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영국에 망명해 한 달 전 시민권을 획득한 전직 KGB 요원이 의문의 독극물에 중독돼 숨진 사건이 영국과 러시아의 외교갈등으로 비화되고 있다.
영국의 <BBC> 방송에 따르면 알렉산더 리트비넨코(43)가 23일 저녁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 병원에서 숨졌다. 리트비넨코는 지난 1일 전직 KGB 요원, 이탈리아 보안당국 관계자 등과 잇따라 만난 뒤 자택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고, 지난 17일 이후 상태가 급격히 악화돼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숨졌다.
이 사건에 대해 영국에서는 런던 경시청에 이어 영국 방첩기관인 MI5가 조사에 나섰다. 병원의 정밀진단에서도 확인되지 않는 물질에 중독된 것으로 나타나고, 이같은 정교한 독극물 살해 수법은 러시아 정보당국이 직접 개입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과거 KGB에서 배반자를 살해하는 데 주로 쓰인 탈륨이 이번에 쓰인 독극물이라는 등 병원 관계자들을 인용한 보도에 대해서는 병원 중환자실 책임자와 화학전문가 모두 전면 부정했다.
그러나 '크렘린 사주설'은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리트비넨코는 KGB 후신 러시아연방정보국(FSB)에 현역 대령으로 재직 중이던 지난 2000년 러시아의 재벌로 푸틴 정권에 반대하던 보리스 베레조프스키(2001년 영국으로 망명)를 암살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이 사실을 폭로한 직후 영국으로 망명했다.
2002년에는 <러시아 폭파하기: 자작 테러>란 책을 집필, "수백명이 사상 당한 99년 모스크바 아파트 폭발 테러 사건은 FSB가 꾸민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을 빌미로 러시아는 제2차 체젠 전쟁을 일으켰으며, 당시 총리였던 푸틴이 권력을 장악하며 대통령으로 올라서는 발판이 되었다는 것이다.
최근에도 리트비넨코는 러시아 <노바야 가제타>의 탐사전문 여기자인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의 피살 배후를 추적해 왔다.
폴리트코프스카야는 러시아의 체첸 주민 인권탄압 실태를 폭로한 일련의 기사로 크렘린의 미움을 사 왔으며, 결국 지난 10월7일 모스크바 아파트에서 살해됐다.
리트비넨코는 그 이후 폴리트코프스카야 살해에 크렘린이 개입됐다는 심증을 갖고, 증거를 수집해 왔다. 지난 1일 그는 폴리트코프스카야 살해 배후로 여겨지는 러시아연방정보국(FSB) 간부 4명에 대한 문서를 이탈리아인으로부터 건네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리트비넨코의 이런 전력으로 볼 때 크렘린이 폴리트코프스카야에 이어 그도 살해하기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러시아측은 "1959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지도자 스테판 반데르 제거 이후 그러한 작전은 하지 않는다"며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다.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을 벌이던 반데르는 KGB에 의해 청산칼리가 든 캡슐로 독살됐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영국으로 망명한 전 KGB 런던 분실장 올레그 고르디에프스키는 "러시아비밀조직이 살해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리트비넨코는 KGB 비밀 실험실에서 개발한 매우 정교한 독극물에 의해 살해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비밀조직은 정말 사악하다"면서 "푸틴이야말로 국제테러리스트"라고 맹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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