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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 꽃비처럼 사라지다

〈김봉준의 붓그림편지 17〉

오늘 비가 세차게 내리더니 봄꽃들이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어제 바람에 휘날리며 떨어지던 꽃들은 아름다웠는데 오늘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맞고 떨어지는 낙화는 보기가 흉합디다. 차라리 스스로 꽃비가 되어 휘날리던 것이 아름답군요. 비에 젖은 채 진탕에 문드러지기보다 '젊은 날의 꽃 사태'처럼 떨어지는 것이 처연하게 아름다운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모교 대학 탈춤반이 없어진 오늘을 보면서 과거 젊은 날의 꽃 사태처럼 사라지던 탈춤의 몰락이 차라리 구차하지 않아 보이는군요. 홍대 탈춤반은 해체가 되어서 무슨 개그 서클로 바뀌었답니다.

지난 주말에는 모교인 홍익대학 탈춤반 동아리의 소멸을 기념하는 동문회를 강화도 초지에서 가졌습니다. 1975년 홍익대학 탈춤반이 생긴 이래 그곳을 거쳐간 몇몇 동문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거쳐 간 동문들은 많았지만 오랜만에 모인 동문들은 열다섯 정도였습니다.

동문들은 이제 생업에 종사하느라 탈춤을 잊고 살지만 탈춤정신만은 잊지 말자고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 탈춤반 시기가 자기 인생의 가장 멋진 추억이었다고 모두들 입을 모았습니다. 새삼 '탈춤정신'이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70~80년대 대학 탈춤반은 대학문화운동의 산실이었습니다.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표되는 대학문화를 주변으로 밀어내고 탈춤, 마당극, 풍물굿, 대동놀이가 대학문화의 주류를 이루게 했던 그 중심에는 탈춤운동이 있었습니다.

탈춤운동을 돌이켜보면 아쉬움도 많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보람이라면 대학문화운동뿐만 아니라 '70~80년대 민주화운동에까지 참여했던 그 문화운동의 중심에 탈춤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울러 마당극, 민족극, 민족예술, 민족미학의 흐름을 이어오며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문화예술 흐름에 보이지 않는 동력이 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요즘 시대문화의 조류에 휩쓸려가는 젊은이들을 탓할 일도 아닙니다. 지금은 실용적인 서클이라야 모이는 풍토입니다. 당장 취직에 도움이 되거나 하다못해 오락성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탈춤은 재미는 있겠으나 너무 고루하고 어렵고 복잡합니다. 그러니 애써서 선배들이 살린다고 대학 탈반이 살아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지요.

신문을 보니 힙합댄스에 기타 치는 젊은이가 유명 대학 총학생회장이 되었다지요. 30년 대학문화의 부침을 바라보며 새삼 문화란 무엇인가 되새겨봅니다. 문화란 생명체와 같아서 그 사회의 물적인 토대와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본성 사이에서 유행처럼 흘러갑니다.

지금은 산업자본주의를 지나 자본주의의 절정인 금융자본주의 시대입니다. 세계 11위 경제 강국이라는 우리도 그 한복판에 휩싸여 있습니다. 자본의 증식이 생산을 통해서 발생하는 산업자본주의도 아니고 큰 자본이 돈놀이로 돈이 돈을 만드는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니 노동은 천시되고 농산물은 푸대접 받는 시대입니다. 경쟁력 있는 사람만이 생존하는 시대입니다. 돈 가는데 마음 가니 문화의 흐름도 이동합니다.

탈춤의 퇴락은 그래서 필연적인지도 모릅니다. 한국의 대학은 이미 생존을 위한 취업전선입니다. 노동가치와 대지의 생명력을 중시했던 탈춤문화가 대학에서 몰락하는 것은 또 한 시대의 변화를 상징해 줍니다.

