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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도난마 한미FTA…"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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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도난마 한미FTA…"희망은 있다"

[화제의 책] 홍기빈의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

국제정치경제 칼럼니스트인 홍기빈 씨가 지난달 '투자자-국가 소송제의 정치경제학'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에 연재했던 글들이 한 권의 완결된 책으로 묶여 나왔다. 바로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홍기빈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 2006)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 비서관이 보내왔다. 정태인 전 비서관은 "이 책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와 '투자자-국가 소송제'와 관련해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난마(亂麻)를 단숨에 베어버린 쾌도(快刀)와도 같았다"면서 이런 '쾌도'가 하나둘 모이면 '한미 FTA'라는 사상 초유의 위기를 앞에 둔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고 역설했다. <편집자>


지리멸렬의 늪

일반적으로 한 개인의 무능과 게으름은 죄가 아니다. 그 때문에 비롯된 나쁜 결과를 스스로 달게 받아들일 각오만 돼 있다면 그 무엇이 문제가 되랴. 그러나 사회적으로, 특히 어떤 결정적인 국면에서는 개인의 무능과 게으름이 죄가 될 수도 있다.

지난봄과 초여름에 나는 이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첫 번째 고통은 법에 대한 철저한 무지로부터 왔다. 법은 기껏 해봐야 경제의 반영일 뿐이고 개인적으로도 법을 가까이 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각은 작년에 여지없이 깨졌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 법률 공부를 영어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 때문이었다. 당시의 내 판단으로는 이 제도는 한 나라의 주권과 민주주의에 관한 어마어마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단 세 명의 (외국)법률가들로 하여금 단 한 번에, 그것도 비밀로 국가의 정책에 대한 최종심판을 하게 한다니 이는 장차 국민경제,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의 사활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악의 씨앗'과도 같았다. 더구나 정부가 스스로 한미 FTA에 '투자자-국가 소송제' 관련 조항을 넣어버린 것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이는 한미 FTA를 둘러싼 공방에서는 승패의 갈림길이 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무지를 단숨에 극복할만한 명석함도, 초미시(超微視)의 경지에 있는 법률가들의 의견 하나하나를 꿰어낼 부지런함도 내게는 없었다. 정부에 포진하고 있는 한미 FTA 찬성파가 절대로 부인 못할 몇 가지의 사실과 논리를 얽어 글이나 몇 편 쓰는 게 고작이었다.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참으로 한심했지만 나 역시 급박한 대중강연을 핑계로 차일피일 맞대응을 미뤘으니 결국 우리 모두가 정부가 원하는 대로 지리멸렬의 늪에 빠져 버린 것이다. 국민들의 사고는 '투자자-국가 소송제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찬반 양쪽이 다 자기주장만 하는 것 같고 다른 나라도 다 한다는데 뭘…'이라고 생각하기 딱 좋을만한 지점에서 멈춰버렸다.

快刀亂麻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

이런 지리멸렬한 상황에서 출간된 책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홍기빈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 2006)는 내 머리 속의 온갖 '난마(亂麻)'를 단숨에 베어버린 '쾌도(快刀)'와도 같았다.
▲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홍기빈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 2006). ⓒ프레시안

첫 번째 난마. 개별기업의 사적 중재가 어떻게 국가의 주권을 위협하기에 이르렀을까. 이는 내가 '구글'에서 관련 글들을 검색해 닥치는 대로 읽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문제였다. 미국 판사들마저 나프타(NAFTA, 북미자유무역협정) 11장의 '투자자-국가 소송제'가 사법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고발하는 지경이니, 나로서는 '잘 정리된 논리의 그물망'이어야 할 사법체계가 어찌 그리도 엉성한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답은 '역사'에 있었다. 이 제도의 기원이 상인법에 있다는 이 책의 설명이 내 머릿속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저자인 홍기빈은 상인법으로부터 유래한 사적중재가 국제법적 효력을 갖게 된 과정을 역사의 촘촘한 그물망을 통해 상세히 그려낸 후 이제 상인법과 국제공법이 갈등의 관계에 놓이게 됐다는 점을 지적한다. 초국적기업이 더 이상 국가에 굽실대는 상인이 아니라 웬만한 국가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됐으니 '사적 중재'가 '공적 법체계'를 위협할 수밖에. 즉,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는 '세계화', 홍기빈의 표현에 따르면 '전지구화'의 물결 속에서 초국적기업의 권리를 '과잉대표'한다.

