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HE WAR, STUPID."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의 지난 9일자 1면 헤드라인이다. 1면 전체에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얼굴 사진을 펼치고 달아놓은 제목이었다. 중간선거의 패인이 전쟁에 있었음을 강조하고, 다른 곳에서 탈출구를 찾지 말라는 거다.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이 1992년 재선에 도전했을 때 클린턴이 내세운 캐치프레이즈, "문제는 경제야, 멍청아"를 패러디하고 있다. 당시 조지 부시는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경제가 나빠져 낙선했다. 이번 중간선거에서는 거꾸로 아들 부시가 호전된 경제를 이슈로 삼고자 했으나 전쟁 비판 여론으로 완패했다.
이번 선거 결과를 놓고 미국 언론의 담론활동과 여론정치, 나아가 민주주의가 살아있다는 증거로 보는 해석도 많지만, 필자가 모니터링한 바로는 미국 언론이 전쟁 비판 여론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9.11 이후 루퍼트 머독 소유의 폭스TV 등 우파 언론들은 전쟁을 부추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고, 소위 미국의 '권위지'들조차 아직까지 애국주의적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MIT 대학의 존 터먼 교수는 올 여름 발간한 저서에서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를 '미국이 세계를 망치게 하는 100가지 중 하나'로 꼽았다. 그는 "이라크전은 대량살상 무기가 아닌 석유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고 "군사작전과 관련한 기사들이 거의 조작됐으며, 이들 언론이 백악관의 조작을 기꺼이 지지했다"고 비난했다. 미국 언론 대부분은 선거전이 시작된 뒤에도 여론조사 보도 등을 통해 전쟁 비판 분위기가 점차 높아지고 있음을 수동적으로 전달하는 데 치우쳤다.
미국언론의 고질병과 민중의식의 빈곤
'9.11 테러 5주년'을 맞아 세계 언론들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신랄할 비판을 가할 때도 미국 언론은 애써 자제하거나, 비판을 하더라도 초점을 흐리는 경우가 많았다. 추모행사 보도에 치중해 다시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거나, '미국이 테러로부터 더 안전한 장소가 됐는가'라는 잣대로만 정책의 성패를 따지는 경향이 뚜렷했다. <뉴욕타임스>는 "대테러 전쟁이 곤경에 빠졌다"면서도 '이라크 철군'에 유보적 태도를 보였고, <월스트리트저널>은 한 칼럼에서 "미군이 지금 최악의 적을 상대하는 데 필요한 전술을 배우고 있다"며 "미국은 더 무자비하고 노련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버마스가 2003년에 한 얘기, 즉 "독일, 프랑스, 스페인에서는 아직도 고급 정론지를 중심으로 토론문화가 유지되고 있지만, 미국과 이탈리아에서는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경로가 막혀 민중의식의 빈곤이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은 부분적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하겠다. 미국 언론의 그런 보도태도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이 네오콘의 대외정책에 반기를 든 것은 어디서 연유를 찾을 수 있을까? 우선 전쟁이 그들에게 너무나 참담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리라. 만약 이라크가 쉽게 평정됐더라면 부시의 개전 자체가 정당성을 획득해 강한 반전여론이 일어나지 않았을 터이다.
또 하나 중요한 변수는 미국 언론을 믿지 못하게 된 미국인 상당수가 해외 언론을 통해 전쟁의 진실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해외 언론이라고 하지만, 같은 영어권인 영국의 일부 언론에 의한 치우치지 않은 전쟁보도가 미국인들의 균형감각을 회복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실 하버마스의 언급 이후 최근 몇 년 간에도 유럽 고급지 시장은 엄청난 판도변화를 겪고 있다. 프랑스를 예로 들면 <리베라시옹>은 10여만 부 수준으로 부수가 줄었고, <르몽드>는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영국은 전쟁 당사국이기도 하지만 <BBC>, <가디언>, <인디펜던트> 등이 전쟁 관련 보도에 상당한 시간과 지면을 할애하는 한편 대담이나 오피니언면 등을 통해 활발한 담론활동을 벌여왔다. 그 결과 각종 테러나 아프간·이라크·레바논 전쟁의 중요한 고비마다 미국 내의 <BBC> 시청률, <가디언>과 <인디펜던트>의 인터넷판 클릭수가 급등했다. <가디언>은 지난해 9월 '베를리너판'으로 판형을 혁신하면서 '월드뉴스'와 오피니언면(5개)의 비중을 크게 늘렸다. <가디언>의 인터넷 해외접속자는 전세계 200여 나라에서 한 달에 1천만 명이나 되고 그 중 40%가 미국인들이라고 한다. 영국에는 황색지 가운데서도 <데일리미러>처럼 반전에 앞장서는 신문이 있다.
