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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진 노현정'을 우리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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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진 노현정'을 우리도 볼 수 있을까?

[이봉수의 미디어 동서횡단] 미녀 앵커와 할머니 앵커

미디어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인 동시에 시야를 가리는 '커튼'일 수 있습니다. 언론사의 이념적 성향과 언론인의 자율성 정도, 정치∙경제∙사회적 언론환경 등 수많은 요인에 따라 뉴스의 취사선택과 해석이 달라지고, 때로는 심각하게 왜곡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론사별로 뉴스 제작의 내막을 들여다보고 같은 주제를 다룬 내용물끼리 나란히 비교해보는 일은, 창문에 드리워진 양쪽 커튼을 똑같이 걷어 올렸을 때 들어오는 반듯한 풍경처럼 세상사에 대한 균형감각을 찾아줄 것입니다.

<프레시안>은 독자들이 이런 뉴스감각과 국제적인 시야를 확보할 수 있도록 영국에 체류하고 있는 칼럼니스트 이봉수 박사(언론학)에게 동서양의 수많은 매체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시청하고 인터뷰하고 재해석하는 일을 부탁했습니다. 이 글의 필자 이 박사는 <조선일보>에 입사했다가 <한겨레> 창간에 참여했고, 차장대우 논설위원 때 <한겨레> 대표필진의 일원으로 선발돼 '이봉수의 역사와 만나는 경제' '이봉수의 이야기 경제' 등 고정칼럼을 썼습니다.


그는 <한겨레> 경제부장 직을 사임한 40대 후반에 영국 케임브리지대로 자비연수를 떠났고,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미디어와 경제변동'을 주제로 논문을 써 올해 3월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전공인 경제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지난 1년 간 <한겨레>에 '경제전망대'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봉수 박사가 다양한 언론현장 경험과 연구 경력을 바탕으로 대략 격주로 집필할 <프레시안>의 새 기획연재물 '이봉수의 미디어 동서횡단'이 독자 여러분의 뉴스 이해에 도움이 되길 기대합니다. <편집자>


BBC 할머니 앵커의 고별 방송

지난달 27일 'BBC 1시 뉴스'의 마지막 아이템은 한 할머니가 젊어서부터 은퇴할 때까지 일해 온 모습들을 파노라마로 엮은 것이었다. 27년 간 BBC에서 뉴스 진행을 맡아 온 안나 포드(62) 자신이 시청자들에게 작별을 고한 것이다. 영국에서 점심시간이 시작되는 오후 1시, 일손을 멈추고 TV를 켜면 언제나 이웃집 할머니처럼 살며시 나타나 세상사를 전해주던 그 모습은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것이다.
▲ 영국 <가디언> 지는 뉴스와 함께 살아 온 안나 포드의 연륜을 주름살로 표현하려는 듯 지난달 28일자 1면에 대문짝만한 얼굴 사진을 실었다. ⓒtheguardian

눈가의 잔주름이 얼핏 인자해 보이지만, '아니다' 싶으면 거리낌없이 치받는 팔팔한 성깔도 있었다. 남성 위주 전문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호신책'이었을까? 1980년대 초 자신의 해고를 배후조종한 한 보수정객의 얼굴에 포도주를 끼얹는가 하면, 한때 동료였던 남성 앵커 마이클 뷰어크에게 "가엾은 늙은 박쥐"라는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뷰어크는, 근래에 여성이 방송계 요직을 많이 차지한 것과 관련해 "여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남자는 단지 정자 제공자"라는 '과격발언'을 했다가 다음날 역공을 당한 거였다. 여성 앵커로서 나이에 주눅들기는커녕 "대중은 캐릭터를 가진, 얼굴에 주름을 가진, 인생경험을 가진 사람을 원한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시청자들이) 화면에서 보는 사람들은 화면 바깥 사람들과 딴판이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한국으로 채널을 돌리면 누구나 목격하다시피 전혀 딴판이다. 여성 뉴스 진행자들은 젊은 미녀 일색이다. 방송사 여성 아나운서 소개 사이트에 들어가면, 미스코리아 뺨치는 미녀들을 많이도 뽑아놨다. 후배들에게 어느새 앵커 자리를 물려주고 잊혀진 베테랑들도 거기 있다. KBS 이규원 아나운서 등의 '방송사 성차별 관행 조사'에서도 밝혀졌듯이, 오죽하면 "계속해서 충원되는 더 젊고 더 예쁜 여자 후배들에게 밀려나지 않기 위해 주름과의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아나운서의 고백이 나왔을까?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게 본인들의 죄는 아니지만, 미모가 받쳐주지 못하는 지성인들이 입사시험에서 모조리 떨어졌을 것을 생각하면 방송사의 죄상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아니 미모를 타고나지 못한 여성들은 아무리 지성적이고 목소리가 낭랑할지라도, 아예 입사를 포기하거나 거금을 들고 성형외과를 찾도록 만드는 게 한국의 아나운서∙탤런트 입사시험이다. 포털 사이트에 뜬 유명인의 어릴 적 사진을 비교해보면서 '나도 손대면 안될 것 없다'는 식의 외모지상주의에 감염된다. 한국의 성형 붐은 세계적으로도 유별나 얼마 전에는 BBC가 특집으로 보도했다. 바야흐로 '한국 여성의 규격화'가 진행되고 있는 건가?

