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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상대의 불리한 조건을 떠안아주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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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협상상대의 불리한 조건을 떠안아주다니…"

[한미FTA 뜯어보기 18] 협상의 원리에 비춰보면 (1)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도 하나의 협상이다. 협상은 기본적으로 양보할 수 있는 카드를 숨기면서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하나하나 교환하는 거래를 통해 결국은 유리한 최종결과를 도출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협상에서 힘센 자가 대체로 유리한 것이 사실이나, 약자도 나름대로 구사할 수 있는 협상전략이 있다.

그러나 한미 FTA 협상에서 우리 정부는 본협상은커녕 예비협상 단계에서는 물론 예비협상 이전의 사전 비공식 협의 단계에서 이미 협상의 상대방인 미국 정부에 우리가 가진 카드를 다 내보이고 양보할 것을 미리 다 양보해버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협상의 원리에 비추어 본 한미 FTA 협상의 현주소와 앞으로의 협상 방향에 관한 권태욱 뉴질랜드 변호사의 기고문을 3회에 걸쳐 나눠 싣는다. <편집자>

협상은 합의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다. 개인 간의 거래도 합의에 의해 이뤄지고 국가 간의 조약도 합의에 의해 체결된다. 을사조약이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 조약 같은 것을 빼고는 그렇다. 합의에는 유리한 합의가 있고, 불리한 합의가 있다.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합의의 당사자가 불리한 합의를 체결할 경우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불리한 합의가 체결되는 경우가 빈번히 일어난다. 이런 일은 대부분 합의를 하는 당사자나 그의 대리인이 정보가 부족하거나 협상기술이 빈약하기 때문에 생긴다.

의류 소매상은 이른 새벽 동대문 시장에서 싼 가격에 물품을 구입한다. 일 년에 한두 번 옷을 살까 말까 한 일반 소비자는 밤잠을 설치며 동대문시장에 가더라도 소매상들만큼 좋은 가격에 물건을 구입할 수 없다. 도매상은 첫눈에 그 사람이 소매상인지 개인소비자인지 알아보고, 부르는 가격부터 달리 매긴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비싼 줄은 알지만 협상의 여지가 없는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산다.

***한국이 미국과 맞짱을 뜬다?**

합의에는 시장에서 물건을 사거나 기업을 인수하는 것과 같은 일회성 실천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있고, 물품공급 계약이나 국제조례처럼 그 이후에 일어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관장하는 것이 있다. 이런 것은 한번 합의를 하면 나중에 그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계속 준수해야 한다. 만약 파기를 하면 더 큰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조항이 합의서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국제조약 같은 합의는 합의를 체결할 당시의 정부에 대해서만 구속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해서 그 합의를 지켜야 한다. 노태우 정부에서 합의한 용산 미군기지 이전비용의 한국 부담 조항을 정권이 세 번이나 바뀐 다음인 노무현 정부에서 국민의 욕을 얻어 먹어가며 지켜야 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무기한 협정이다. 한번 체결하면 자자손손 대대로 지켜야 한다. 몇 년 해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취소하거나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 간이나 기업 간의 비즈니스 계약이나 국가 간의 자유무역협정이나 서로 줄 것과 받을 것이 있으니 체결한다. 모든 합의가 그렇듯이 서로 간에 내가 주는 것만큼, 아니면 그 이상 받았다고 생각을 하니까 합의서에 서명을 하고 이행을 약속한다. 나는 아무 것도 주지 않고 상대방으로부터 내가 원하는 것은 모두 받아내는 합의에 도달한다면 협상 당사자로서는 그 이상 좋은 것이 없다.

신년벽두 산상회담에서 구체적인 것은 아무 것도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고서 한나라당의 등원을 이끌어내 대통령의 칭찬을 받은 열린우리당의 김한길 원내대표의 경우가 그렇다. 대통령이 김한길 원내대표를 칭찬했다는 기사를 읽은 이재오 원내대표나 찬바람 맞아가며 엄동설한에 길바닥을 헤맸던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의 기분은 그렇게 좋지 못했을 것이다. 열린우리당으로 보면 잘 된 합의였고, 한나라당으로 보면 만족을 주는 합의가 아니었다. 그래도 일단 합의를 했으니 지켜야 한다. 이처럼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정치적 합의도 일단 대표로 나선 사람이 약속을 했으면 불만인 사람도 따라가야 한다.