그러나 정말 눈부신 담론활동을 펼치고 있는 곳은 필자가 보기에 단연코 <인디펜던트>이다. <인디펜던트>는 언론재벌 머독이 <더타임스>를 인수할 때 그 신문사를 떠난 기자들이 주축이 돼 출범한 신문으로, 제호 그대로 독립적이면서도 좌우에 치우치지 않는 논조를 보인다. 전쟁, 환경, 교육, 건강, 이주자 등의 문제를 끈질기게 이슈화함으로써 여론을 주도하는 신문으로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세계 대부분 언론이 대형 사건사고가 났을 때 관련기사를 쏟아붓고는 금방 잠잠해지는 것과 전혀 다르다.
자칫 독자들이 식상할 수 있는 주제들을 지속적으로 끌고 나가는 비결은 기발한 기사 아이디어와 참신한 편집, 그리고 선택과 집중에 있다. <인디펜던트>는 타블로이드로 판형을 바꾼 뒤 1면에 단 한 건만 기사를 배치해 시선을 집중시켜 왔다. 그것도 1면에는 사진이나 그래픽을 배경으로 제목만 달고, 기사는 2면부터 싣는 게 보통이다. 전쟁 관련 보도의 경우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갔을 때도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잘못 시작된 전쟁'의 실상을 파헤치고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상기시킨다. 필자가 모니터링한 결과를 토대로 주관적으로 선정한, 지난 반년 간의 '전쟁 주제 편집걸작 10편'(이 글 맨 앞에 소개된 9일자 포함)을 소개한다.
<인디펜던트>의 전쟁 테마 편집걸작 1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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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맨 앞에 소개한, '문제는 전쟁'이었음을 강조한 이달 9일자 편집에는 어쩌면 세계 어느 신문보다도 끈질기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반전 담론을 전파해 온 <인디펜던트>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이 신문의 반전 담론은 테러와 전쟁의 악순환이 종식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22일자에도 베이루트 발 특파원 기사를 톱으로 처리했다. 이라크뿐 아니라 레바논도 내전 상황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에서 철군론이 대두하고 있지만, 한번 시작된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담론이 사라진 나라의 일상적 징후들
<인디펜던트>의 활약상과 너무나 대조적인 게 한국 언론의 태도이다. 이라크전의 경우 3위 규모 파병국이면서도 '기이한 침묵'을 지켜 왔다. 정부는 '재건사업 참여'라는 파병 명분을 내세웠지만, 오히려 '파병국'이어서 기업활동이 제약되는 상황이 돼버렸다. 사막 한가운데서 대병력이 현지 민병대의 보호를 받는 우스꽝스런 장면이 계속되고 있다. <프레시안> 보도에 따르면, 미 국방부에서 '자이툰 부대의 아르빌 지역 주둔이 불필요하다'는 보고서까지 이미 석 달 전에 나왔다고 한다. 미국과 영국에서 철군론이 크게 일어난 뒤에야 비로소 우리 정치권과 언론에서 철군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는 우리 사회의 현안을 토론해야 하는 공론장이 얼마나 부실하고 왜곡돼 있는지를 상징한다.
그뿐이 아니다. '담론이 사라진 시대'의 일상적 징후가 우리 사회에 나타나고 있다. 사회복지체제 개편이나 양극화, 저출산, 비정규직 등의 문제는 잠깐 논의되다가 별다른 대책도 없이 "그런 이슈가 있었느냐"는 듯 조용해졌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전시 작전통제권, 북한 핵 등의 문제도 어느 것 하나 국민적 합의나 결말을 보지 못한 채 갈등요인으로 남아있다. '지구 온난화'나 '자원' 문제 같은 국제적 이슈를 빼고 당장 토론돼야 할 우리 사회의 이슈만 해도 산적해 있는데, 아예 쟁점으로 떠오르지 않거나 간혹 논전이 벌어지더라도 갈등만 증폭되는 현상이 계속되면서 민주주의가 형해화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에서 담론이 사라진 데는 시장 중심의 탈정치적 사회 분위기 탓도 있겠지만, 담론형성을 이끌어야 할 지식인들의 직무유기 또한 지적돼야 한다. 학자들의 논쟁 자체가 관념에 흘러 현실적합성이 떨어지거나, 지적인 편협성이 오히려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아 건전한 담론형성을 저해하는 측면이 있다. 이런 지적 풍토는 대중들로 하여금 담론은 '책상물림들의 말장난'이나 '골치 아픈 것', 또는 '팍팍한 일상생활과는 무관한 것'으로 느끼게 한다.
