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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둔한 정부가 준비도 없이 나선 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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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둔한 정부가 준비도 없이 나선 꼴"

[한미FTA 뜯어보기 33] 美자본에 '국민경제' 넘기려나 (2)

   먼저 '산업정책'부터 회복하라
  
  현재 사람들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논의에서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두 개의 명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첫째, FTA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곧바로 '쇄국론'이 되는가?
  
  FTA 반대론은 현실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판명된 논리이고 쿠바, 북한, 미얀마 등과 같은 '자급자족형 폐쇄경제'를 내세우는 논리인가? 청와대 주변의 몇몇 인물들은 이런 의견을 거침없이 피력하고 있다. 그들은 '구한말의 '쇄국론자들'이나 '급진적 종속이론' 등을 들먹이면서 FTA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다.
  
  이런 그들의 주장은 판단의 앞뒤가 뒤섞인 것이다. 한국은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이미 세계경제에서 가장 자유화된 개방경제 중 하나다. 아직 미국과 FTA를 체결하지 않았다고 해서 현재의 한국을 흥선대원군 치하의 쇄국 상태에 있다거나 아바나 항을 일시 봉쇄했던 카스트로 혁명정권 하의 쿠바와 같다고 할 수 있는가?
  
  따라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이미 이렇게까지 개방돼 있는 한국경제가 굳이 미국과 FTA까지 체결해 개방의 수위를 높일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이런 주장을 입증할만한 근거가 지금처럼 변변치 못한 상태가 유지되는 한 FTA '신중론자'들이 '쇄국론자'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각종 FTA '찬미론자'들이야말로 '외세 추종의 선동자'라고 보는 것이 훨씬 논리적이다.
  
  둘째, FTA가 수치로 측량되는 이익을 보아 그 수치적 크기를 비교하여 판단할 문제인가?
  
  앞에서 살펴본 '국민경제'의 관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GDP 성장률이 연간 10%씩 늘어난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분명히 더 큰 이익을 보는 부분과 오히려 힘든 지경으로 밀려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겨나는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에 대한 대답도 없이 성장률 10%라는 수치만 내세우면서 FTA는 '국익'이며 이에 반대하는 자들이 모두 집단이기주의자라고 몰아붙이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집단이기주의 세력'이다.
  
  FTA는 결코 단순한 수치상의 이익과 손해라는 허구적인 개념을 준거로 하여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그 온전한 판단의 준거는 FTA를 통하여 우리 사회와 경제 전체가 어떠한 모습이 될 것이며, 어떠한 미래의 경로를 밟아나가게 되는가,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 '국민경제'의 미래 모습은 무엇인가라는, 실로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비전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미국, 일본, 중국 중 어느 나라와 먼저 FTA를 할 것인가도 아니요, 또 FTA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도 아니다. 지금 우리가 먼저 확고하게 대답해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국민들 모두에게 '문화국민으로서의 물질적, 정신적 삶'을 보장할 수미일관한 산업정책이 존재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준비와 그에 입각한 장기적, 단기적 계획이 먼저 마련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어떤 특정 국가나 지역과 FTA를 체결하는 것이 어느 만큼의 득과 실을 가져올 것인가를 놓고 주체적이면서도 종합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최근 들어 한국 경제의 미래상으로 '지식기반 경제'라는 화두가 제시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연구보고서에도, 또 얼마 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열독했다는 정부출연 연구소들의 합동 보고서에도 지식기반 경제로의 전환이 한국 경제의 미래 모습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물론 그것이 세계경제의 기술적 환경변화에 주체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면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농업이나 제조업 등 각 부문이 함께 살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여 낸 해답을 덧붙일 수 있다면, 지식기반 경제론도 한국 경제의 미래를 위한 산업정책 논의에 훌륭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그런데 FTA를 둘러싼 현재의 논의에 이런 화두와 문제의식은 어떻게 연결되고 있나? 아니 연결이 되고 있기는 한가? '지식기반 경제로의 전환'이라는 장기적인 과제를 달성하는 데 있어서 한미 FTA나 한중 FTA, 한일 FTA가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설명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청사진도 없이 서둘러서야
  
  지금의 FTA 논의는 하도 막무가내로 진행되고 있으니, 필자가 좀 점잖치 못한 비유를 들어도 용납될 여지가 있을 줄 안다.
  
  당구장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으로 "대충 치고 쫑 본다"는 말이 있다. 이는 마땅한 타법이 보이지 않을 경우에 그냥 아무렇게나 치고 난 뒤 당구공들끼리 '쫑(kiss)'하게 되기를 기다리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결국 요행수에 결과를 맡기는 행위인 셈이다. 사실 자기 순서가 돌아오면 어쨌든 한 번은 큣대를 놀리지 않을 수 없는 당구와 같은 게임의 상황에서는 "대충 치고 쫑 본다"가 훌륭한 정책이 된다. 그런 요행수가 벌어져 주면 너무나 좋은 일이며, 설령 그런 요행수가 벌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야말로 밑져야 본전이다.
  
  지금 한국경제는 급변하는 세계경제와 동아시아 경제에서 새로운 활로와 모델을 모색해야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양극화와 저성장의 늪에 갇힌 우리는 지금, 국민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으면서도 경제 전체도 성장하고 이웃 나라도 최대한 함께 번영하게 하는 국민경제를 구상하고 그것을 구체화시킬 산업정책은 어떤 것이 돼야 하는지를 놓고 사생결단의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심각한 순간에 와있다.
  
  그런데 산업정책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그저 몇 개의 수치와 시뮬레이션(그나마 숱한 논란에 휩싸인 시뮬레이션)을 내세워서 몇 퍼센트의 GDP 성장이라는 등의 막연한 가능성만을 이야기하면 되겠는가? 그 정도의 알량한 논거를 내밀면서 멋대로 미국, 중국, 일본 중에 하나를 골라 무조건 FTA를 맺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한미 FTA는 우리의 국민경제에 근본적 지각변동을 가져올 '대모험' 아닌가? '시장의 조정'에 의해 산업정책의 대상이 돼야 할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과 생각은 "대충 치고 쫑 보자"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FTA와 당구 게임이 다른 점도 있긴 하다. 당구 선수들과 달리 FTA에서는 만약 제대로 준비된 청사진이 없다면 정부가 굳이 '큣대'를 휘둘러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현 정권은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큣대'를 휘두르려고 한다. 노무현 정권이 재임 기간의 주요 치적의 하나로 한미 FTA를 남기기 위해 서두르고 있다는 소문이 맞는 것인가?
  
  이 글의 결론을 이렇게 내리자. 현재의 준비 정도라면 FTA 따위는 잊어버리고 그야말로 "경제를 내버려두자(laissez-faire)".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이념을 신봉하는 이들이라면 "준비되지 않은 우둔한 정부가 경제에 끼어드는 것보다 더 큰 재난은 없다"는 존 스튜어트 밀의 지혜로운 경구를 되새기는 게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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