직, 그리고 농민이나 빈민 같은 어려운 이웃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본다. 지금의 파업 만능주의적인 경향이나 최대강령주의적인 경향 역시 노동문제의 속성상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자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신이나 할복 같은 극단적인 투쟁 형태는 물론 폭력집회나 심지어는 점거농성이나 단식농성까지도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화와 타협으로 노조의 요구가 받아들여지고, 문제들이 풀려야 한다고 본다.
  
  가장 적대적이고 전투적인 자본가
  
  하지만 필자의 이런 생각들이 '말짱 도루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필자가 생각하는 변화들이 이뤄지려면 자본과 정부의 태도 역시 전향적으로 변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강자들이 먼저 변해야 사회적 약자도 따라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회적 약자한테는 손에 든 돌을 내려놓으라면서 사회적 강자들은 여전히 식칼을 손에 쥐고 있다면 굴종의 삶을 살려는 자가 아닌 이상 손에 든 돌을 내려놓을 리 만무하다.
  
  이상수 장관은 "노동운동의 변하지 않는 전투적인 운동방식"에 대해 지적했다. 나는 묻고 싶다. 노동운동만 전투적인가. 한국의 사용자들은 전투적이지 않은가? 한국의 공권력은 전투적이지 않은가?
  
  한국 사용자들의 전투성은 한국 자본이 투자된 아시아나 중남미를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에서 그 명성이 자자하다.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인 사장은 대만인 사장과 더불어 '가장 적대적이고 호전적인(hostile and militant) 자본가'로 분류된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인 사장이 그 호전성과 전투성을 어디서 체득했을까? 한국 안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한국인 사장들의 호전성과 전투성, 그리고 악착같음을 감안할 때 '안에서 새는 쪽박이 밖에 나가서도 샐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한국의 공권력은 온건하고 합리적인가
  
  물론 사용자의 전투성은 노사관계도 모르고 자본도 부족하고 노조도 없는 한국의 영세사업장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나 삼성 같은 대기업들이 노사관계에서 보여주고 있는 전투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노조와 '자본가'만 전투적인가. 한국 정부는 어떤가? 사용자들이 노조에 폭력을 행사할 때는 뒤꽁무니만 빼던 한국의 공권력은 노조가 회사 건물을 점거하거나 사용자들이 동원한 '구사대'와의 충돌이 일어나면 노조만 조져대기에 바쁘다. '전경'이나 '의경'이라 불리는 세계적으로도 독특한 군인제도를 통해 서민의 아들이 대부분인 젊은이들을 징집해놓고 서민의 민생시위를 진압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정부 안에서 노동문제가 공안문제로 변질되는 중요한 고비마다, 노동정책의 방향이 온건파의 손에서 강경파의 손으로 넘어가는 고비마다 노동부 관료들은 어디서 뭘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목사 삭발과 의사 할복은 '전투적인 방식'이 아닌가
  
  사실 "전투적인 방식"은 노조가 만들어냈거나 노조만 고집하는 전유물이 아니다. 며칠 전 의료법 개정에 반대하는 의사들의 시위가 있었다. 자기 밥그릇 줄어든다고 성난 수천의 군중 앞에서 수술 칼을 잡고 자신의 배를 그어대는 의사와, 이를 말리기는커녕 방조하고 조장한 대한의사협회는 온건하고 합리적인가. 부패의 대명사인 사립학교 이사회에 외부인을 참여시키는 게 그렇게 속 쓰려 집단으로 삭발해대는 목사들은 온건하고 합리적인가.
  
  자기 목소리가 100% 관철되지 않으면 병원 문을 닫고 학교를 폐쇄하겠다는 반사회적인 주장을 서슴지 않는데도 노조의 "전투적인 방식"에 핏대를 올려대던 관료와 사용자와 언론들 가운데 이들 기득권층들을 비판한 이는 없었다. 제국주의, 식민지, 내전, 동족학살, 독재, 살인적인 착취를 통한 압축적 경제성장, 격렬한 민주화투쟁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는 대화와 타협보다는 대립과 투쟁에 익숙해졌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1세기 넘게 이어지고 있는 대립과 투쟁의 역사는 '전투성(militancy)'이라는 유산을 우리 사회 곳곳에 남겨 놓았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병리이지 노동운동만의 문제가 아닌 데도 노조의 전투적인 방식만이 도마에 올려지는 이 부조리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민주화운동 출신 장관'에게 기대하는 것
  
  '민주주의의 공고화'라는 말이 있다. 한마디로 민주주의를 튼튼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 민주주의에 그쳐서는 안 되고,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나가야 한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를 이루는 노동자 농민 서민 같은 일하는 사람들이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면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체제를 말한다.
  
  정기적으로 선거를 하고 정권교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는 그럭저럭 이뤄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비정규직 문제가 말해주고 있듯이 일하는 사람들 다수가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아직 이뤄지지 못했다. 역설적이게도 고용안정과 생활유지에서 독재시절보다 불안하고 어렵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퇴보는 결과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 즉 자유민주주의까지 위협할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사파시즘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합리화 시도에서 그 조짐을 읽을 수 있다.
  
  이상수 장관처럼 정부에 들어간 민주화운동 출신 정치인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우선 노사정에 대한 균형된 시각과 현장을 발로 뛰는 자세를 바라고 싶다. 조폭을 미화한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노조는 욕을 "묵(먹)을 만큼 많이 묵(먹)었다." 노조를 비판하고 공격하는 만큼 이제는 정부와 자본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장관이 전향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도 아랫사람들이 발로 안 뛰면 '말짱 황'임은 틀림없다. 현장을 직접 뛰고 현장의 노사를 직접 만나 현안을 해결하는 그런 장관을 우리는 기대할 수 없을까. 정치인 출신, 그것도 민주화운동 출신 장관이지 않은가. 과천청사와 청와대만 오가며 대통령과 관료의 입에만 매달리는 탁상행정을 이제는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을까.
  
  길어봐야 앞으로 1년일 이상수 장관의 임기 동안 노동정책과 노사정관계의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 사람 진정성은 있었어. 여기까지 와서 우리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어. 우리 편을 들어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쪽 편을 들지도 않았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었어"라고 단 한 명의 노동자라도 기억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장관이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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