국제협약은 이보다 훨씬 강한 구속력을 가진다. 일단 합의를 하고 나면 지금의 정부와 국민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들이 세세토록 그 약속에 묶여 지내야 한다. 이처럼 중차대한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을 우리나라 정부가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미국과 한번 맞짱을 뜨겠다는 것이다. 경제력이나 다른 것은 제쳐두고 순전히 협상능력 하나만 놓고 한번 들여다보자. 우리가 이번에 미국과 맞짱을 떠서 이기거나 비길 실력이 되는지, 아니면 지난 10년 간 외환위기, 카드대란을 극복하느라고 허리띠 졸라매며 겨우겨우 모아놓은 알토란같은 경제를 한 입에 먹으라고 미국 앞에 갖다 바치는 것은 아닌지를 한번 살펴보자.

***미국이 한국의 FTA 협상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한국은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스크린쿼터 축소, 안전이 의심스러운 미국 쇠고기 수입 재개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런 것들은 협상을 하는 전제조건이 아니었다고 정부에서는 우긴다. 잘 버티며 지켜 온 것을 협상개시 선언을 며칠 앞두고 급작스럽게 포기하고서는 아무런 관련이 없단다.

협상의 한국 측 대표인 김현종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의 주장에 의하면 이번 협상은 한국이 '간청'해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그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요청한 25개 국가 중에서 한국이 '간택'되었다는 것을 사뭇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간택이 됐으니, 스크린쿼터 축소 따위는 간택해준 데 대한 감사의 선물일 뿐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 모양이다.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서 그 정도를 양보했으니 협상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큰 양보를 하게 될까? 아니나 다를까, 미국 무역대표부의 포트먼 대표가 의회에 제출한, 미국이 협상에서 관철하겠다는 안건 목록을 보면 이번에 미국이 얼마나 큰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 대강 가늠이 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농민과 영화인들에게는 좀 피해가 있을지 몰라도 우리나라 국민을 먹여 살리는 기관차인 첨단산업과 수출산업에는 혜택이 돌아오고, 그런 혜택이 일부의 피해를 보상하고도 훨씬 남을 정도라서 국가 전체로 보면 이익이라는 믿음이 우리 국민들 사이에도 일부 퍼져 있다. 실제로 미국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 요구조건들이 수용되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한국에 쌀 몇 가마 더 팔아먹겠다고 미국이 25개 국가 중 한국을 택해서 협상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미국이 이번 협정을 통해 노리는 것은 한국경제의 견인차가 되는 알토란 같은 기업체들의 심장에 파이프를 꽂아 놓고 우리나라 기업가, 엔지니어, 세일즈맨들이 소련과 중국, 그리고 제3세계에서 벌어들인 돈을 그대로 다시 빨아갈 장치를 마련하는 데에 있다.

미국이 이번 협정을 통해 성취하려고 하는 목표는 포트먼 무역대표가 미국 의회에 보낸 편지에 나열돼 있다. 모두 15개 분야에 걸쳐 43개 항목이 열거되어 있다. 그 중에는 한국의 섬유의류 시장에의 접근을 보장받고, 정부와 기업의 유착관계를 근절하는 처방을 하도록 하고, 한국 정부의 지적재산권 보호를 미국의 기준에 맞추도록 하고, 미국의 수출업체나 투자자가 한국의 시장에 접근하는 데 대해 차별하는 정책을 취하지 못하도록 하고, 통상 및 투자와 관련된 정책을 시행하기 전에 미국에 통지를 하도록 미국이 간섭할 수 있도록 하고, 국영 혹은 공영 기업체의 독점적 사업활동에 대해 제재를 가하도록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또한 정부공사를 수주하거나 정부에 납품하는 일에도 미국 기업체들이 국내 기업과 대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조항도 눈에 띈다. 미국의 소프트웨어(영화나 음악, 컴퓨터 프로그램 등)를 한국에 수출할 때 무는 관세는 그 소프트웨어의 가격이 아니라 그 소프트웨어를 담은 용기의 가격을 기준으로 하도록 하겠다는 조항도 있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차세대 윈도가 미화 100달러로 한국에 수입된다고 할 때 한국의 관세는 그 프로그램의 가격인 100달러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프로그램을 담고 있는 CD의 가격, 즉 공CD의 가격인 50센트에 대해서만 물리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 편지에서 포트먼 무역대표는 미국의 기업들이 한국의 정부와 기업 사이의 밀접한 상호작용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번 협상에서 이 문제도 다룰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단순히 한국에 농산물 수출만 늘리겠다고 미국이 이런 협정의 체결을 위한 협상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한국의 모든 산업 분야에 미국 기업이 숟가락을 들고 덤비고, 한국의 모든 경제정책에 간섭할 기틀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기업체를 경영하는 분들은 포트먼 무역대표의 편지 전문을 읽어보고 과연 자기 기업체에는 피해가 없을 것인가를 먼저 확인하고 난 뒤에 정부에서 시행하는 찬반 여론조사에 대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미국의 의도가 제대로 알려지면 한국 기업인들 중에서 이 협정 체결에 찬성하던 분들이 대부분 반대로 돌아설 것 같다. 삼성그룹에서는 포트먼이 협정을 통해 한국시장에 진출시킬 주력 품목으로 반도체를 꼽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자체 경제연구소도 두고 있는 한국 최대의 그룹이니만큼 그 정도는 이미 알고도 자신이 있으니까 찬성을 했겠지 하고 믿고 싶지만.

