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가에서는 지난 4월 개봉했지만 한국전쟁 60주년을 계기로 재개봉한 <작은 연못>과 포항여중 학도병 71명을 다룬 <포화 속으로>가 관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 한편 안방극장에서는 70년대 동명의 드라마를 각색한 <전우>(KBS)와 초호화 캐스팅, 100% 사전제작으로 기대를 모았던 <로드넘버원>(MBC)이 각각 주말극, 수목극 시장에서 시청률 고지를 노리고 있다.
한국전쟁물, 시대적 시험대 올라
온 국민이 월드컵 열기에 쏠려있었던 6월, 갑자기 전쟁이라는 무거운 소재가 대중매체에 포진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케팅적 측면으로는 올해가 한국전쟁 60주년이고 그 중에서도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을 맞았으니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6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한국전쟁을 보는 관점을 달리 하거나 소재를 다양화할 수 있게 됐다는 현실을 빼놓을 수 없다. 전쟁은 스펙터클과 인간애 등의 흥행적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고 유행도 비교적 타지 않는 소재이지만 분단된 현실 속에서 '끝나지 않은 전쟁'인 한국전쟁은 첨예한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서 '핫 콘텐츠'로 부상하지 못했다.
1970년대까지 스크린에서 한국전쟁이나 분단의 현실은 <두고 온 산하>, <나는 고발한다>, <그림자> 등 반공 이데올로기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김대중 정권의 등장과 6.15 공동선언과 같은 정치적 배경이 있은 1990년대 말부터는 <공동경비구역 JSA>,<웰컴 투 동막골>, 다큐멘터리 <송환>,<선택>에 이어 최근의 <의형제>까지 다양한 관점의 영화들이 나왔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도 여전히 첨예한 한국전쟁을 직접 다루기보다 분단 이후의 상황이나 판타지의 세계로 우회했다.
▲ <웰컴 투 동막골> |
이런 점에서 최근 한국전쟁 영화가 1950~53년의 전시 상황을 그리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 볼만하다. 한국전쟁이라는 강력한 소재가 장르적 다양성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분위기에, '60주년'이라는 기념의 시기를 맞아 터져 나온 것.
이렇게 한국전쟁 그 자체를 그린 영화들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넘어설 수 있는지에 대한 시대적 시험대에 올랐다. 2010년의 관객들은 한때 적대적 남북관계의 종식을 경험했음은 물론이거니와 단순한 선악구도에도 고개를 내젓는다. 영화·드라마 창작자들은 이렇게 달라진 관객 덕에 한국전쟁을 입체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됐지만 그만큼 더 고민은 깊어지게 됐다.
■ 전쟁민간인, 영웅인가 희생자인가 <포화 속으로>와 <작은 연못>
노근리 학살 사건을 소재로 한 <작은 연못>과 포항여중을 지킨 학도병들을 소재로 한 <포화 속으로>는 지금까지 주목 받았던 전쟁 지휘자들이 아닌 민간인들을 다뤘다. 두 영화는 모두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 그만큼 전쟁의 진짜 참상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파괴하고 총탄 앞으로 내몬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영화의 차이점도 이 공통점에서 나온다.
1950년 8월 포항여중 전투에 참가한 학도의용군 71명의 실화를 다룬 <포화 속으로>는 '영웅 만들기'에 주력한다. 포항을 지키던 강석대(김승우)의 부대는 낙동강으로 집결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따라 장범(T.O.P.)을 중대장으로 한 71명의 학도병들만을 남기고 떠난다. 전투에 나가본 경험이 있는 것은 단 3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총 한 번 제대로 쥐어 본 적이 없다.
이들은 불침번을 서며 엄마가 끓여줬던 김치찌개를 떠올리고 점호시간을 한참 지나서까지 소대별 장기자랑에 몰두할 정도로 평범한 소년들이다. 이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중대장 장범이 가장 어른스러워 보이지만, 그 역시 매일 밤 어머니를 떠올리며 '우리는 왜 싸워야 할까요'를 되뇌는 심약한 소년이다.
▲ <포화 속으로> |
<포화 속으로>에서 인공기는 여전히 전형적인 악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주인공 장범이 실수로 벌어진 교전에서 죽어가며 '오마니'를 부르는 인민군을 앞두고 크게 동요하는 장면에 이르면 영화를 반공으로 몰아붙이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반공을 비켜가는 장치를 활용하면서도 영화는 어느 순간 소년병들을 입체적으로 다루기를 멈춘다. 전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북한군 진격대장 박무랑(차승원)이 이끄는 인민군 유격대가 학교를 덮치면서 영화는 과감하게 등장인물들의 소년성을 버리고, 대신 그들의 영웅성을 극대화시킨다. 두려움에 탈영을 선택한 학도병도 있다는 말이 대사로 등장하지만 화면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기꺼이 국가의 부름에 응한다.