여성의 외모를 상품화하면서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기는 주범으로 방송을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MBC도 얼마 전에 뉴스데스크 여성 앵커를 박혜진으로 바꿨지만, 젊은 여성의 외모를 시청률 경쟁의 주요 수단으로 삼아 온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시청률이 좀 올라간 것으로 집계되자, 다른 요인은 거의 무시한 채 '박혜진 효과'로 언론에 보도된다. YTN STAR는 지난 1일 '미녀 아나운서들의 방송국 안과 밖'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뜬 내용을 방송으로 내보냈다. 손문선 앵커는 자신의 사진도 떠있는 것을 가리키며 "여러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맨 얼굴 때문에 안 되나"라며 화장거울을 꺼내 드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기회균등, 선언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영국 방송에는 미녀 앵커가 오히려 드물다. 그것이 이상해 BBC의 중견 언론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의 미디어학과 박사과정에 파트타임으로 다니던 동료였다.

"BBC는 여자 뉴스캐스터 뽑을 때 인물은 좀 안 보냐?"
"인물 보고 뽑으면 미인대회지. BBC 사장의 목이 달아날 일이다."

나이∙성∙인종∙종교는 물론이고 미추의 차별까지 배제하려는 영국 방송의 전통은 절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대처 총리 집권 무렵부터 영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미치광이 좌파(Loony Lefts)' 소리를 들어가며 실질적 기회균등을 위한 이슈들을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기회균등의 추상적 실행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구호 아래, 정부기관부터 소수인종과 여성의 채용을 늘리고, 그들이 승진경쟁을 할 때도 기회균등이 이루어지도록 철저히 '모니터링' 할 것을 촉구했다.

1980년대 '미치광이 좌파' 출신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 중에 현 런던시장 켄 리빙스턴과 전 BBC 사장 그렉 다이크가 있다. 다이크는 사장으로 취임한 뒤 BBC가 '백인 천하'라며 소수인종 등에 대한 채용목표제를 도입했다. 소수자의 목소리는 그들 자신이 가장 잘 대변한다는 취지에서였다. 방송이야말로 그런 차별을 없애나가는 데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했다. 이제 영국에서는 프리미어 리그 풋볼클럽과 같은 수많은 민간기업들까지 그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박지성과 이영표가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게 된 데는 그들의 상업적 목적 외에도 그런 제도적 뒷받침이 있었던 것이다. '진보성향'이라는 정연주 씨가 KBS, 최문순 씨가 MBC의 사장이 됐을 때, 다이크를 본받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는데…, 꿈 깨야 하나?

상업방송이 판치는 미국에서도 미모의 젊은 여성을 뉴스방송 또는 토크쇼의 간판으로 상품화하는 일은 드물다. 73세에 ABC 방송을 떠난 바버라 월터스는 스스로 "미인이 아니어서 내가 카메라 앞에 설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저녁뉴스 공동진행자인 해리 리스너에게 따돌림을 받은 적도 있었으나, 배우 존 웨인으로부터 '그 자식에게 지지 마라'는 격려편지를 받기도 했다. 지난달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CBS 저녁뉴스 단독 앵커로 발탁된 케이티 커릭(49) 역시 아리따운 외모는 아니다.

건강해 보여 방송진행도 안정된 듯한 이금희 아나운서에게 네티즌들이 언어폭력을 가한 것은 너무나 한국적인 현상이다. <더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스페인에서는 너무 날씬한 마네킹까지 정부가 규제할 방침이라고 한다. 호리호리한 마네킹이 마른 몸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 결과적으로 여성들이 무리한 다이어트에 집착해 건강을 해친다는 이유에서다. 임신과 비만을 동일시하는 건지, 김주하 아나운서처럼 여성 앵커들은 임신만 했다 하면 일찌감치 방송에서 빼버린다. 그러고도 방송들이 '저출산 문제'를 떠드나?

얼굴 쪼글쪼글한 것은 한 인생의 '훈장'이다

BBC 아침 뉴스 쇼(BBC Breakfast) 진행자인 미섈 후세인은 지금 만삭인데도 방송을 계속한다. 시청자들은 그녀가 몇 년 전에도 출산휴가 때까지 방송을 진행했던 걸 기억한다. 같은 시간대 경쟁사 뉴스 쇼 여성 진행자들도, 한국적 인선 기준으로 보면 한쪽은 너무 못생겼고, 다른 한쪽은 너무 뚱뚱하다. 소수인종 출신 앵커도 많아, 앞서 말한 후세인은 파키스탄계이고, BBC 정오뉴스와 ITV 10시 메인 뉴스는 흑인이 진행한다. 유럽의 TV 드라마들도 배역 선정에서 개성과 함께 평범함을 고려하기에 주연들까지 대개 미남미녀가 아니라 그냥 선남선녀들이다.

한국에도 그런 앵커∙아나운서∙탤런트들이 TV 화면을 지배할 날을 상상해본다. 좀 넉넉하고 평범하게 생긴 아나운서들, 하나같이 쌍꺼풀에 콧날 선 개성 없는 얼굴보다는 눈가의 잔주름이 경력을 말해주는 앵커들…. 거기에 혼혈인도, 장애인도 몇 명 끼었으면 좋겠다. 노현정, 정세진, 최윤영, 박혜진, 김소원처럼 지금 인기 있는 앵커들도 현업에 오래 남아 때로는 임신한 모습 그대로, 종내에는 주름진 얼굴 그대로 방송에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얼굴 쪼글쪼글한 것은 한 인생의 '훈장'이지 흉칙한 '낙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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