***한국경제의 사활이 신속한 FTA 체결에 걸려 있다?**

언론매체를 통해 접하는 한국경제의 현실은 밝다. 정부 쪽 발표에 따르면 아주 밝다. 미국 달러화 가치의 하락 덕분이기는 하지만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돌파했고, 다음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들은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앞당기는 데 자기가 적임자라고 다투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IMF 때보다 힘들다고 투덜대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꽤 컸는데 이제는 귀를 쫑긋 세워도 그런 목소리를 들어보기가 힘들다. 부동산 가격과 양극화가 문제라고 화제가 바뀌었다. 양극화라는 것은 잘사는 사람들과 못사는 사람들의 차이가 늘어났다는 것이지, 못사는 사람들의 숫자가 더 늘어났다거나 그 사람들의 절대 소득이 줄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경제 전체로는 좋아졌고 앞으로도 더 좋아질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특히 정부 쪽 사람들은 목에 힘을 주면서 이야기한다. 그들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한미 FTA가 성공적으로 체결되면'이라는 단서를 붙이지 않는다. 한미 FTA가 체결되든 안 되든 경제는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작년 말까지, 아니 올해 초까지만 하더라도 정부에서 경제전망을 이야기할 때 한미 FTA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갑자기 이 조약에 한국경제의 사활이 걸린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대통령은 "저항이나 반대 때문에 조약 체결이 좌절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국민들을 향해 으름장을 놓고 있다. 국민이 반대하더라도 이 협정을 체결할 뿐 아니라 신속하게 체결하겠다고 말한다. 왜 신속하게 체결해야 하는 것일까?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경제가 지금 당장 한미 FTA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신속하게, 국민이 반대하거나 저항하더라도 체결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 2월 2일 워싱턴에서 있었던 한미 FTA 협상 개시 선언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담겨 있다. 거기서 미국 측 대표인 포트먼 무역대표는 이 협상이 금년 말까지 마무리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선언했다. 이에 한국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자기는 미국과 바레인의 협상을 모델로 삼는다고 말했다. 미국과 바레인은 두 차례의 협상 뒤에 협정에 조인했다. 3월 6일의 서울 예비협상에서 금년 말까지의 협상일정만 정한 것도 이런 그의 발언을 뒷받침한다. 비록 김종훈 한국 측 수석대표는 회담 뒤 기자의 질문에 금년 말까지 회담을 하고 그 다음에 내년도 일정을 정하겠다고 연막을 쳤지만, 김현종 본부장과 미국의 포트먼 무역대표 사이에는 금년 중으로 회담을 끝낸다는 묵계가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우리 정부는 늦어도 내년 3월까지는 협정에 조인해야 한다고 수차례 이야기했다. 이는 내년 3월까지 꽉 채우고 협정에 조인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되도록 빨리 체결하되 늦어도 내년 3월에는 체결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금년 말까지도 가지 않을지 모른다. 김현종 본부장의 워싱턴 발언대로 된다면 두 번째 본 회담 날짜로 잡힌 7월 10~14일에, 아니면 이 회담은 서울에서 열리니까 국내의 반대와 저항에서 멀리 떨어진 워싱턴에서 9월에 열릴 3차 회담에서 서명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무슨 내용이 협상 안건에 포함되어 있는지, 서로 무엇을 요구하고 무엇을 양보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의견을 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내년 3월까지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금년 7월 혹은 9월이면 이미 끝나버릴 수도 있다.

