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와 정부는 우리 국민에게 아시아 지역의 국제 경제공동체로 가는 길을 제시하기보다는 '중국이냐, 미국이냐'는 식의 단순논리로 편을 갈라 설 것을 강요하고 있다. 이러한 단순논리는 우리 국민에게는 이제 어느 패권국과 손을 잡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현실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피상적인 '중국 위협론'
더 나아가 청와대는 중국 위협론을 보다 적극적으로 제기한다. 중국은 우리와 인접한 강대국인데다 우리에게는 중국의 속국이었던 역사적 경험이 있다는 것이 그 주요한 논거다. 최근 중국의 빠른 기술발전 속도와 높은 경제성장률도 역시 주요한 논거로 제시되긴 하지만, 미국과 중국을 변별해서 미국의 손을 들어주는 청와대의 태도는 이보다는 아무래도 앞의 논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는 "미국에도 할 말은 하겠다"는 수준을 넘어 '동북아균형자론'까지 주창했던 현 정부의 그간 국정기조와는 전혀 다른 것이며, 그 논거는 노선변경의 이유치고는 너무나도 궁색하다.
일부 청와대 내 논자들이 중국 위협론의 근거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기초 과학기술 역량에서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세계적인 학술지에 바이오와 나노 분야의 논문이 등재되는 건수로 보자면 양과 질이라는 두 측면에서 중국은 이미 일본과 영국을 제치고 세계 2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기초과학 기반에서는 중국이 이처럼 성장하고 있어도, 중국의 산업화는 여전히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10여 년째 8%대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중국의 연평균 성장률이 놀랍기는 하지만, 1인당 국민총생산(GNP)을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가 중국을 10배 정도로 앞서고 있다. 중국의 1인당 GNP가 1만 달러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10여 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지금 중국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확대와 시장경제의 성장에 따르는 많은 변화들에 적절히 대처하는 것으로도 벅차다. 중국이 2000년에 중화주의와 지역패권주의를 추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추진하는 것만 해도 숨차다는 절박한 현실인식을 중국 정부가 한 결과이기도 하다. 게다가 중국은 이미 우리나라의 최대 수출대상국이며, 앞으로 양국은 상호관계를 어떻게 형성하느냐에 따라서는 아시아 차원의 호혜협력과 지역 경제공동체 건설에서 훌륭한 동반자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아울러 중국인들 사이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중화주의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아직 완성된 패권국가가 아닌 반면 미국은 완성된 패권국가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게다가 미국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재정적자와 대외채무의 부담을 안고 있어 정치군사적 동맹관계 유지를 위해 필요한 비용을 교역 및 외교 상대국에 전가하고 있고,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최대 이윤의 논리를 철저하게 관철하고 있다.
설사 청와대의 주장처럼 우리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양자택일이 불가피하다고 하더라도 미국보다는 중국이 우리나라의 미래에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의제는 좀더 나은 '주인'이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백번을 양보해서 중국과 미국 두 나라 중에서 어느 나라와 손을 잡을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우리에게 강요된다면, 우리의 선택 기준은 어느 나라가 '아시아 경제공동체 건설에 더 많은 관심과 협력의사를 가지고 있는지', '호혜평등과 다양성의 가치를 더 인정하는지', 그리고 '경제협력의 결과 우리나라의 장기적이고 지속가능한 성장모델 창출에 더 도움이 되는지'가 돼야 할 것이다.
대안의 성장모델을 찾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한미 FTA가 국내 산업연관 구조에 미칠 장기적, 구조적 영향을 분석하고, 한미 FTA가 전제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성장모델이 지속가능한 것인지를 따져보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필자는 청와대가 강조하고 있는 '개방을 통한 경쟁력 확보'론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를 논증하고자 하며, 현 정부의 '아시아 금융허브'론은 그 현실적 가능성이 매우 낮긴 하지만 그것이 설령 성공한다 해도 결국은 새로운 성장동력의 등장을 가로막게 된다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그러나 한미 FTA에 대한 비판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한미 FTA에 반대하는 동시에 혁신적인 경쟁을 가로막는 우리 사회의 관료적이고 독점적인 경직성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우리나라는 인구 및 경제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탓에 세계화의 도도한 흐름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흐름에 대한 진보적인 대안 제시는 이런 고려를 바탕에 깔고 이루어져야 한다.
결국은 지속가능한 대안의 성장모델이 제시돼야 한다. 그 대안의 성장모델은 신자유주의적인 방식이 아니더라도 지식기반 서비스 부문의 경쟁력 확보가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경제주권의 포기가 아니라 보다 정교하고 전략적인 21세기형 산업정책의 수립과 실행이 필수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더 나아가 노태우 정부 이후 추진돼 왔고 김대중 정부 시절에 우리나라가 주도적으로 제안한 아시아 경제공동체 구상인 '동아시아 비전그룹(EAVG)' 프로그램을 확대발전시켜야 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