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월드컵은 그렇지 않다. 개최국을 포함해 이변을 연출한 국가나 우승 국가에만 행복 바이러스가 전염된다. 내심 우승을 노리던 강호가 탈락하면 그 국가에서는 허무함과 아쉬움만이 남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되지만 적어도 월드컵 기간에는 그렇다.
그런데 월드컵 우승은 지금까지 7개국이 독점해 왔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이었던 셈이다. 그나마 프랑스가 1998년 우승을 차지하기 전까지는 6개국의 전유물이었다.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는 남아공 월드컵의 남은 최대 이슈는 이 월드컵 우승 카르텔이 깨질 수 있느냐에 집중돼 있다.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월드컵에 입맞춤했어야 할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그 후보다.
축구 그라운드를 달리 봤던 네덜란드의 '토털 풋볼'
네덜란드는 화려한 공격 축구를 한다. 언제 봐도 시원시원하다. 세계가 네덜란드 축구를 매력적으로 보기 시작한 이유는 그들이 만든 '토털 풋볼' 때문이다.
'토털 풋볼'은 겉만 보면 전원공격 전원수비의 단순한 전술처럼 보인다. 하지만 토털 풋볼은 우루루 몰려다니면서 체력을 소진하는 방식의 축구가 아니었다.
육지의 4분의 1이 해수면보다 낮은 나라에 사는 탓인지 네덜란드인들은 축구 그라운드라는 공간을 남과 다르게 봤다. 토털 풋볼의 철학도 여기에서 나왔다.
1970년대 네덜란드 축구의 특징은 수비수와 공격수 간의 간격이 다른 팀들에 비해 좁았다는 점이다. 네덜란드는 이 대형으로 효율적인 오프사이드 트랩을 잘 썼다. 1974년 월드컵에서 브라질 선수들조차 네덜란드의 오프사이드 트랩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특유의 개인기를 발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멀티 플레이어도 많이 배출할 수 있었다. 수비수가 상대 진영의 빈 공간으로 침투하면 그 빈자리를 미드필더가 메워줘야 해서다. 미드필더가 비운 자리는 공격수 중 한 명이 커버를 해줬다.
이렇게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듯이 움직이는 네덜란드 축구는 차원이 달랐다. 세상에는 유럽축구와 남미축구 그리고 네덜란드 축구가 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월드컵 우승은 못 했지만 FIFA(국제축구연맹)가 '토털 풋볼'의 대부 격인 리누스 미헬스 감독을 20세기 최고의 감독으로 선정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지난 2일 남아프리카공화국 포트엘리자베스 넬슨 말델라 베이에서 열린 2010 남아공월드컵 네덜란드와 브라질의 8강 경기에서 2:1 역전승을 거둔 네덜란드 선수들이 기뻐하고 있다. 왼쪽부터 디르크 카윗(30, 리버풀), 마르크 판 보멀(33, FC 바이에르 뮌헨), 아르연 로번(26, FC 바이에르 뮌헨). ⓒAP=뉴시스 |
'개인주의' 가 앗아간 월드컵의 꿈
네덜란드 축구는 하부구조가 튼튼하다. 네덜란드 어린이들은 대부분 축구 클럽에 가입돼 있다. 그들에게는 "어떤 팀을 응원하냐?"라는 질문보다 "어떤 팀에서 뛰냐?"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꼭 이들이 축구 선수가 되지 않더라도 축구 팬이 된다는 점에서 네덜란드 축구는 확실히 건강하다.
유럽 빅리그로 성장하기에는 시장이 작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네덜란드 축구 클럽들은 이 태생적 한계를 '상술'로 극복했다. 값싸게 해외에서 선수를 스카우트한 뒤 명문 클럽에 되파는 시스템을 특히 잘 활용했다. 이적료 한 푼 안 내고 데려 온 박지성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보내며 74억 원이나 챙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렇듯 월드컵 우승에 모든 조건을 다 갖춘 것 같은 네덜란드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개인주의'다. 네덜란드 선수들은 자신의 의견을 거침 없이 개진한다. 그런데 그 정도가 보통의 서양 선수들보다 심하다.