영화는 후반부 들어 그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를 직접 지시한다. 혈서로 '포화 속으로'라고 쓴 태극기를 머리에 두른 학도병들이 "학도병은, 군인이다!"를 외치는 장면에서다. 이어지는 전투 장면에서 카메라는 클로즈업과 포커스 아웃 등의 화려한 기법을 사용해 소년들의 장렬한 산화를 비추고, 음악도 비장미를 고취시킨다.
그러나 영화는 한국전쟁이라는 복잡한 텍스트 속에서 그들이 왜 삶과 산화의 갈등 속에 영웅이 되어야 했는지를 잡아내지 못한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이 영화에 대한 리뷰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거시적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포항 전투라는 세밀화에 주력한다"며 이 작품이 반공 이데올로기에 토대한 것은 아니지만 학도병들이 왜 조국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쳤는지를 설득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 <포화 속으로> |
<작은 연못>은 최근까지 한국전쟁 서사에 포섭되지 않았던 변방의 희생자들을 다뤘다. 적을 향해 총을 겨눈 적도 없는데 아군으로부터 총알 세례를 당해야 했던 '노근리 학살 사건'의 주인공들이다.
1950년 7월, 한반도 허리쯤 산골짜기 '대문바위골'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른 채 동요대회에 열을 올리던 짱이와 짱이 친구, 가족들은 어느 날 마을에서 떠나라는 지시를 받고 피난길에 오른다. 미군이 패하면서 전선은 읍내까지 내려온 상황이지만 평화롭고 한적한 마을에는 아직 "무신 상황이여" "미군이 도락꾸(트럭) 보내준대"라는 말만 떠돌 뿐이다.
그러나 피난길에서 주민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줄 것이라 믿었던 미군의 총구가 그들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민들 수백 명은 이유도 모른 채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폭탄과 병사들의 난사에 쓰러진다. 그리고 단 몇 명만이 살아남는다.
이것이 영화 내용의 전부다. 등장인물들은 총을 쥐어보기는커녕 '찍 소리' 한 번 못 내보고 죽을 뿐이다. 영웅이나 비장미, 스펙터클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영화는 재미나 감동 면에서 여느 전쟁 관련 영화만큼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 <작은 연못> |
영화를 연출한 이상우 감독이 연극인 출신인 만큼 화면이나 배우들의 움직임이 다소 연극적이긴 하지만 내러티브 자체는 차라리 한 장의 보도사진에 가까울 정도로 사실적이다. 감독은 연출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에 대해 "'거짓말하지 말자'였다"고 답했다.
그렇다보니 영화는 투자 받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고, 2006년 이 영화의 제작만을 위한 특수목적회사(SPC) '노근리 프러덕션'이 설립된 이후 뜻 있는 스태프·배우들이 모인 뒤에야 촬영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요즘 극장가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비상업적' 영화지만, <작은 연못>은 한국전쟁 다시보기라는 문제에 있어선 상당한 역할을 해냈다.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들은 그동안 가려진 역사를 복원하는데 야박했고, 희생자를 희생자로 다루지 못하면서 스펙터클과 미화에 열중했다. <작은 연못>은 희생자의 관점에서 전쟁 다루기에 본격적으로 도전한 영화다. 완성도에서 아쉽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전쟁서사를 다루는데 대한 고민과 철학이 드러난다는 평가다.
학도병들은 총을 맨 채 포화 속으로 '뛰어들었고', 노근리 마을 주민들은 작은 연못에 '갇혀 있었으니' 전자는 영웅으로, 후자는 희생자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명확하다. 또 <포화 속으로>의 높은 흥행성적(지난달 27일 기준 185만 명) 역시 아직 우리에겐 영웅 이야기가 훨씬 더 익숙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과도한 할리우드식 영웅주의의 침투로 한국전쟁의 질곡을 보여주는데 한계를 드러낸 <포화 속으로>의 전례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는 전쟁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존중이 필요할 듯하다. 앞으로 개봉을 앞둔 장훈 감독의 <고지전>, 김익로 감독의 <서부전선 이상없다>, 곽경택 감독의 <아름다운 우리>(가제), 백운학 감독의 <연평해전> 등 한국전쟁을 직·간접적으로 다룰 영화들에 요구되는 과제다.
▲ <작은 연못> |
■ 드라마, 스펙터클과 휴머니즘에 도전한다 <전우>와 <로드넘버원>
한편 KBS와 MBC의 안방극장도 1950년 6월로 돌아갔다. 첫 회의 뚜껑을 연 KBS <전우>와 MBC <로드넘버원>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스펙터클'이었다.
지난달 19일 방영을 시작한 <전우>는 첫 회 초반 20분을 전투신으로 채웠다. 할리우드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의식한 것이 분명한 강렬한 화면으로 시청자들의 눈을 잡았다. 촬영엔 <추노>에서 쓰인 레드원 카메라가 쓰였다.