나의 지난 대학 시절을 회고해 보면 탈춤반이 아니었더라면 대학생활을 못했을 겁니다. 자조의 말이 아니라 홍익대학교 탈춤대학 풍물과를 나왔다고 스스로 소개할 정도였으니까요. 어두운 내 청춘기 한줄기 빛과 같은 희망의 문화였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은 추라고 권해도 안 추는 게 탈춤이지만 '70년대 유신시대는 탈춤을 추고 싶어도 못 추게 하던 시대였습니다. 학교에서는 불온한 서클이라고 등록도 해주지 않아 연습실도 못 얻고 2년 동안 학교 밖에서 탈춤을 추러 다녔으니까요. 장고를 들고 다니다 불신검문을 받고 파출소로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쫓겨 다니면서 구박받으며 추던 춤입니다. 그래도 좋다고 "참나무장작 화장작~" 하면서 강령 말뚝이 춤을 추며 땀이 뻘뻘 흐를 때까지 춤을 추다보면 묵은 체증이 내려갔고, "녹수청산 깊은 골에 청룡 황룡이 꿈틀어지고~" 하면서 산대 맞춤을 추노라면 벗들과 우정도 새록새록 커갔습니다. 오광대 춤을 추다보면 남도 덧배기에 취해서 신이 저절로 솟았습니다. 젊은 시절 몸으로 체험하는 신명의 문화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놀이와 춤은 몸과 마음의 분립을 넘는 원초적 예술입니다. 젊은 시절 놀지는 않고 춤추지도 않고 공부만 했다는 사람들은 사실 불행한 사람입니다. 미안하지만 이런 비유를 용서하십시오. 꽃 피워야 할 때 꽃을 피우지 않은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탈춤만이 아니라 모든 춤은 내가 남(세상)과 자유로이 교우하고 싶어 하는 꽃이 되려는 몸짓입니다.

돌이켜 보아도 멋진 추억입니다. 1978년 학내 서클로 등록을 겨우 마치고 온갖 탈춤 다 추어본다고 전국 방방골골을 돌아다녔던 시절, 탈춤으로도 모자라 풍물까지 배우자며 전북 임실 산골 오지로 찾아가던 시절, '80년 민주화의 봄을 학내에서 탈반이 주도하며 거리로 어깨 겯고 나오던 시절, 드디어 대학교 학생회까지 진출해서 학생회를 이끌던 시절, 국악반, 풍물반, 노래반, 민화반을 연달아 만들며 대학 내 문화써클의 흐름을 이끌었던 '80년대 그 시절 한 복판에 대학 탈춤반이 있었습니다.

뒤돌아보면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탈춤은 전통문화부흥운동의 한 복판에 있기보다 민주화운동 전선에 일익을 담당해야 했고 과도한 정치적 과제를 떠안아 문화예술로서의 전문성을 키우는 일을 소홀히 했습니다. 삶의 예술, 자연의 예술, 동아시아 신화, 철학, 미학 공부도 깊이 못했습니다.

이것은 과도한 이념적 지향을 낳았고 탈춤에 대한 창조적 계승 범위를 좁혔습니다. 탈춤을 마당극·민족극 등 극으로 좁혀서 실행하고, 굿 문화 전체 속에서 탈춤을 이해하고 실천하지도 못하고, 인본주의 미학에 치우쳐 탈춤을 협소화시키기도 했습니다. 탈춤과 브레이트 식 서사극과 비교 연구하거나, 갈등론 중심으로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데에 주로 머물던, 서구적 근대이념 지향성을 가진 이론이 당시의 흐름을 주도했습니다. 결국 시대적, 지식인적 한계를 노정시켰다고 생각합니다.

늦었지만 요사이 탈춤 연구에 새 방향을 잡기가 시도되고 있어 기대가 큽니다. 그러나 말짓이 아니라 몸짓으로, 탈춤 자체를 창조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모든 이론은 길 가는 자의 몸짓 자체가 아니라 가끔 캄캄한 길을 밝혀야 할 때 손에 든 손전등 같은 것입니다.

