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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5ㆍ18 때 광주 폭격 계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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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신군부, 5ㆍ18 때 광주 폭격 계획했다"

[기고] '5ㆍ18'과 미국 다시 들여다본다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이후 당시 '광주'를 체험한 시민들 그리고 한국인들은 '미국'이란 나라의 실체와 허상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소박한 의미의 '맹방'이란 차원을 넘어서서 워싱턴 D.C와 펜타곤과 네오콘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된 것이다. 동북아 정책과 군사적 전략에 대한 움직임은 물론 워싱턴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공개적인 뉴스'도 과거와는 다른, 상당히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안목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다.

6.25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 남쪽에서 일어난 최대 비극 중의 하나로 꼽히는 '5·18'도 26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 땅 현대사의 분명한 텍스트다. 따라서 1980년 5월의 광주와 한반도의 긴장된 순간들은 오늘과 내일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스펙트럼과 교훈을 제공하고 보다 실천적인 사고(思考)를 요구하고 있다. "진실은 소금을 뿌려 저장해둔 생선이 아니라 살아 펄펄 뛰는 생선과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그럼 이제, 1980년 5월의 광주를 증언한 미국인 아놀드 피터슨 목사(Arnold A Peterson 한국명 배태선, 美남침례교 선교사, 현재 美 일리노이주에서 목회 중)의 <5·18, THE KWANGJU INCIDENT>의 체험·진술기록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피터슨 목사는 당시 광주에서 가족과 함께 선교활동을 하던 중 5·18의 전체 과정을 생생히 목격한 사람으로 미공군이 광주거주 미국 민간인들을 광주비행장에서 외지로 실어 나를 때 그것을 거부하고 항쟁 기간 내내 광주에 남아 있던, 이른바 '증인' 중 한 사람이다.

"1980년 5월 26일 오전 10시 이후 광주 공군기지에 있는 데이브 힐 하사와 통화하던 중 그가 다시 한번 우리가 떠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지만 밝힐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해 불길하게 말했다. 후에 나는 그로부터 한국공군이 공격의 일환으로써 도시에 폭탄을 떨어뜨릴 계획을 했다는 것을 들었다. (I learned from him that the Korean Air Force had made plans to bomb the city as one part of their attack.)"
▲ 해마다 오월이 오면금남로는 자유와 평화와 통일로 가려는바다로 넘친다. ⓒ프레시안

세상에?! 그 많은, 엄청난 숫자의 계엄군도 부족해서 당시의 신군부 세력이 '공군 전투기로 광주 폭격을 계획(made plans to bomb)'했다니?! 5·18항쟁이 26년이 지난 오늘에 생각해도 끔찍한 생각만 들뿐이다. 그래서 그럴까.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의 북쪽에 쏟아졌던 폭탄(태평양전쟁 때보다도 더 많은 양을 투하했음) 세례, 베트콩(베트남민족해방전선 군대)을 겨냥한 정글 소탕작전에서 터져 나오던 그 무시무시한 F5전투기의 폭발음…. 그리고 80년 5월 광주 상공을 날던 LMG 기관단총과 HMG를 매단 각종 헬기들, 1개 중대의 화력을 가진 상어처럼 생긴 건쉽 헬기, CH47기, 전투기의 폭발음들이 지금도 뒤섞여 환청처럼 들려온다.

당시 인구 80만의 광주에 탱크를 앞세우고 투입된 지상군 병력은 또 어떤가. 31사단 병력 1500명, 3공수여단 5개 대대, 7공수여단 2개 대대, 11공수여단 3개 대대 등 3400여 명, 이어 추가 투입된 20사단 61연대·62연대 병력 3200여 명이 총칼로 무력진압을 했을 때 80년 5월의 광주에서는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석가탄신일, 신록의 계절, 계절의 여왕 따위의 어휘들이 어느새 증발되고 말았던 것이 아닌가.

바로 그때 미국은 '광주'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었을까. 혹은 '안 보이는' 어떤 움직임으로 광주상황, 나아가 코리아의 상황에 연계하고 있었을까. 올해로 26주기를 맞이한 '5.18'을 뒤돌아보며 지금도 '살아서 펄펄 뛰는 진실'의 실체를 다시 들여다보고 싶음이 바로 그러한 뜻에서다. 이 땅에 있어서의 역사란, 그리고 한 나라의 미래란 끊임없이 고뇌하는 사람들에 의해 보다 발전해 나가기 때문이다.