정치권의 책임 또한 가볍지 않다. 내년에 다시 대통령선거가 있지만, 정치권은 여론수렴과 정책형성 대신 이합집산에 몰두한다. 신당이든 리모델링이든, 지향하는 이념도 표방하는 정책도 없으니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다. 보수 야당은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기만 하면 정권이 절로 굴러들어온다고 생각하는지 비전과 정책대안 제시에는 관심이 없다. '골치 아프지만 시급한' 과제들은 외면한 채 벌써부터 지역표를 긁어 모으기 위한 개발공약을 내세우기에 바쁘다. 고속철도와 새만금사업 등에 이어 지난 대통령 선거 때는 신행정수도 건설계획이 '정책 커뮤니티'를 휩쓸어 버리더니, 이번에는 난데없이 운하건설계획이 등장했다.
서로 다투되, 승복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의사소통의 공간'
언론의 책임을 가장 무겁게 물어야 하리라. 우리 사회의 의사소통기관 또는 공론장의 임무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토론공화국'이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우리 사회에 과연 진지한 토론이 있는가? TV토론을 보더라도 선명성으로 무장하고 상대방의 도적적 흠결이나 말꼬리 잘 잡는 '싸움닭'이 단골 토론자로 섭외된다. 시청률에 목을 매기 때문이다. 공론장이란 정당성 확보를 위해 서로 다투되, 때로는 설득하고 때로는 승복하고 때로는 합의하고 때로는 거부하면서도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의사소통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규칙이 사라진 곳에 남는 것이라곤 토론자끼리 고함 지르고 얼굴 붉히는 일이다. 방청객도 시청자도 두 편으로 쫙 갈라지고, 이해관계는 더욱 충돌하게 된다.
신문들의 담론활동도 대개 일회성으로 그친다. 그리고 어렵게 접근한다. 거창한 주제를 흥미롭게 다루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9.11 5주년'과 같은 기사 주기가 돌아오면 독자들이야 읽건 말건 스테레오타입의 시리즈 한번 내보내는 것으로 임무를 다했다는 건가? 세계뉴스 게재 건수가 적은데다 이념적으로 신문마다 취사선택의 폭이 좁아 한국신문만 보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온전히 알 수 없다. 영어권 국민처럼 인터넷으로 타국 신문에 쉽게 들어가볼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대신 국내정치 기사의 비중은 대단히 높아 민생투어니 뭐니 하는 정치인들의 동정까지 시시콜콜 중계된다. 대선 후보에 대해 '허리가 26인치 반'이라는 둥 '훌라후프를 천 번 이상 돌린다'는 둥 하는 가십들이 '건강면'이 아니라 '정치면'의 주요 메뉴가 되고 있다. 그러니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마다 정책팀보다 이미지를 기획하는 홍보팀이 선거판을 주도한다. 선거를 통해 정책의 목표와 수단이 선택되지 못하니 집권 후에야 국민적 합의 과정을 거치게 되고 국론이 분열되면서 임기 동안 무엇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사태가 반복된다. 민주주의 정치의 위기다.
언론이 담론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이지 못하는 데 대해 나름대로 드는 이유가 있긴 하다. 언론학자들은 '냄비 저널리즘'을 비난하지만, 언론계에서는 '올드 뉴스(old news)'로 뉴스장사를 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항변한다. 그러나 <인디펜던트>는 '올드 뉴스'도 얼마든지 참신하게 재생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디펜던트>는 전쟁뿐 아니라 다른 많은 이슈들도 함께 끌고 나가면서 '신문위기의 시대'에 영향력이 커지고 부수가 늘어나는 이변을 연출하고 있다. 우리 신문업계 기준으로는 <인디펜던트>의 편집이 좀 가벼워 보일 수도 있지만, 선두에서 시대적 이슈를 끌고 나간다는 점에서 이 신문이 세계 언론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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