평양 시가지를 전투기로 폭격하는 장면은 세트나 폭격, 컴퓨터 그래픽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방송 후 시청자 게시판에는 '극장에서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이다'는 의견이 줄을 이었다. 화면은 회당 4억 원에 이르는 제작비로 뽑아냈다.
<로드넘버원> 역시 총 130억 원을 들여 사전 제작돼 가히 블록버스터라 할 만하다. 이 드라마도 초반부터 주인공 장우(소지섭)의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장면이나 북한군 기갑부대 기습 장면 등 액션신을 배치해 장대한 스케일을 과시하고 있다.
▲ <전우> |
<전우>는 1975년의 원작이 반공주의에 입각해 전쟁을 그렸다는 혐의와 최근의 KBS와 임원진에 대한 선입견의 화학작용으로 방영 전부터 의심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자 노골적인 반공 이데올로기 색채는 찾아볼 수 없었다는 평가가 대세다. 길환영 KBS 콘텐츠본부장도 "기존 전우가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했다면 이번 전우는 휴머니즘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1회에 등장한 노인은 두 아들이 학도병과 징용으로 죽었다면서 한 손엔 태극기를, 한 손엔 인공기를 든 채 진군하는 국군을 맞았다. 4회에는 전쟁의 공포로 탈영 후 인민군이 된 천성일(정태우)이 한 때 전우였던 국군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이 나왔다. 그 국군은 성일에게 "아프다. 제발 죽여달라"고 애원했고, 성일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사살을 하고 괴로워했다. 실제 전쟁터엔 이념이 아닌 사람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로드넘버원>에서도 이념 문제나 전쟁이 일어난 이유 등 거대담론은 사소하게 다뤄진다. 1회에서 여주인공 수연(김하늘)은 왜 남로당원이 됐냐고 묻는 태호(윤계상)에게 "처음에는 독서모임인 줄 알았다"고 대답했으며 3회에는 주인공 장우가 '총알받이 소대장'은 되기 싫다며 지휘관의 소대장 임명을 거부한다. 장우는 명령을 마지못해 받아들인 뒤에도 "살아야 명예도 있는 것"이라고 냉소하고, 드라마는 이 인물이 전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유는 오직 수연의 안위를 위해서라는 점을 강조한다.
▲ <로드넘버원> |
한마디로 두 드라마는 이념 문제나 거대담론은 조심스럽게 비켜 가면서 스펙터클과 휴머니즘, 사랑이라는 대중적 코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는 할리우드 전쟁물의 공식이기도 하다. <전우>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냄새가, <로드넘버원>은 <진주만>의 냄새가 강하다.
그러나 그만큼 한국전쟁의 특수성을 잘 담아내고 있는가는 더 지켜봐야한다는 것이 시청자들의 지적이다. 한국전쟁이 정확히 어떤 비극인지에 대한 고찰 없이 보여주는 액션과 사랑은 전장을 적절한 '병풍'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두 드라마 모두 "잊혀 가는 한국전쟁을 되새기겠다"는 기획의도를 내세웠지만, 그것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기 위하여"라는 바람과 이어지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고찰 또한 비켜갈 수 없는 과제다. 시청자들이 자꾸 '고증'에 집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을 야만으로 내모는 전쟁에 대한 리얼리티 없이, 그 화면 속의 인간들에 대한 이해도 없기 때문이다.
이기형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두 드라마가 택한 노선에 대해 "거대서사가 아닌 전쟁이라는 장에 던져진 개인들을 중심으로 한 스토리텔링으로의 선회는 필요하다고 본다"면서도 "전쟁에 던져진 이들의 공포와 불안을 밀도 있게 포착하는 외국의 전쟁물들과 비교할 때 이 두 작품에선 아직 전쟁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성의 부여는 접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두 드라마가 한국전쟁에 대한 관심을 점화시킨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본다면서도 "그러한 선택을 사회문화적으로 공명을 일으킬 수 있는 수준으로 서사의 밀도를 끌어 올리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더 기다려봐야겠지만, 두 작품을 매개로 사회적 차원의 담론이 활성화될 것 같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전우>와 <로드넘버원>이 전장을 배경으로 한 그럴듯한 액션영화나 멜로물에 그칠 것인가. 아니면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비극을 생생히 기억하는 것이다"라는 비장한 기획의도처럼 한국전쟁을 기억하게 할 것인가.
로버트 A.로젠스톤이 엮은 <영화, 역사: 영화와 새로운 과거의 만남>에는 "가장 강력한 형식의 망각은 내러티브적 기억 바로 그것이다"라는 언급이 나온다. 잘 조율된 내러티브, 관객을 흡입하는 구성의 할리우드 전쟁물이야말로 전쟁에 대한 기억을 삶 속으로 데려오지 못했다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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