미국 무역대표부는 한국보다 훨씬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은 한국과의 협정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은 훨씬 적은 인원으로 동시다발적 협상을 추진하겠다고 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발상이 가능할까? 하나의 해답은 김현종 본부장이 협정 체결을 기존의 문서에 이름과 숫자만 바꾸면 되는, 변호사 업무 정도의 일로 파악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주니어 변호사들은 합의된 내용을 가지고 회사나 도서관에 있는 모델 계약서를 이용해서 이름과 자구를 고쳐주고 돈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런 일은 한꺼번에 열 개든 스무 개든 상관없다. 좋은 전례만 있으면 된다. 한미 FTA의 경우에는 이미 미국에서 개발해 놓은 모델 계약서도 있고, 한국에도 이미 체결한 협정서가 몇 개 있다. 거기에 이름과 숫자 몇 개만 바꾸는 일로 협상을 파악한다면 별로 시간이 걸릴 일도 어려울 일도 없다. 고칠 내용은 이미 미국에서 다 정해 두었고, 양보는 없을 것이라는 다짐을 이미 하고 협상을 시작했다면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협상개시 선언에서 양측 대표가 한 발언에는 이런 짐작을 뒷받침해줄 만한 언급이 있다. 포트먼은 "김 본부장이 어려운 결정을 내릴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했고, 이 발언에 대해 김 본부장은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지도 않았고, 미국이 그에 상응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줄 것으로 기대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두 사람은 그 선언이 있기 전에 8개월 동안 긴밀히 대화를 나눠 온 사이다.

***우리 정부는 왜 이렇게 서두르나?**

미국 의회가 자국 대통령에게 위임한 자유무역협정 협상의 전권, 즉 신속협상권(TPA, Trade Promotion Authority)이 내년 6월로 끝나기 때문에 그 전에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정부가 말하는 협상을 서두르는 이유다. 체결된 협정이 미국 의회의 비준을 받는 기간이 필요하므로 내년 3월까지는 협정에 서명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협상에서는 상대가 시간에 쫓기도록 만드는 것도 하나의 수법이다. 다음은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다.

"미국 은행과 합병 협상을 할 일본 은행의 대표단이 미국에 도착했다. 넉넉하게 협상일정을 잡고서. 그들을 영접한 미국 대표단에서는 일단 숙소로 안내를 하고는 지나가는 말처럼 돌아가는 비행기 날짜를 물었다. 일본 측에서는 별다른 의심 없이 순순히 일러줬다. 그 다음날부터 미국 측에서는 일본 대표단을 이곳저곳 관광지로 데리고 다니며 융숭한 대접을 베푼다. 이렇게 대접하는 것만 며칠, 전혀 협상을 시작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일본 대표단이 물어도 시간이 넉넉한데 뭘 쪼잔하게 그러느냐는 식의 반응만 보이고 계속 융숭한 접대만 한다. 마침내 돌아가기로 비행기를 예약한 날 아침, 미국 측에서 협상을 하자고 테이블에 앉았다. 돌아가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합의를 하지 않고 돌아가서 내내 대접만 받다가 왔다고 할 수는 없지, 시간에 쫓기는 처지가 된 일본 대표단은 어쨌든 그 날 비행기가 떠나기 전까지 합의서에 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는 미국 측이 제시하는 조건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방적인 합의서였다."

우리 정부에서는 미국 대통령이 신속협상권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미국 의회의 간섭을 받지 않고 협상을 진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미국 대표가 양보를 하기가 쉬울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미국 무역대표부의 포트먼 무역대표가 협상개시를 하원에 통지한 편지에는 한국과의 협상 진행과정에서 하원과 긴밀히 협조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세 번이나 씌어 있다. 무역대표부가 작년 9월에 한국과의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하원의 협상감독 그룹과 사전검토 작업도 벌였고, 이 그룹에 속하지 않는 의원들과도 충분한 의견교환을 했다는 이야기도 편지에 적혀 있다.

우리 정부의 이야기만 듣고 받게 되는 인상은 미국 의회가 협상과정에서 배제되고 나중에 체결된 협상문을 놓고 찬반투표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편지에 씌어진 포트먼 무역대표의 이야기는 전혀 다르지 않은가? 이미 협상개시 선언을 하기까지 미국 의회와 심도 있는 토론을 했고, 앞으로의 과정에서도 긴밀하게 의논을 할 것이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미국 대통령이 신속협상권을 가졌든 아니든 실제 진행과정에서 무슨 차이가 있는가?

미국 대통령에게 부여된 신속협상권에 마감시한이 있다는 사실은 미국 협상대표단에게 불리한 여건이다. 그 전에 어떻게라도 실적을 하나 올려야 한다는 부담을 주는 것이니까.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이 요소가 거꾸로 한국이 협상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되어 있다.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을 상대방이 떠안도록 덮어씌우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대단한 협상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포트먼 무역대표에 대해 "적이지만 대단하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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