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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턴 프리드먼이 남긴 '惡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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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밀턴 프리드먼이 남긴 '惡의 유산'

"개도국 민중에겐 파괴적 태풍의 눈으로 기억될 것"

신자유주의 정책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온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지난 16일 향년 9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국내 일부 언론은 그의 사망을 자유시장주의 내지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계기로 삼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런 일부 언론의 태도는 다음과 같은 기사제목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자유주의 경제학' 거두 밀턴 프리드먼 숨지다 / 시장 신뢰 못 얻은 규제정책 '정부실패 부른다'"(중앙일보, 11월 18일),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 교수 타계 / 경제 살리려면 정부는 제발 가만히 있어라"(한국경제, 17일), "밀턴 프리드먼 타계…'정부개입은 반드시 실패' 설파"(매일경제, 17일).
  
  그러나 국내에도 잘 알려진 반세계화 운동의 지도자인 월든 벨로 필리핀대학 교수(사회학)는 프리드먼의 죽음이 이런 식으로 이용되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벨로 교수는 자신이 이끄는 '남반구포커스'의 웹사이트에 최근 게재한 글 '태풍의 눈: 밀턴 프리드먼과 남반구(Eye of the Hurricane: Milton Friedman and the Global South)'를 통해 프리드먼의 죽음을 바라보는 자신의 감회를 털어놓았다. 다음은 이 글의 번역이며, 원문은 www.focusweb.org
에서 볼 수 있다. <편집자>
  
  태풍의 눈: 밀턴 프리드먼과 남반구
  
  최근 작고한 밀턴 프리드먼에 대해 경제학자들은 얼마 전 <뉴욕타임스>의 전면광고에 나온 표현대로 "자신의 연구작업으로 경제학을 변혁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킨, 자유의 수호자였다"고 찬양하고 있다. 하지만 남반구 민중은 자신들의 경제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친 태풍의 눈으로 이 시카고대학 교수를 기억할 것이다. 그들에게 프리드먼은 칠레의 자유시장적 개혁과 개발도상국들의 '구조조정'이라는 두 가지와 연관된 이름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프리드먼에게 경제학을 배운 칠레인 제자들(이들은 '시카고 아이들(Chicago Boys)'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은 1973년 9월 11일 살바도르 아옌데에 대항해 일어난 쿠데타 직후에 칠레 경제 운영의 주도권을 잡게 되자 자신들이 배운 대로 경제를 개혁하는 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프리드먼은 정치적 자유는 자유시장과 같이 간다고 주장했고, 이런 그의 주장은 다른 이들에 의해 자주 인용되곤 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당시 칠레의 경우 중남미에서 핏자국이 가장 많이 묻은 독재정권의 총검에 의해 자유시장의 낙원이 강요되고 있었다는 아이러니를 프리드먼이라는 스승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프리드먼은 독재정권 하의 칠레를 방문해 그 정권의 급진적 자유시장과 수출지향의 요소들을 추인해주었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원칙적으로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독재자인 그를 찬양했으며, 칠레의 상황에는 걸맞지 않은 '자유의 취약성'을 주제로 연설하기도 했다. 프리드먼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피노체트 정권의 인권침해를 이유로 자신에게 부당한 비난을 가하며 모욕을 주고 있다고 불만스러워했지만, 그 자신이 '칠레의 기적'이라고 묘사한 것에 자신이 학문적 영향을 준 데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칠레의 실험
  
  그의 제자들의 작업으로 인해 칠레는 실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으나, 그것은 더 나빠지는 방향으로의 변화였다.
  
  자유시장 정책은 10년 만에 두 번이나 칠레를 큰 불황에 빠뜨렸다. 그 중 첫 번째 불황은 1974~75년에 일어났고, 이때 칠레의 국내총생산(GDP)은 12%나 떨어졌다. 두 번째 불황은 1982~83년에 일어났고, 이때는 GDP가 15% 떨어졌다.
  
  '프리드먼-피노체트 혁명'의 급진 자코뱅적 단계였던 1974~89년에 칠레의 평균 GDP 성장률은 자유시장과 강력한 성장에 관한 이데올로기적 기대와는 반대로 2.6%에 불과했다. 경제에서 국가가 훨씬 더 큰 역할을 했던 1951~71년에는 칠레의 연간 성장률이 4%를 웃돌았다.
  