글라이스틴 "미, 20사단 광주투입 승인"

"존 위컴 주한 유엔군 및 한미연합군 사령관은 80년 5월 그의 작전지휘권 아래에 있는 일부 한국군을 군중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했다. 미국정부는 오키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 2대와 필리핀에 정박중인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한국 근해에 긴급 출동시켰다." (1980년 5월 22일 백악관 고위정책조정회의에서 결정)

그러나 당시 광주시민들은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흥분을 한다. 적어도 미국이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우는 광주시민의 편에 서서 모종의 조치를 취해줄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신군부에 의해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 특수부대가 결국은 미국의 위협 하에 물러날 것이라는 그런 소박한 기대와 희망에 휩싸인다. 실제 그것을 예증하듯 금남로와 도청 앞 분수대에 모여든 수만 명의 시민들은 "우리의 우방인 미국은 계엄군의 학살만행을 결코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부산 앞 바다에는 미 7함대 소속인 항공모함이 도착했다"는 말들을 주고받는다. 역시 금남로 주변의 상가 벽 곳곳에는 미국 항공모함의 부산항 입항을 알리는 크고 작은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한다.

5월 21일 오후 5시 이후부터 시 외각이 차단돼 절해의 고도 '외딴 섬'이 돼버린 광주. 이때 시민들은 광주의 참상과 진실을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뛴다. 혹여 외신기자들을 만나면 더 많은 정보를 전해주겠다는 각오로 그들을 '반가운 손님' 대하듯 접대한다. 시위가 광주시 외각 전남 일원으로 번져가기 시작한 22일. 미 국방성 팬타곤은 4개의 계엄군 부대가 광주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투입됐다고 발표한다. 바로 다음날인 23일의 경우 미 국무성 호딩 카터 대변인은 "카터 행정부는 정치적 자유가 억압 상태에 놓여있는 한국의 안녕과 질서를 회복하고자 지원을 결정했다"고 발표한다. 이 무렵 미국의 정보관계처가 파악했듯이 사실상 85% 내지는 95% 정도의 무기가 시민 측 수습대책위원회의 요구와 시민들에 의해 자체 회수된다.

그러나 도날드 N. 클라크가 1987년 보스턴에서 펴낸 <광주민중봉기(THE KWANGJU UPRISING)>라는 책자에 따르면 한국의 신군부와 계엄군들은 모종의 메시지를 어디엔가로 부터 전달받은 듯 하다. 클라크가 작성한 광주항쟁일지의 한 대목을 그대로 옮겨 본다. 다음은 5월 27일 부분. "미 국무성은 '우리는 한 주요도시 안에서 일어난 총체적 무질서와 분열상태를 불명료하게 계속되도록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라고 발표하면서 중재하는 일로 나선다. 그러나 바로 한 시간 후에 수천 명의 계엄군들이 광주를 공략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따라서 신군부는 광주를 장악한다."

5월 22일의 미국무성 성명을 다시 한번 들여다본다. "미국은 한국의 남쪽에 위치한 광주에서 일어난 소요사태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하며 이 사태와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에게 최대한의 자제와 대화를 통해서 평화적인 사태 수습방안을 모색하도록 촉구하는 바다. 불안사태가 계속돼 폭력사태가 가열된다면 외부세력이 위험한 오판을 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정부는 "현재의 한국사태를 이용하려는 어떠한 외부의 기도에 대해서도 한미상호방위조약 의무에 의거, 강력히 대처할 것임을 재강조하는 바다" 여기에서 위험한 오판을 할 외부세력은 북한을 지칭한다.

5월 23일자 <뉴욕타임스> 사설도 예의 불순세력으로 공산주의와 북한을 지칭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미국의 우려와 반공주의를 이용, 한국의 신군부는 미국 카터 행정부 암묵을 받아냈다고 판단한 나머지 오로지 민주주의를 위해 일어선 광주를 무력으로 진압해버린 것이 아닐까. 역사와 그리고 어딘가에 감춰진 진실은 그래서 이 부분을 우리에게 묻고 있는지 모른다.