전설적 축구 스타 요한 크루이프도 동료 선수들과 트러블이 많았다. 때로는 조율이 되기도 했지만 이런 자존심 싸움은 파벌 형성의 빌미가 됐다. 크루이프는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 불참했다. 아르헨티나 독재정권을 위한 월드컵에 뛰지 않겠다는 의미로 그의 월드컵 불참이 미화됐다.
그는 실제로 가족의 안전 문제 때문에 월드컵을 포기했다. 크루이프와 그의 부인은 1977년 유괴될 뻔 했다. 하지만 이 문제 외에도 다른 선수들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크루이프가 월드컵을 포기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네덜란드는 1974년에 이어 1978년에도 월드컵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을 앞두고 주축선수 훌리트는 네덜란드 대표팀을 스스로 떠났다. 그는 자신을 오른쪽 미드필더로 내세워 '체력전'을 지시했던 아드보카트 감독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더위가 변수로 작용할 미국 월드컵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아드보카트의 전술은 통하지 않을 거라는 주장을 했다. 네덜란드는 8강에 그쳤다.
1998년 월드컵에서 수리남 핏줄의 흑인 선수들은 겉돌았다. 그 중심에는 에드가 다비츠가 있었다. 다비츠는 히딩크 감독과의 격한 논쟁 때문에 '유로 96'때 퇴출됐던 전력이 있었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에 온 뒤, 감독의 지시를 군말 없이 잘 따르는 한국 선수들에 의아해 했던 것도 뿌리깊은 네덜란드 선수들의 '개인주의' 탓이었다.
투우와 닮은 스페인 축구의 패싱 게임
스페인 축구는 한국 축구가 가지지 못한 것을 다 가졌다. 세계 최고의 리그 중 하나인 프리메라리가와 기술력이다. 하지만 정말 부러운 것은 그들의 공을 돌리는 능력이다. 한국이 상대로부터 공을 뺏기 위한 축구를 한다면 스페인은 상대에게 공을 뺏기지 않기 위한 축구를 한다.
상대 수비가 압박해 들어올 때 스페인 선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패스를 한다. 상대의 저돌적인 수비를 즐기는 듯한 자세다. 그러다 상대 수비의 허점을 보는 순간 패스 한 방으로 골키퍼와 1대1 상황을 만든다. 스트라이커는 간결한 터치로 골망을 흔든다.
스페인 축구는 투우사가 빨간 망토(뮬레타)로 성난 황소를 자극하다 결정적인 순간 급소를 찔러 소를 쓰러뜨리는 투우와 닮았다. 투우사는 스페인 선수고 황소는 상대가 되는 셈이다.
투우장에서 투우사가 황소의 기습적인 쇄도를 기술적으로 피하면 관중들은 '올레'를 외친다. 축구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패스가 물 흐르듯 이어지는 동안 '올레, 올레' 함성은 계속된다.
호날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스페인의 주축 선수들이 대거 포진한 바르셀로나에 패한 뒤 "오늘은 정말 내가 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며 고개를 숙였다.
지난 3월 스페인과의 평가전에서 패했던 프랑스의 앙리는 "간단히 말해 스페인으로부터 공을 뺏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스페인의 패싱 게임은 투우만큼이나 잔인하다. 도통 상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아서다.
▲ 4일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앨리스파크에서 열린 2010 남아공월드컵 스페인과 파라과이의 8강 경기에서 스페인의 다비드 비야(29, FC 바르셀로나, 가운데)가 결승 득점을 올린 후 동료들과 환호하고 있다. ⓒAP=뉴시스 |
스페인 축구를 지배해 온 '지역주의'의 빛과 그림자
스페인 프로축구의 열광적인 분위기는 상당 부분 프랑코 독재의 유산이다. 프랑코는 카탈루냐와 바스크를 탄압했다. 언어도 쓰지 못하게 했다. 그 와중에 카탈루냐를 대표하는 축구 팀 바르셀로나와 바스크 지방의 아틀레틱 빌바오는 저항의 구심점이 됐다.
