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노조의 개수와 반비례할 정도로 독일과 한국의 노사관계의 수준과 노동권의 수준은 큰 차이를 보인다. 어쩌면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노동조합이 필요한 것은 뭔가 잘 안 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10여 개의 노동조합을 갖고도 그렇게 노사화합을 잘 하고 일반 노동자들이 한국 중산층 수준의 안정된 삶을 누리며 세계 최고의 기업들이 즐비한 독일의 모습을 보면, 수천 개의 노조들이 논리상 매년 수 천 회의 교섭을 진행하는 우리의 시스템을 향해 뭔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한국의 자동차 산업 노조들이 속속들이 산별노조로 전환을 결정하자 재계와 보수 언론들이 일제히 "독일마저 기업별 교섭(노조)로 가고 있다"며 노동계의 결단에 "시대착오적인 결정"이라고 비판을 가했다. 독일에서 산별교섭이 기업별교섭으로 가는 패턴에 대한 실증분석은 이미 1990년대 후반부터 독일과 세계 학계의 뜨거운 논쟁이 되어 왔고, 이제 그 경향은 거의 지배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한국의 재계와 보수언론이 완전히 근거 없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문제는 그러한 독일에서의 경향이 지니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일까에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독일 교섭체계의 변동이 지니는 의미로부터 한국의 기존의 기업별 노조에 기반을 둔 기업별 교섭 체계를 옹호하는 논리를 꺼내는 것은 참으로 옹색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몇 가지 점을 지적하고 싶다.
독일에 '기업별 노조'는 없다
일단 한 가지 확실히 해 둘 것은 독일에는 도무지 기업별 노조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교섭권과 파업권을 지니는 노조는 기업 밖에 존재하며 기업 안에는 경영참가의 주체이며 해당 기업 근로자들의 대표체인 종업원 평의회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누군가 산별노조가 기업별 노조로 간다고 발언한다면 이는 100% 틀린 말이다. 산별교섭이 기업별 교섭으로 가고 있다고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형식적으로 독일에서 교섭체계의 변동은 소위 '대각선 교섭'의 활성화를 의미한다. 즉, 기존의 산별노조와 산별사용자 간의 교섭패턴으로부터 최근에 산별노조와 개별 기업이 맺는 패턴이 확산되고 있다. 기업별 노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노동 측에서 기업별 교섭의 주체는 여전히 산별노조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는 형식적으로 대각선 교섭이 되는 셈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독일에서의 기업별 교섭의 확산을 지적하면서 그것이 마치 한국식의 기업별 노조가 주체가 된 기업별 교섭을 의미하는 양 해석하는 것은 커다란 오류다. 적어도 대각선 교섭은 한국에서는 여전히 낯선 교섭방식이며, 어쩌면 산별노조가 활성화되어도 사용자 단체가 구성되지 않는다면 당분간은 대각선 교섭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 노동계의 산별노조로의 결단은 어쩌면 독일에서 최근 유행인 대각선교섭의 기본 조건을 갖추는 것일 수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시대착오"라는 비판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된다. 행여 독일에서 아무리 기업별 교섭이 활성화된다고 해도 산별노조가 해체되어 기업별 노조로 바뀌고 한국처럼 수천 개의 노조가 제 각각의 교섭을 하는 방식은 독일에서는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독일에서 노조의 경영 개입 기회는 더욱더 확대돼
독일의 교섭체계 변동이 갖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는 그것으로 인하여 산별교섭 체계가 뿌리째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기업별 교섭은 산별교섭의 원칙으로부터 특수한 예외로 존재한다. 물론 역사적으로 길게 보아 예외가 확산되어 새로운 원칙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아직까지는 그리고 향후 상당기간 동안 독일의 기업별 교섭은 하나의 예외적인 케이스로 존재할 것이다.