제12대 개원국회에서 '5·18'에 대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던 1985년 6월초 미국 워싱턴 시내의 듀퐁 플라자호텔에서 이뤄진 80년 당시 주한 미국대사 월리엄 글라이스틴과 한국의 <신동아>의 인터뷰 한 대목을 들어본다. "광주사태는 두 가지 측면, 두 개의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사상자가 발생한 단계로서, 이 단계는 미국이 어떠한 형태로든 관련돼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가 사과할 일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한국정부 당국이 광주에 다시 군대를 투입시키는 과정입니다. 이 때는 미국이 보병20사단의 사용을 승인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개입했습니다. 미국은 끝까지 20사단 병력을 조심스럽게 사용하도록 부탁했는데 이것이 간접적인 관련이라면 관련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마크 피터슨이 글라이스틴 대사 및 한미연합사 사령관 위컴과 나눈 인터뷰를 들어본다. 마크 피터슨은 광주항쟁 당시 플브라이트 프로그램 책임자로 서울에 상주한 사람으로 역사가이기도 한데 그의「미국인과 광주사태 역사기록에 있어서도 문제점들」이란 글이 바로 이들 글라이스틴 및 위컴과 나눈 인터뷰의 결과물이다.

그의 인터뷰를 들여다보면 전두환 소장이 12·12 군사쿠데타로 정승화 총장을 불법체포, 감옥에 집어넣은 뒤 곧바로 글라이스틴과 위컴을 찾아간 대목이 나온다. 이때 전두환이 썼던 말은 1961년 박정희 소장과 함께 5·16쿠데타를 일으킨 김종필이 카터 B 맥아더를 곧바로 찾아가 했던 말과 너무나 흡사하다. "나를 믿어 주세요. 우리가 한 거사를 지켜봐 주세요. 귀하께서는 언젠가는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전두환은 광주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인 1981년 2월, 백악관으로 달려가 레이건 대통령의 영접을 받는다. 전두환의 그런 상징적인 미국 방문은 결국 많은 한국민들, 특히 광주시민들의 신경을 들쑤셔 놓는다. 그 결과 실로 6·25 한국전쟁 이후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금기사항, 즉 반미운동이 한국 내의 대학가들을 중심으로 번져나간다. 아메리카 대륙에 250만여 명의 한인동포가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한국 수출입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교역국이 미국임에도 불구하고 '양키 고우 홈!'이란 구호가 자연스럽게 혹은 아주 당연한 것처럼 터져 나온 것이다.

미, 한국내 민주주의 앞서'패권주의' 선택
▲ 美펜타곤전경. ⓒ프레시안

<1872~1982, 한국에서의 미국의 군사적 경험>이란 책자에서 주한미군 사령부는 '왜 우리는 여기 한국에 있는가' 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이 기간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가장 혹독한 시련을 받은 유신시대, 즉 잦은 긴급조치의 발동이 '대추나무 연 걸리듯이' 계속된 시절이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10·26사태'에다 전두환 신군부 일당의 '12·12쿠데타'와 저 광주의 5월이 핏빛으로 물들던 때다. 바로 이기간을 경험한 주한미군(USFK)은 그러나 자신들의 입장과 한반도에 있어서의 역할기능을 분명히 한다. 주한 미군사령부가 공고히 밝힌 '한국에서의 역할'은 이렇다. (한국에서 주한미군의 충격 : THE IMPACT OF US FORCE IN KOREA, 워싱턴D·C 국방대학 인쇄처, 1987년 간행)

예컨대 주한미군의 역할을 이렇게 내세운 것이다.

1.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소련의 팽창주의를 억제하고 소련연방과 중국의 견제정책으로부터 일본을 보호하기 위하여 동북아시아 거대국 사이의 힘의 균형을 확보하는 것.
1. 북한의 모험주의를 방지하고 북한에 대한 한국군의 과도한 군사적 행동을 견제하여 한반도에 있어서 전쟁을 단념, 방지케 하는 것.
1.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정치적 이익과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는 것.
1. 아시아 태평양지역을 방어하기 위하여 상징적인 결단력을 보여주는 것.
1. 동북아시아에서 소련의 군사력을 분산시킴으로써 유럽지역 안보와 이익에 기여하고 동북아시아 안보를 유지하는 것.
1. 한국 경제발전에 조력하며 한국군의 군사적 역량을 개발하고 남한사회의 안녕을 도모함으로써 한국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