프랑코 정권에 무력저항을 했던 바스크를 닮아서인지 아틀레틱 빌바오는 힘을 중시하는 축구를 했고, 펜의 힘으로 저항을 했던 카탈루냐의 바르셀로나는 기술 축구를 했다. 이 두 팀에 레알 마드리드는 프랑코 정권 그 자체였다. 그 결과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경기는 '국제경기'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런 지역주의는 스페인 대표팀에 늘 족쇄였다. 선수들 간에 단합을 저해하는 요소였다. 언론도 이런 점을 부채질했다. 자연스레 스페인이 기대 이하의 성적을 낼 때마다 '지역주의'는 그 주요 원인으로 거론됐다.
월드컵과 관련해 '지역주의'가 가장 큰 문제가 됐을 때는 바스크 출신의 하비에르 클레멘테가 대표팀 감독이었을 때다. 스페인 국민들은 클레멘테의 대표 선수 선발을 비난했다. 바스크 출신 선수들을 너무 많이 뽑아서다.
참기 힘든 비난 속에서 1994년 월드컵에 나섰던 클레멘테 감독은 명예회복을 꿈꿨다. 그런데 조별 예선에서부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상대는 한국이었다.
한국과 무승부를 기록한 클레멘테를 보고 스페인 사람들은 월드컵의 희망을 버렸다. 스페인은 이 대회에서 8강까지는 갔지만 이탈리아를 넘지는 못했다. 스페인은 축구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거의 모든 걸 갖고 있었다. 하지만 매우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었다. 그들은 한국 축구 같은 조직력이 없었다.
"축구는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경기"
잉글랜드 축구는 월드컵에서 실망스러운 성적을 낼 때마다 살인적인 프리미어리그의 일정에서 희생양을 찾았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유일하게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던 1966년에는 달랐다. 리그를 통해 체력적으로 단련이 된 선수들이 있었기에 우승을 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프랑스의 경우는 더 재미있다. 1998년 우승했을 때 프랑스는 다인종 대표팀을 '이민세대가 만든 훌륭한 조각품'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남아공에서 망신을 당하자 '축구재벌'들이 대거 포함된 다인종 대표팀이 프랑스 아트사커를 망쳤다고 난리다.
월드컵 4강 진출에 실패한 세계 축구의 거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패배 원인은 정반대다. 브라질의 둥가 감독은 그라운드에서 안정감 있는 수비를 강조하느라 선수들을 너무 관리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브라질다운 아름다운 축구를 하도록 선수들에게 자율성을 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반면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 감독은 선수들을 너무 믿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 마디로 감독의 전략은 없었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감독의 작전, 특히 수비에 관한 치밀한 전술이 1994년과 2002년 브라질을 정상으로 인도했다. 1978년 아르헨티나가 우승했을 때도 선수들을 자유롭게 방목하며 화려한 공격축구를 장려했던 메노티 감독은 국민영웅이 됐다.
월드컵이란 축제는 이처럼 변덕스럽다. 그래서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가 남긴 짧은 한 마디는 월드컵 때마다 깊은 여운을 남긴다. "축구는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경기"라는 말이다. 브라질이 네덜란드를 만나지 않았다면, 혹은 잉글랜드가 독일을 피했다면 비난의 화살은 어느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지 모른다.
만약 스페인이 우승을 한다면 '지역주의'는 오히려 스페인의 성공요인으로 둔갑할 수 있다. 국내리그에서 치열한 경쟁이 스페인 축구의 경쟁력을 높인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도 마찬가지다. 월드컵 때마다 네덜란드를 괴롭혔던 '개인주의'는 모험적이며 창조적인 네덜란드 축구에 도움이 됐다는 평가가 나올 수 있다. 월드컵은 오랫동안 축구 열병을 앓아왔던 스페인과 네덜란드 사회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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