우리 탈춤운동은 탈춤의 바다에 빠져 헤매다가 익사한 것 같습니다. 바다 같은 동아시아 예술인 탈춤은 다시 수면 속으로 가라앉아 때를 기다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웃으며 보내렵니다. 탈춤반의 종언을 깨끗이 인정하고 다시 신화 속으로 탈춤이 퇴장하도록 놓아버리렵니다. 춤을 추든, 개그를 하든 자기들 좋은 거 하는 대학생들 세태에 간섭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학문화보다 탈춤전통을 방치해 놓고 있는 우리나라 예술계와 예술교육계, 그리고 예술문화행정이 어처구니없을 따름입니다. 나라 세금 쓰면서 자기 나라에서 무엇을 시급히 보호 육성해야 전통문화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지 헤아리지 못합니다. 말로만 민족문화, 동북아시대, 디자인 정체성을 강조합니다.

탈춤은 동아시아적 종합예술의 결정판입니다. 시서화와 악가무는 물론 의상, 탈 같은 조형예술과 의례문화가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고 흘러 마침내 바다가 되듯이 하방연대하며 만든 문화 같습니다. 아시아 대륙의 샤만 문화, 실크로드 동서교류 문화, 동아시아 고대의 숲 문명, 조선 후기의 민중문화가 다 흘러들면서 혼융한 참으로 묘한 영적인 문화입니다.

이렇게도 비교할 수 있는데 동아시아 전통종합예술 중에는 중국을 대표하는 것에 경극이 있고 일본을 대표하는 것에 가부끼가 있다면 우리 겨레를 대표하는 것에 탈춤이 있습니다. 탈춤을 밝히면 한국문화 정수가 보인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왜 탈춤은 경극이나 가부끼처럼 무대화하지 않았고 탈을 벗어버리지도 않은 채 원형마당에서 횃불조명을 밝히고 춤을 추었을까요. 신의 가면을 쓰고 춤을 추게 된 사실을 실사구시 해야 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

탈춤은 조선 후기까지도 신의 가면을 벗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탈의 수수께끼를 풀어야 풀릴 것입니다. 탈춤은 신성(神性)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예증이고 그 신성은 속성(俗性)을 거꾸로 모신 신성일 것입니다. 속된 것을 모신 신령스러움에서 나오는, 모든 것과 새로운 관계로 거듭나는 신인(神人)입니다!

우리가 탈춤을 춘 젊은 시절도 신령함의 관계로 거듭나려 했던, 신나는 신인시대였습니다. 지금 비록 생업에 찌든 '금융자본주의시대'를 살고 있어도 동문들이 젊은 시절 탈춤의 추억이 제일 아름다웠노라고 입을 모으는 것도 그 신인의 추억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동아시아에서 전통적으로 신인이란 초인이 아닙니다. 성과 속이 같이 있는 말하자면 탈춤의 신할아버지, 미얄, 목중, 소무, 신장수, 왜장녀, 취발이, 노장, 오광대, 봉사 등 허름하면서도 신성한 모순의 통일 같은 역설의 진실이 빚어낸 인물들입니다.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날이 4.19 기념일이군요. 오늘밤은 동북아평화연대 회원들의 술자리에 참석했다가 어느 회원이 부르는 노래 '진달래'를 들었습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따라 불렀습니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그 날 쓰러져 간 젊음 같은 꽃 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련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이 노래를 부르는 오늘밤은 비 오는 날입니다. 오늘 비에 젖어 떨어지는 꽃보다 어제 스스로 떨어졌던 꽃비가 역시 아름답군요.

'욕처럼 남은 목숨~'을 고장 난 레코드처럼 부르며 밤길을 걸어 집으로 갔습니다. 오늘 이 세속의 시대에 탈춤의 소멸은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추하게 세속화하기보다 탈춤은 신화 속으로 신인으로 춤추며 떠나갔습니다.

탈춤의 아름다운 퇴장에 눈을 감았습니다. 욕처럼 남은 목숨은 젊음 같은 꽃비를 마음에 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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