우리 정부는 이 제도가 '글로벌 스탠더드'여서 일직선으로 관통될 역사의 필연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역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적어도 세계정부와 이것에 조응하는 단일한 법체계가 확립되지 않는 한 이런 제도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이 제도를 먼저 진지하게 받아들인, 정부의 수사대로라면 '선점'한 나라는 온갖 갈등의 실험대가 될 뿐이며 그 혼란은 직접적인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최고배상액이 35조 원 정도 되면 그런 액수의 배상금을 감당하느라 휘청거리지 않을 나라가 몇이나 되겠는가.



두 번째 난마. 1965년부터 시작된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의 국제중재와 나프타식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의 차이는 무엇인가. 정부는 현재 이 두 가지 제도를 동일시하고 있지만 이 둘은 엄연히 다르다. 일반적인 국제중재는 국가가 하나하나의 분쟁 사안에 대해 이 사안을 중재 절차를 통해 해결한다는 동의를 해야 시작되지만, 나프타식 투자자-국가 소송제는 국가의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기업의 제소만으로도 분쟁의 대상이 되는 사안들이 일괄 자동적으로 중재 절차에 놓이게 된다. 한미 FTA에 투자자-국가 소송제를 도입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나프타식의 국제중재 앞에 우리나라를 가져다 놓겠다고 사전적으로 동의하는 것과 다름 없다.

세 번째 난마. 투자자-국가 소송제가 이런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는 하지만 호주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분쟁 처리 절차만 놓고 볼 때 유럽연합(EU)형 FTA와 미국형 FTA가 확연히 구분된다고 하지만 EU도 양자 간 투자협정(BIT)을 맺을 때는 이와 유사한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이에 대한 답은 두 개다. 첫째는 한마디로 이 나라들이 잘 몰랐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제도를 나프타 협정문에 넣은 미국정부와 미국기업들조차도 처음에는 이 제도의 위력을 잘 몰랐다. 국가를 대상으로 소송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그 나라의 재판 관할권을 벗어나서 그런 소송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한 국가의 거의 모든 공공정책을 문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이다.

초국적기업들은 이 조항의 위력을 점차 '발견'해 나간다. 외국에서 사업이 잘 될 때야 이런 제도의 필요를 느끼지 않겠지만 뭔가 잘 안 돼서 사업 철수를 할 때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라도 이 제도를 검토해 보지 않겠는가? 망한 기업치고 정부에 불만이 없는 기업이 어디 하나라도 있으랴.

문제는 이 제도가 어차피 초국적기업들의 요구로 관철된 것이니 웬만한 나라의 기업들은 이 제도를 이용해 다른 국가를 제소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반면 강한 나라의 기업들은 이런 힘의 불균형을 한껏 누릴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약한 나라들은 왜 이런 불평등한 조항을 받아들이는 것일까? 두 번째 답이 여기에 있다. 바로 외자유치 경쟁 때문이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 몸을 담근 나라는, 과거의 주기적인 국내위기가 외환위기로 전환되면서, 필연적으로 주기적인 외환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런 위기 때 급전을 조달하기 위해서라도 더 높은 수준의 시장개방과 규제완화를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발도상국들의 새로운 발전 전략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외자유치에 의한 발전(FDI-led development) 전략'이다. 이 전략에 따르면 외국자본과 외국기술의 지속적인 유입이 발전의 전제가 된다. 개도국이 일단 이 길에 들어서면 기술이전이나 내국인 고용 의무 등 자본에 '의무이행'을 부과하기는 고사하고 독자적인 산업정책을 펴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 되는데 외자는 이런 상황에서 '아편'과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개도국 정부는 외자를 유치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투자자-국가 소송제와 같은 제도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 정부처럼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경우가 더 많았을 것이다.