개별 기업이 기업별로 특수한 상황을 호소하며 산별 차원에서 맺은 협약을 적용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상당히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산별노조로부터 '예외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를 '개방조항(Öffnungsklausel)'이라고 부른다. 이 새로운 제도에서 기업들은 투명한 경영 자료와 공신력 있는 시장상황을 노조에게 제출해 향후 한시적으로 산별협약의 적용을 피하는 것이 당해 기업의 일자리를 지키고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 불가피함을 증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는 노동조합으로 하여금 개별 기업의 경영에 개입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넓히는 측면을 지닌다고도 볼 수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기업별 교섭의 확산은 독일 노조에게는 새로운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기업 밖의 산별노조가 산별 사용자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기업들의 경영과 관련해서도 간여를 하는 상황이 늘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확산되는 기업별 교섭에서 마지막으로 짚어야 할 의미는 기존에 산별교섭에서 확립되었던 노사 간에 높은 신뢰를 기반을 둔 파트너십이 기업별 교섭에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앞의 '개방조항'의 경우도 노사 간의 파트너십이 상실되지 않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에 더하여 최근 고임금의 압력 때문에 소위 다른 나라로 생산지 이전을 추진하는 기업들이 속속 늘면서 독일 노사관계에는 소위 '기업별 고용 연대(Betriebliches Bündnis für Arbeit)'라고 하는 관행이 크게 늘었다. 이 역시 기업별 교섭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으며, 여기에서는 대체로 노동조합과 종업원 평의회가 중심이 되어 근로자들의 일자리 지키기를 위해 고용조건을 양보하는, 일종의 양보교섭을 벌여 왔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보다 더 심도 깊은 분석이 필요하겠으나 적어도 그 지점에서 노사 간의 파트너십이 공고히 유지되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노사관계 불안의 진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근래 들어 한국에서는 독일 노조들이 벌이는 이러한 관용적인 태도를 지적하며 한국 노조가 정치투쟁을 지양하고 일자리 창출에 관심을 둘 것을 강조하곤 하지만, 정작 독일의 사용자들이 이러한 과정에서 보이는 관용과 양보의 모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파트너십의 문제는 언제나 양자의 문제이지 어느 일방의 문제라고 볼 수 없다. 아마도 노사관계의 관행과 사용자들의 지배적인 태도가 파트너십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독일의 노동자들 역시 그러한 식의 양보교섭에 기꺼이 응할 리가 없다. 따라서 한국의 노조에게 독일의 노조로부터 뭘 배우라고 하기 이전에, 한국의 사용자들이 먼저 독일의 사용자들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분명 독일의 교섭체계의 변동과정은 우리의 노사가 배워야 할 점이 참 많다. 필자는 그 중에서도 핵심은 파트너십이 파기되지 않는 교섭관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교섭에서 문제는 파트너십이 취약한 것, 다시 말해 노사 간의 상호인정의 관행이 부재한 것이다. 파트너십이 부재한 지금 한국의 기업별 노조와 교섭체계는 끊임없이 문제를 낳을 것이며, 교섭의 비효율과 노사관계의 불안정 등 계속된 비판에 직면할 것이다. 산별교섭을 한다고 해도 파트너십이 없다면 불안이 조성되기는 마찬가지이다.
한국 노동계의 결단은 기존의 기업별 노조체계 하에서 현실의 노동시장 양극화의 심각성을 해결하지 못하고 자본과의 대등한 파트너십도 만들지 못하는 위기의식에서 나온 자구책일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전환을 통해 얼마나 양자가 만족할 수 있는 '교섭의 질'이 나타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있다. 이는 산별노조로 전환을 결단한 노조들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이지만, 정부와 사용자의 호응이 없이는 분명 교섭의 높은 질은 확보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세계화 시대에 교섭체계의 경직성을 탈피하고 중층적인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것이 제도 전환의 핵심적인 의미라고 한다면, 이번 특정 산업의 일부 노조들이 결단한 산별노조로의 전환이 해당 기업들 내에서 그리고 해당 산업 수준에서 노사 간의 파트너십을 확대하는 계기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만, 독일의 사실을 동원해 피상적인 이야기만 덧씌워 노동계를 비난하는 한국의 일부 사용자들과 보수언론들의 모습은 아직도 진정으로 노동계를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한 태도가 아닐까 싶어 우려스럽다. 기업별 노조 때리기에서 이제 산별노조 때리기로 옮아가기만 해서는 중층적 파트너십이고 뭐고 설 자리가 없지 않을까? 그리고 나서도 노사관계 불안의 모든 책임은 노동계가 떠맡아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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