이상의 내용에서 보듯이 미국(혹은 주한미군)은 우선적으로 미국적 시각에 기초한 '안보'를 중요시한다. 말하자면 군사적 의미의 안보를 더 높이 생각하며 실제로 역대 미국 행정부의 정책은 그것에 초점을 둔다. 80년 5월의 광주 앞뒤에 전개된 미국의 태도가 그것을 예증한다. 당시의 미국언론에 비친 미국의 그 어떤 행동반경을 들여다본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세력을 확대 재생산하던 그 무렵, 미국은 역시 한반도의 모든 정책 입안에 있어서 북한에 대한 또는 동북아시아권의 강대국인 중국과 소련 일본을 염두에 둔 나머지 예의 '안보'를 상위개념으로 올려놓는다. 말하자면 한국 내의 '인권문제 혹은 민주주의의 발전'은 안보문제 다음의 하위개념으로 놓은 것이다. 미국 내의 주요 신문의 다음의 논조가 그러하다.

"미국은 한국의 군사지도자들에게 어떤 의미 있는 압력을 가할 계획이 없다. 보복조치로 주한미군 철수위협을 할 생각도 없다. 서울과 워싱턴의 미국관리들은 안보가 제일이라고 느끼고 있으며, 남한에 간섭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이미 분단된 나라를 더욱 악화시킬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지금으로써는 어떠한 군사적 경제적 외교적 압력도 가할 계획이 없다는 것이 가장 정확한 상황분석일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 1980년 5월21일자)

"광주는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국익을 지키는 동북아시아의 안보의 문제라는 것이 미국관리들의 인식이다." (워싱턴 포스트, 1980년 6월1일자)

결과적으로 미국은 80년 5월의 한국문제를 인권과 민주주의의 차원에서라기보다는 안보제일주의의 차원에서 파악 해결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는 80년도 미국 대통령선거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한 존 앤더슨도 이미 지적했고, 일부 미국의 언론도 아주 노골적으로 당시의 카터 행정부를 질타한다.

카터 대통령은 이른바 '인권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쏟은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미국 내의 인권문제는 물론 제3세계의 인권문제를 지원하려는 자세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 때마침 대통령선거에 직면한 카터 행정부는 상대 출마자인 레이건에 비해 열세에 놓여 있는지라 한국의 '광주학살 상황'을 인권문제 차원으로 보살필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자, 그렇다면 10·26사태 이후, 특히 12·12군사쿠데타 이후 전두환 세력은 당시 미국 측과 어떤 관계를 개시하기 시작했는가. 전두환은 한미연합 사령관 위컴은 물론 당시의 주한미대사인 글라이스틴을 여러 차례 만난다. 전두환은 나름대로 자신에게 지지를 보내줄 것을 부탁한다. 80년 6월 경우, 미8군 측은 또다시 일부 한국군 그룹이 역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다. 1월에 이은 두 번째의 역쿠데타 첩보인 것이다.

내용인즉 육사 출신의 장성들을 포함한 소장파 장교그룹이 바로 그들로, '광주사태' 진압에 참여한 공수특전사 부대들이 신군부 지도부에 이용당했는데 특전사를 옹호해 주지 않고 오히려 희생양을 만들려 한다는 데서 역쿠데타를 기도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이들 역쿠데타 세력의 저항은 전두환 군부에 의해 곧 무마돼버린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위컴과 글라이스틴은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의 '위력'을 실감한다. 따라서 위컴과 글라이스틴은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아니 아마 신군부의 꼭두각시가 돼버린 최규하 대통령의 후임으로 전두환을 지목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대한 한국민들의 불만은 당연히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글라이스틴의 권유에 의해 정기적으로 기자를 만나는 과정에서, 80년 8월 위컴 장군은 두 명의 기자를 만난다. 그 기자는 AP의 테리 앤더슨(87년 레바논에서 인질로 잡혀 있기도 했다)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샘 제임슨이다. 인터뷰는 '보도 안 하는 조건(off the record)'과 '배경의 이해를 위해서만(for background only)'이라는 조건으로 진행된다.

글라이스틴과 위컴, 이 두 미국 고위지도자와 오랜 시간 인터뷰를 하여 기록으로 남긴 마크 피터슨에 따르면 위컴은 다음처럼 밝히고 있다. (도날드 N.클라크 편저, 광주봉기:THE KWANGJU UPRISING 참조) 위컴은 미 국방성 내에서 토론되고 있는 말로써 답을 한다.

