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여당의 한 지도자가 2개월간의 독일 체류 후에 '새로운 중도'를 표방한 정치 노선을 구상하고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1990년대 후반 독일의 사회민주당(SPD)이 16년간의 기독교민주당(CDU) 장기집권을 종식시키는 선거전에서 활용한 전략 프로그램인 '노이에 미테(Neue Mitte : 새로운 중도)'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일단 현재 독일에서 '새로운 중도'를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그가 독일 체류 후에 약 8~9년 전에 독일 정가에서 잠시 유행하던 화두를 들고 한국 정계로 귀환한 모습은 다소 의아하다. 자신이 새로운 중도를 표방하는 것과 당시 사민당의 집권 전략의 상관관계에 관하여 그가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섣불리 둘을 일치시킬 필요까지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행여 그가 사회민주당의 '노이에 미테' 전략을 추구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다면, 과연 그것이 한국 정치의 현실적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그 진행을 어떻게 떠올리고 있는지 사뭇 궁금해진다. 특히 독일식 '새로운 중도'의 짧고도 슬픈 운명을 떠올리다보면 그 궁금증은 더욱 커진다.
'노이에 미테', 그 짧고 슬픈 운명
어떠한 정당이든지 선거에서의 집권 전략과 집권 이후 그 전략의 실현 과정은 상당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선진 정치와 후진 정치의 차이는 아마도 전자가 후자에 비해 전략과 실행의 간극이 상대적으로 좁다는 것이지 그것이 꼭 일치한다고 볼 것은 아니다. 사민당의 '노이에 미테'는 잘 알려졌다시피 녹색당과의 연정을 통해 정권을 창출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수사였으나, 실상 그 실행 과정은 결코 성공적이지 못했다.
집권 이후 그러한 이상의 실행 과정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당시 사민당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추진할 정치적인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결국 '좌파 정권이 추진하는 신자유주의'를 의미하는 수사에 불과했다는 것으로 드러났으니까. 적녹연정 1기(1998~2002) 동안 슈뢰더 정권은 계속된 정치적인 미숙과 과단성 부족으로 실업을 잡지도, 노조를 설득하지도, 그렇다고 신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하지도 못하였다. (이는 사회 양극화 해결도, 노사 갈등 해소도, 그렇다고 경제 개혁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해 온 노무현 정부의 모습과도 흡사해 보인다.)
결국 2002년에 정치적인 위기를 구사일생으로 극복한 이후 적녹연정은 신자유주의 개혁프로그램인 '아젠다 2010'을 과감히 도입하면서 '노이에 미테'의 이상과는 결별하며 그 실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사회적 연대와 응집력에 손상을 가하는 무리를 불사하고 실업난의 부담을 던다는 일념 하에 정치의 키를 오른쪽으로 확실히 튼 것이다. 1990년대 후반에 사민당과 사민당의 총리 후보 슈뢰더가 '노이에 미테'를 들고 나왔을 때 이를 지지하며 안정된 개혁을 바랬던 유권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결국 적녹연정은 원래 올 여름으로 예정되어 있던 집권 2기를 다 채우지도 못하고 연이은 광역의회 선거(주 정부 선거)에서 참패를 거듭하면서 작년 가을 자발적으로 내각을 해산하며 자기분해하게 된다. '노이에 미테'의 이상은 그렇게 쪼그라들면서 신자유주의 개혁프로그램인 아젠다 2010으로 옷을 갈아 입고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정동영의 '새로운 중도',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최근 보수정당인 기독교민주당의 당수이자 현 대연정 정부의 수반인 메르켈 총리는 독일 경제의 회생과 노동시장 유연화의 효과를 지켜보면서 슈뢰더 정부 하에서 단행되었던 아젠다 2010 개혁 프로그램을 칭송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 독일에서 아무도 슈뢰더 정부의 '노이에 미테'를 기억하지도 않고, 슈뢰더를 '새로운 중도'를 잘 구현한 정치가로도 기억하고 있지 않다.
이렇게 독일에서의 '새로운 중도'의 짧고 슬픈(?) 운명을 되짚다 보면, 도무지 그것이 한반도 남단으로 건너가서는 국민들에게 웃음거리나 되지 않을지 미심쩍은 마음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그 정치가가 독일에서의 '새로운 중도'의 이러한 슬픈 과거를 제대로 짚었음에도 불구하고 2개월간의 체류 후에 굳이 '새로운 중도'를 모토로 들고 나왔다면, 여기에는 혹시 남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능한 좌파 정권에 환멸을 느끼고 등을 돌린 유권자들을 붙잡으려는 뉴라이트의 포퓰리즘이 횡횡하는 시대에 어쩌면 그 정치가도 일단 실패한 좌파 정권의 옷을 벗고, 그러면서도 우파와는 차별성을 두려는 정치적인 수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발언을 한 것이 아닐까?
이제 그가 표방하는 '새로운 중도'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독일 사민당의 실패한 경험으로부터는 도무지 무엇을 배웠고 그로부터는 어떠한 차별적인 전략을 품고 있는지에 관해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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