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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축구, '남미의 벽' 넘으려면 '야구의 벽'부터 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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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축구, '남미의 벽' 넘으려면 '야구의 벽'부터 넘어라

[프레시안 스포츠] 축구-야구가 가장 치열하게 경쟁하는 두 나라

아시아 축구의 자존심을 건 월드컵 16강전에서 한국과 일본은 우루과이와 파라과이에 패했다. 오랜 기간 숙성된 기본기에서 남미 축구에 뒤졌다. 그 이면에는 야구에 밀리고 TV도 외면했던 한국과 일본 축구의 특수성이 존재했다.

"야구는 미국보다 일본에서 더 인기 있는 경기"

일본은 애초부터 야구의 나라였다. 근대 스포츠가 일본에 전파될 때 미국의 영향이 영국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미국인 교사들과 선교사들이 그 주축이었다.

이미 2차 대전 이전 일본은 고교야구 대회인 고시엔의 창설과 프로야구의 발족으로 야구 문화가 일상 생활이 됐다. 1938년 한 독일 여행가가 "야구는 미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더 인기 있는 스포츠"라고 했을 정도다.

이 과정에서 축구는 찬밥신세였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동메달 획득을 기점으로 발전하는 듯 했지만 프로화를 이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J리그는 1993년에 발족하는 데, 그 이면에는 한국 축구를 넘겠다는 꿈과 2002년 월드컵 개최라는 두 마리 토끼가 있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일본의 16강을 이끈 필립 트루시에 감독은 히딩크와 비슷하게 월드컵 전에는 비난의 대상이었지만 월드컵이 시작되자 찬사를 받기 시작했다. 공동 개최국 한국의 4강으로 트루시에를 향한 찬사는 다소 빛이 바랬다. 하지만 그는 일본 축구에 큰 메시지를 던져줬다. "이제는 평소 실력으로 월드컵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가대표 TV 생중계가 사라진 일본 축구의 현실

J리그는 비즈니스적 측면에서 꾸준히 성장했다. 지역 토착화, 특히 중소도시 프로팀의 육성을 기본 전략으로 내세웠던 J리그의 혜안 덕택이었다. 주요 대도시에 이미 폭넓은 팬 층을 확보한 프로야구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

TV 중계도 K리그에 비해서 훨씬 안정적으로 이뤄진다. 중계권 수입도 꽤 크다. 하지만 일본 프로야구와의 중계권 수입 격차는 여전히 크다.

하지만 J리그의 수준은 아직 높지 않다. 역설적이지만 일본 프로축구가 전반적으로 너무 공을 예쁘게 차려는 경향이 짙어서다.

J리그는 중원에서 기회를 만드는 능력은 일정 수준에 올라 왔지만 페널티 박스에서의 경쟁력은 아직 부족하다. 황선홍, 최용수, 조재진 등 한국 스트라이커들이 자주 일본에서 성공을 거뒀던 이유다. 여전히 일본 축구가 멕시코 올림픽 축구 득점왕이었던 왕년의 대형 스트라이커 가마모토를 못 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의 오카다 다케시 감독은 골 결정력에 문제가 있는 일본 축구와 함께 남아공 월드컵 이전 끝없이 추락했었다. 일본 대표팀 경기가 11년 만에 처음으로 TV에 생중계 되지 않을 만큼. "월드컵 4강이 목표다"라고 말했던 그는 조롱의 대상이었다.

오카다 감독은 이상주의적인 일본식 패싱게임을 버렸다. 아직 덜 영근 기술로 월드컵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 그가 택한 것은 결국 협력수비와 체력. 월드컵 직전 열린 평가전에서야 완성단계에 이른 수비조직은 일본을 16강으로 이끌었다. 일본은 견고한 협력수비를 위해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보다 많이 뛰었다.

하지만 일본 축구의 영원한 문제인 스트라이커의 부재는 8강 진출의 걸림돌이었다. 믿을 만한 최전방 공격수가 없어 공격형 미드필더 혼다 게이스케를 원 톱으로 세우는 변칙작전으로 파라과이의 탄탄한 수비를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29일(현지시간) 프리토리아 로프터스 버스펠드 경기장에서 열린 2010남아공월드컵 파라과이와 일본의 16강전에서 파라과이 수비수 파울로 다실바(30. 선더랜드. 왼쪽)와 카를로스 보넷(33. 올림피아. 오른쪽)이 일본 미드필더 혼다 케이스케(24. CSKA모스크바)를 수비하고 있다. ⓒAP=뉴시스

A매치 편식증 고착화시킨 프로축구의 역사

축구는 한국의 국기였고 현재도 국기다. 국가적으로 축구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구는 매우 중요한 시기에 야구에 흐름을 뺏겼다.

1970년대 한국의 국내 스포츠는 고교야구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지방 명문교들이 야구를 교기로 삼는 경우가 많아 지역 사람들과 강한 연대감을 형성한 게 결정적이었다. 이 시기에 국가 대표 경기가 아닌 축구 경기가 인기 면에서 고교야구를 능가했던 적은 드물었다.

북한, 일본을 상대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명운을 걸고 축구에 집중적인 투자를 했다. 국가대표 팀이 출전하는 박스컵, 메르데카컵, 월드컵 지역예선 경기는 한국 스포츠의 최고의 빅카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부구조가 야구에 비해 약했다. 국내 축구 경기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이유다. 이 때부터 한국 축구의 A매치 편식증은 본격화 됐다.