"한국의 군부지도자들은 선거를 포함해 정통성 확보작업을 해나갈 것이며, 그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을 시위할 것이다. 만일에 이러한 조건이 충족된다면 미국은 아마도 새 정부를 지지할 것이다."

이 인터뷰는 특종으로 나갔으며, 곧이어 뉴욕타임스의 핸리 스코트 기자도 그것을 기반으로 전두환과 인터뷰를 한다. 그러니까 당시 합리적인 대안을 찾은 결과 위컴과 글라이스틴, 그리고 미국 고위정책입안자들은 전두환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나간 것이다. 바로 이와 함께 한국 내에서는 반미운동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위컴 장군은 끝내 충격적인 '들쥐론'을 터뜨린 것이다.

"한국인들은 들쥐(lemning)와 같다. 그들은 언제나 그들의 지도자가 누구든 무조건 줄을 착착 서서 그를 따른다. 한국인에게 민주주의는 적합한 체제는 아니다. 한국의 새 군사지도자들은 선거를 포함한 정당성 확보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며, 그들이 한국인 대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런 조건들이 갖춰지기만 한다면 미국은 틀림없이 새 정권을 지지할 것이다."

'5.18'은 한국과 미국의 살아 있는 텍스트
▲ 5.18 묘지입구 장승공원. ⓒ프레시안

해럴드 브라운 미국방장관은 5월 23일 미국이 한국에서 최고 2개월 간 작전을 수행하는 데에 충분한 전쟁물자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히고 북한에 대해 대남도발을 감행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브라운 장관은 이날 UPI통신과 단독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대한(對韓) 안보공약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만약 외부세력이 현재의 한국사태를 이용하려 할 때는 이 공약에 따라 대응할 태세임을 밝혀 왔다"고 말하고 "미국은 한국과 유럽에서 전쟁비축물자를 점진적으로 증강, 30일 내지는 60일간 정도의 매우 치열한 전쟁에 대처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80.5.23 외신종합)

토머스 레스턴 국무성대변인은 27일 "한국사태가 공공연한 폭력단계로 악화된 이후 북한측의 군사력 증강조짐은 없으나 미국은 현 사태를 군사적으로 이용하려는 북한의 기도가 있을 경우 대한방위조약의 의무에 따라 대응할 것"이라고 재확인했다.(80.5.28 워싱턴 UPI동양)

카터 미행정부는 5월 29일 국무성 각 지역 담당자 30여 명이 모여 심야회의를 열고 한국문제에 대한 대책을 중점토의한 데 이어 31일 백악관에서 국가안보회의(NSC)의 고위정책조정회의(PRC)를 열고 계속해서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의 대책을 협의할 예정인 가운데, 미 행정부 지도자들은 "미국의 대한군사지원을 감소시킨다는 것은 한국의 약화를 이용한 북한의 도발을 자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3만9000명의 주한미군을 감축하거나 대한군사원조를 삭감하는 것과 같은 조처는 없을 것"으로 미국관리들은 내다보고 있다고 전했다.(80.5.29 워싱턴 포스트)

미 국방성의 토머스 로스 대변인은 29일 현재 항모 코럴시호가 한국 근해에 도착해 있으며 곧 미드웨이호와 교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코럴시호는 인도양에서 근무를 마치고 본국 귀환 중 한국사태로 편의상 한국 근해에 머무르게 되었으며, 미드웨이호가 교대하면 한국사태를 이용한 외부의 행동에 대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미국무성의 한 소식통은 한국사태가 상당히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점을 감안,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사와 위컴 주한 유엔군사령관이 한국지도자들과 계속 접촉 중에 있다고 전했다. 주한 미국 관리는 북한으로부터의 침략을 불러올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80.5.31 워싱턴 연합)

카터 행정부는 한국이 지난 30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미국에 전략적으로 중요하며 한 세대에 걸친 미국의 대한투자를 제쳐놓고도 한국은 미국의 의지를 세계에 보여주는 상징이 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80.5.31 볼티모어 선지)

카터 미 대통령은 1일 한국군과 미군이 한국에 대한 어떠한 잠재적 침략이나 위협도 격퇴할 만큼 충분히 강력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CNN과의 회견에서 한국안보에 대한 미국의 공약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우리의 맹방이나 우방 또는 무역 상대국이 단지 우리의 인권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과 단교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소련의 영향력에 내줄 수는 없다"고 말했고, 여기에 미국무성의 한 고위 관리는 덧붙여 "오늘날 한국사태는 인권문제가 아니고 동북아시아의 안정유지를 바라는 미국의 국가이익에 관한 문제" 라고 말했다.(80.6.1 워싱턴 AFP통신)