네 번째 난마. 설마 아무 공공정책에나 다 소송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 나프타식의 투자자-국가 소송제를 도입한다면 답은 '그렇다'이다. 정부는 그런 무지막지한 제도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항변하지만 홍기빈이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 5장에서 제시한 몇 개의 사례들을 보라. 특히 미국 텍사스 농부와 멕시코 정부의 '물꼬싸움'은 이 제도의 적용 대상이 일반인의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사례에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초국적기업이나 외국인투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미국기업이 한국의 어느 분야에 대한 투자를 계획하는 순간 이 분야와 관련된 한국의 모든 공공정책이 이 기업의 소송대상이 된다고 보면 된다. 이와 관련해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이미 우리 사회 내부에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하려는 강력한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가령 재정경제부가 물을 민영화하려는 순간에 미국기업이 이에 흥미를 느낀다면 바로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물 관련 정책은 모두 직접적인 소송 대상이 될 것이다.

1997년 말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가 발발한 후 지난 10여 년의 역사는 이런 생각이 기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제 정부는 민영화와 규제완화라는 자기 내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미 FTA를 이용하게 될 것이다. 이는 마치 기업주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컨설팅회사를 이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부가 한미 FTA를 '외부쇼크에 의한 내부 개혁'이라고 공공연하게 규정하는 것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우리 정부가 서비스·투자 분야의 어떤 특정 분야를 유보, 심지어 미래유보(미래에 개방 철회 가능)로 설정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우리 정부가 나중에 이 분야를 일방적으로 개방하면 그 다음에는 이 분야가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의 적용을 받게 되는 것이다.

대안을 향해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는 잠깐 뒤적이며 몇 가지 중요한 점을 골라내 부각하는 것으로 그칠 수 없는 많은 미덕을 가지고 있다. 저자인 홍기빈이 스스로 '지구정치경제학'이라고 이름 붙인 사고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그렇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읽기 쉬운 글을 쓴다는 점이 그렇다.

저자가 책 말미에서 강조하듯 문제는 대안이다. 또 다른 세계화, 즉 87년 이후에 새로운 국민경제 체제란 가능한가? 정부의 결론대로 또 다른 세계가 불가능하다면 정부와 다른 많은 지식인들이 주장하듯 '이왕 맞을 매 빨리 맞는 게 나은 것' 아닌가?

과연 미국이 주도하는 금융세계화와 노동유연성의 세계는 유지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동아시아의 지역화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동북아 시대'라는 구상을 내세웠다 이제는 완전히 포기해버린 정부는 이런 동아시아의 지역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런 대외적 여건과 조화를 이루면서 양극화를 극복하는 동시에 일정 수준의 경제성장을 유지하는 사회경제 체제는 가능한 것인가? 가능하다! 무능한 데에다 게으르기까지 한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현재의 세계화는 미국의 위기를 계기로 파탄을 맞을 것이라고 본다. 세계는 EU, 아시아, 아메리카라는 삼정(三鼎)의 지역화의 경로를 거칠 것이며, 아시아는 공동체적 사회 시스템 속에서 과거의 산업정책을 클러스터의 형태로 재현하는 체제를 구현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미국화라는 우회로는 쓸데없는 데에다 치명적이기까지 한 역사의 낭비다.)

위기가 인재도 낳는 것일까? 최근에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책들은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마지막 사실까지 꼼꼼히 정리하는 부지런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빠진 사람들에 대한 결례를 무릅쓰고 요즘 특히 도드라지는 사람들을 열거해보자면, 이 책의 저자인 홍기빈 외에도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의 우석훈, <한미 FTA의 마지노선>의 송기호, 그리고 프레시안에 일련의 글을 연재한 김태억 등이 있다.

이들의 상상력과 구체적인 대안들이 결합하고 그 결합물이 한미 FTA 저지 운동을 통해 국민의 동의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희망을 갖게 될 것이다.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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