1983년 출범했던 프로축구는 초기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홈 앤드 어웨이가 아닌 유랑극단 식의 순회경기 시스템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프로축구의 지역연고제는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다. 반면 프로야구는 철저한 지역연고제로 프로축구를 앞서 나갔다. 1970년대 이뤄진 고교야구의 열풍은 고스란히 프로야구로 흡수됐다.

이 시기 프로축구는 사실상 1986 아시안게임과 1988 올림픽을 위해 존재했다. 자주 경기일정이 변경됐고, 스타급 선수들도 시도 때도 없이 국가대표로 차출됐다. 프로축구는 표류했다. 근시안적 축구 정책이 부른 재앙이었다.

긴장감 떨어지는 K리그의 한계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한국 프로축구는 달라지긴 했다. 일단 훌륭한 시설의 월드컵 경기장을 쓸 수 있었다. K리그의 인기도 높아졌고, FC 서울과 수원 삼성의 경기가 흥행카드로 떠올랐다.

상대적으로 프로야구는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특히 한국 야구가 베이징 올림픽 우승을 거두고 WBC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하는 드라마를 연출한 뒤 프로야구는 다시 예전의 인기를 회복했다.

600만 관중시대를 꿈꾸는 프로야구의 위세 탓인지 TV는 K리그를 철저히 외면하기 시작했다. 야구 중계에 밀려 프로축구는 후반전만 생중계 됐고 '후생리그'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썼다. 설상가상으로 K리그는 스폰서도 못 구해 발을 동동 굴렀다.

한국 축구는 남아공에서 기술적으로 한 단계 성숙했음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패스의 속도가 빨라졌다. 느린 패스 때문에 한국의 스피드를 살리기 힘들어 히딩크 감독이 경기마다 그라운드에 규정이상으로 물을 많이 뿌려달라고 요구했던 2002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중원에서 어디로 공을 줄지 몰라 우물쭈물하던 모습도 많이 사라졌다. 의미 없이 무조건 많이 뛰는 축구도 개선됐다. 박지성과 이청용은 미리 공의 방향을 예측하고 뛰면서 많은 공격 기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한국은 두 가지 면에서 균형이 깨져 있었다. 공수 밸런스, 유럽파와 나머지 선수들간의 격차였다. 가장 큰 파열음을 낸 곳은 수비였다. 중앙 수비수 곽태휘의 부상으로 수비 조직력을 극대화 하지 못한 게 컸다.

중요한 시점마다 왼쪽 수비수 이영표는 공격작업에 참가해 박지성, 이청용에게 공을 연결해 줘야 했다. 중원에서의 패스가 부정확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수비라인이 흐트러졌다. 다른 선수가 이 빈 자리를 채워줬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위기도 이 때 찾아왔다.

유럽파와 나머지 선수들과의 차이는 큰 경기 경험이었다. 국내파들은 긴장감이 떨어지는 K리그에서 뛰다 보니 월드컵 무대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기 쉽지 않았다. 특히 김재성, 염기훈 등 공격수들이 이런 모습을 보였다. 월드컵을 방불케 하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매 경기에 임해야 하는 유럽파가 좀 더 대담한 플레이를 할 수 있던 이유다.

한국과 일본 축구의 공통 딜레마는 야구

세계 스포츠 지형도를 보면 한국과 일본은 축구와 야구의 점이지대에 위치해 있다. 한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축구와 야구가 국내 최고 스포츠 자리를 놓고 이처럼 치열하게 경쟁하는 국가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이번 월드컵에 나온 팀 가운데 비슷한 입장의 국가를 찾자면 멕시코 정도다. 하지만 멕시코에서 축구의 인기는 야구를 압도한다.

한국과 일본에서 축구와 야구 시즌은 거의 일치한다. 상생발전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구조다. 두 종목에 모두 관심이 있는 팬들도 많지만 같은 날 비슷한 시간에 경기가 열린다면 팬들은 한 종목을 포기해야 한다. TV 채널도 마찬가지 선택을 하게 된다.

이 경쟁에서 밀리면 악순환이 되풀이 된다. 경기는 맥이 빠지고, 선수들은 승부에대한 의욕을 잃는다. 당연히 경기력도 저하된다. 팬들과 미디어의 관심은 더 떨어지고, 투자가 위축된다.

한국을 이긴 우루과이는 월드컵 8강에 다시 오르기 위해 40년을 기다려야 했다. 파라과이는 일본을 이기고 3전 4기 끝에 8강에 안착했다. 두 국가는 축구에 국민적 에너지를 모두 쏟을 수 있는 나라다.

한국과 일본은 상황이 다르다. 이런 점은 16강전 패배의 위안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한계일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더 이상 히딩크나 트루시에 시절처럼 오랜 기간 집중적 훈련으로 월드컵을 준비할 수 없다. 이제 월드컵은 철저하게 평소 실력으로 치러야 한다. 평소 실력의 근간은 자국 리그의 수준이다. 그 수준이 높아야 유럽에서 통할만한 선수도 끊임없이 등장한다.

한국과 일본 야구는 WBC를 한일 베이스볼클래식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직 그 영향력은 월드컵에 한참 못 미친다. 하지만 WBC는 월드컵만큼 '애국심'을 자극할 수 있어 한국과 일본 축구에 새로운 위협이다.

프로야구와 프로축구의 단순했던 경쟁 구도는 이렇게 범위가 넓어졌다. 그런 점에서 양국 축구의 진짜 라이벌은 야구일지 모른다. 때로는 내부 경쟁자가 더 무서운 법이다. 아직 한국과 일본의 일상에는 야구가 더 깊게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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