애드먼드 머스키 미국무장관은 29일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 및 위컴 주한미군사령관과 전격회담, 한국사태를 집중 논의한 후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대한안보공약은 확고하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최근 한국사태 발전의 안보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을 논의했다.(80.6.29 UPI연합)

미군축국(美軍縮局:ACDA)은 공개된 특별 보고서를 통해 "미국은 아시아지역에서 사용하기 위해 미 본토에 배치된 미공군 군비 가운데에는 A7공격기 3개 대대, F4방공지상공격기 16개 대대, F15방공기 8개 대대, F111공습기 5개 대대, F105와일드 이글 방어진압기 1개 대대 등이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또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지상군 및 공군은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는 한국군을 보강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한방위조약 지속의 물리적 증거로서도 기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80.7.2 워싱턴연합)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은 24일 노드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래그 미육군협회가 마련한 연설을 통해 "한국은 동북아 안보의 열쇠" 라고 강조하고 한반도에 강력한 주한미군이 유지돼야 한다고 말했다.(80.7.24 워싱턴연합)

이상 다시 한번 읽어보는 80년 '5.18' 당시의 미국 행정부나 언론매체들의 시각은, 오늘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객관적인 판단을 고려해 장황하게 인용한 당시 미국 행정부와 외신들의 언급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l고 있는 미국의 태도를 엿보게 해준다. 말하자면 한국의 인권이 최악의 단계에 놓인 80년 5월 그 날, 미국의 행정부는 한국에 있어서의 신군부의 학살 만행을 심도있게 거론하기보다는 자국의 이익과 동북아시아의 안보적 측면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가 첨예한 분단상황과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있다손 치더라도 당시 미국은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와 심각성을 깊이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등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80년대 후반에 와서야 비로소 확인된 논리이지만 인권문제 자체가 안보문제이고 안보문제 자체가 인권문제라는 것을 한국에 거주하는 미 고위층 글라이스틴과 위컴이 크게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떤 나라에 인권과 민주주의가 무너지면 안보도 위협받는다는 사실을 위컴과 글라이스틴 그리고 미국의 워싱턴행정부가 제3세계와의 관계개선 속에서 '모종의 조치'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미국 역대 행정부의 전통적인 먼로주의(고립주의)와 매카시즘(반공주의)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한 글로벌시대 강자로서의 패권주의가 그들 미국 정책입안자들의 머리 속에 이른바 '아메리칸 이데올로기'로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예의 제3세계 국가의 인권문제가 하위개념으로 내려앉은 원인이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80년 '5월의 광주'는 미국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사례로 남는다. 이라크 침공 이후 '세계전략'의 야심 속에서 그네들 특유의 패권주의에 가속도가 붙은 미국, 이어 '북한핵'으로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이 일정 부분 답보상태에 빠지고 그 대북정책의 바턴을 넘겨받은 노무현 정부의 포용정책 역시 미국 주도하의 국제정세 속에서 삐걱거림을 되풀이할 때, 행여 '한반도 통일'의 의미가 퇴색돼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조바심이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찍이 그동안의 경험과 세계사의 역사를 통하여 배워왔듯이―적어도 한 나라의 역사란 고뇌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발전의 틈 혹은 '희망의 틈'이 분명히 보이고 또 그것이 현실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디지만 6·15남북공동선언을 착실하게 진행시켜나가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음일 것이다. 민족과 국토의 분단상황에서 배태되어 발생한 5·18의 비극이 <오월에서 통일로!> 연결될 때 진정한 의미의 '오월의 승리'로 거듭날 것이다.

<필자 소개>

김준태(金準泰) : 1948년 해남 출생. 1969년 [시인]지로 나옴. 시집으로 [참깨를 털면서]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국밥과 희망] [불이냐 꽃이냐] [오월에서 통일로]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통일을 꿈꾸는 슬픈 色酒歌][칼과 흙][지평선에 서서] 외. 세계문학기행집[세계문학의 거장을 만나다] 등. 전 5·18항쟁동지회장,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와 치의공사업단에서 강의하면서 한국문학포럼(서울 충무로 본부)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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