  급진적 자유시장의 시기가 끝날 때까지 빈곤과 불평등이 크게 확대됐다. 1980년과 1990년을 비교하면 '극빈선'에 미달하는 가구의 비율이 12%에서 15%로 높아졌고, '극빈선'은 넘지만 '빈곤선'에 미달하는 가구의 비율은 24%에서 26%로 높아졌다. 이는 곧 칠레의 전체 인구 중 약 40%, 다시 말해 1300만 명의 인구 중 520만 명이 빈곤 속에 살았다는 얘기다.
  
  소득분배의 측면에서 보면 전체 국민소득 중 가장 가난한 50%에 돌아가는 몫이 20.4%에서 16.8%로 줄어든 반면, 가장 부유한 10%에 돌아가는 몫은 36.5%에서 46.8%로 극적으로 확대됐다.
  
  경제구조의 관점에서는 기형적인 성장과 급격한 무역자유화의 결합이 한 경제학자의 표현대로 "효율성과 인플레이션 회피라는 이름을 내세운 탈공업화"로 귀결됐다. 이에 따라 칠레의 GDP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960년대 말에는 평균 26%였으나 1980년대 말에는 평균 20%로 낮아졌다. 농업생산과 자원채굴을 우대하는 수출지향 경제 하에서 금속가공 및 관련 제조업 분야 기업들은 도산했다.
  
  프리드먼주의의 완화
  
  칠레의 경제를 역행시킨 프리드먼-피노체트 국면은 1990년대 초 중도좌파 연합세력이 집권하면서 중단됐다. 이 연합정권은 고전적인 프리드먼주의에서 벗어나 소득분배를 개선하기 위한 사회적 지출을 증가시켜, 빈곤 속에 사는 인구의 비중을 전체 인구의 40%에서 20%로 낮추었다. 이런 정책수정은 국내 구매력을 증가시켜, 피노체트가 물러난 이후 칠레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6%로 회복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상층 계급에는 도전하려 하지 않는 사회민주주의 정권 하에서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에 입각하고 있던 경제정책의 기본골격은 농업과 자연자원 수출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그대로 유지됐다. 1차산품 수출에 대한 강조는 환경에 엄청난 긴장을 초래했다. 칠레 연안에서 물고기 남획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내륙 지역에 연어 및 홍합 양식장이 확산되면서 생태적 안정이 허물어졌다. 또한 목재수출 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인공조림지가 확대되면서 자연림이 희생됐고, 그 결과로 칠레는 중남미에서 브라질 다음으로 삼림파괴가 심한 나라가 됐다. 칠레의 환경관리는 수출지향 성장을 위한 당장의 요구에 밀려 전반적으로 효과가 없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혁명'의 수출
  
  칠레를 실험대상으로 삼은 자유시장 패러다임은 1980년대 초부터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을 통해 다른 제3세계 국가들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90여 개의 개발도상국 또는 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결국 자유시장, 즉 '구조조정'의 적용대상이 됐다. 가나에서 아르헨티나에 이르기까지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급격히 축소됐고,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공기업들이 사적 소유로 넘어갔고, 북반구 선진국들의 상품 수입에 대한 보호주의 장벽들이 대대적으로 제거됐고, 외국인투자에 대한 규제가 폐지됐고, 수출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통해 국내 경제가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점점 더 긴밀하게 통합됐다.
  
  1990년대에 개발도상국 경제의 세계화를 촉진한 '구조조정 정책(SAPs, Structural adjustment policies)'은 자유시장 정책이 칠레에 초래했던 것과 똑같은 빈곤, 불평등, 환경위기를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에도 안겨주었다. 다만 프리드먼-피노체트 이후의 단계에 칠레에서 실현됐던 성장세 회복은 다른 개발도상국들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세계은행의 아프리카 담당 수석경제학자는 "우리는 이런 정책들이 초래할 인간적 비용이 그렇게 클 것이라고는, 그리고 그 경제적 이득이 그렇게 천천히 얻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그리하여 결국 구조조정 정책은 불신당하게 됐고,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은 1990년대 말에 그 이름을 구조조정 정책에서 '빈곤감축 전략(Poverty reduction strategy)'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자유시장 정책과 구조조정 정책은 이미 워낙 철저하게 제도화됐기 때문에 이제 그것들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폭넓게 확인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따라서 밀턴 프리드먼의 유산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개발도상국들에 남아 있을 것이다. 사실 프리드먼이 묻힌 묘의 비석에 써넣을 비문으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희곡작품 <줄리어스 시저>에 썼던 다음과 같은 문장보다 더 적절한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사람이 행한 악(惡)은 그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고, 사람이 행한 선(善)은 그 사람의 뼈와 함께 무덤에 묻히는 수가 많다."
  
  (번역=이주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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