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은 공정위의 두 축인 재벌규제정책과 경쟁정책 중 재벌규제정책은 '공정위가 맡을 역할이 아니다'라는 지론을 펴 온 인물이다.
***시민단체들 "대안 없이 재벌정책 무력화될 우려"**
이 때문에 공정위 내부에서 재벌규제정책을 담당해 온 업무가 크게 위축될 것이라는 전망이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특히 신임 공정위원장 인선 기준에 대해 "재벌정책에 대한 개혁성"을 가장 강조해 온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과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경쟁정책 전문가인 권오승 서울대 교수가 공정위원장에 임명되자 "출자총액제한제도 등 재벌규제 정책들이 대폭 완화 또는 폐지될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경실련 정책위원장을 맡고 있는 홍종학 경원대 교수는 "공정거래법의 정식 명칭이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라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질적인 두 종류의 법이 하나로 묶인 것"이라면서 "그동안 공정위의 정책 집행은 재벌정책을 의미하는 독점규제 정책에 치중해 왔는데, 이 점에서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권 위원장이 공정위의 주된 역할을 경쟁정책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변화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지만, 대안도 없이 재벌 정책이 무력화되면 안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상조 교수 "현정부의 재벌정책 후퇴 메시지"**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소장을 맡고 있는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이번 인사에 정치적인 배경이 깔린 것으로 분석했다. 김 교수는 "권 위원장은 학계에서 재벌정책에 대해서는 자기 목소리를 낸 적이 거의 없는 인물"이라면서 "권 교수를 공정위원장에 기용한 것은 현 정부가 재벌규제 정책에 관해서는 더 이상 드라이브를 걸지 않겠다는 의중을 담은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권 위원장이 재벌정책이 필요없다는 입장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지만, 재벌정책은 공정위가 담당할 일은 아니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면서 "이같은 소극적인 입장에서 관료 경험도 없는 학자 출신의 위원장이 외풍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는 기대하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만 권 위원장은 공정위의 또다른 축인 경쟁정책에 대해서는 뚜렷한 소신을 밝혀 왔기 때문에 이 부문에서는 긍정적"이라고 덧붙였다.
***권오승 위원장 "재벌규제는 정치적 사안, 독점규제와 달라"**
실제로 권 위원장은 2002년 〈자유경쟁과 공정거래〉라는 저서를 통해 "재벌에 의한 경제력 집중은 고도로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를 독점규제법에서 규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면서 "공정위가 재벌에 의한 경제력 집중의 문제를 다루게 되면 정치적인 영향을 벗어날 수가 없는데, 이는 정치권력에서 독립해 경쟁질서를 바로잡아야 할 공정거래위원회 본연의 업무수행을 곤란하게 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상조 교수도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에서 '반독점법'이라는 것은 개별시장으로 좁게 규정된 특정 시장에서의 독점 규제를 의미하며, 다른 업종까지 걸쳐 경제력 집중이 우려되는 재벌체제가 존재할 수 없는 사회적 장벽 때문에 관련 규정 자체가 없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 공정거래법에는 8~25조에 재벌규제 조항이 들어 있다는 것은 선진국의 법 체계로 볼 때 이질적인 것은 사실"이라면서 "이는 시장경쟁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는 반독점과는 다른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권 위원장 체제에서는 재벌규제 정책 업무 축소에 따라 조직개편도 이뤄지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전임 강철규 위원장도 임기 내내 재벌규제 정책에 치중했지만 임기 말에는 독과점과 담합 등 시장경쟁질서를 바로잡는 경쟁정책에 무게를 둔 조직개편을 이미 해두었기 때문에 권 위원장이 1~2년 내에 특별히 조직개편을 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동규 공정위 경쟁정책본부장도 "과거 재벌규제 정책을 전담했던 독점국이 지난 연말 폐지되고 본부-팀제로 전환되면서 경쟁정책본부 내의 기업집단팀으로 축소됐다"면서 "향후 이 팀의 운용도 시장경쟁을 촉진하는 역할에 치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권오승 위원장 "경쟁정책을 위한 감사원 수준의 독립기구화"**
권오승 위원장은 앞서 16일 취임식이 끝난 뒤 기자간담회에서 국무총리 산하기관인 공정위에서 경쟁정책을 위한 독립기구 성격을 분명히 하겠다는 소신을 피력했다.
권 위원장은 "공정위의 위상을 감사원 수준으로 높이겠다"면서 공정위가 역점을 둬야 할 분야로 개별시장의 경쟁을 제한하는 독과점 문제, 경쟁제한적 기업결합, 담합행위를 꼽았다.
그는 또 "갈수록 복잡해지는 경쟁관련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서 공정위 비상임위원(4명)을 상임화할 필요가 있다"면서 "특히 피해 당사자가 공정위를 거치지 않고 법원에 바로 소송을 낼 수 있도록 하는 '사소(私訴)제도'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검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권 위원장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공정거래법 집행의 90% 이상을 공정위가 담당하는 반면 미국은 90% 이상을 사소제도로 해결한다"고 덧붙였다.
반면 권 위원장은 논란을 빚고 있는 출자총액제한제도에 대해서는 "재벌의 순환출자가 나쁘다고 해서 그걸 막는 수단으로 출총제가 가장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당장 없애기는 어렵다"면서 "일단은 올해 말까지인 3개년 로드맵대로 가면서 실증적인 분석을 병행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김상조 교수는 "공정거래법의 운명은 공정위 내부보다는 정치권과 경제정책 총괄부서인 재경부의 손에 달려 있다"면서 "권 위원장이 재벌에 대한 기존의 규제장치를 존중한다고 해도 변화에 대한 압력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참여연대 "출총제 폐지 대비 사후적 규제 장치 입법청원 준비 중"**
김 교수는 "사전적 규제 성격이 강한 재벌정책이 사후적인 규제 체제로 변화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같은 대안 장치도 마련하지 않고 서둘러 출총제 등이 폐지되는 것에는 강력히 반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김 교수는 "기업집단에 관한 공정거래법상의 규율은 출자총액 제한, 의결권 제한 같은 사전적 규제인데다 갖가지 예외 조항 탓에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며 "사전적으로 의무를 부여해놓고 이행하지 않을 경우 사후적으로 책임을 묻는 회사법적 규율을 마련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대안으로서 '이중대표소송'과 '회사기회 편취 금지'를 상법에 도입하는 것을 제시했다. 이중대표소송은 자회사(또는 종속회사)가 이사의 책임을 제대로 추궁하지 않을 경우 모회사(또는 지배회사)의 주주가 자회사 이사를 상대로 대표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다.
또 회사기회 편취 금지는 회사의 유망한 사업기회가 있을 때 이를 회사에 귀속시켜야 함에도 대주주 등 특정인의 이익으로 돌리는 행위를 막는 규정이다.
김 교수는 "그동안 참여연대가 중심이 된 소액주주운동은 개별 기업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면서"이중대표소송이 기업지배구조와 관련된 사안이라면, 회사기회 편취 금지는 경영권 승계와 관련된 것이어서 목표는 조금 다르지만 둘 다 기업과 기업 사이의 관계(기업집단)에서 발생하는 행태를 대상으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중대표소송과 회사기회 편취 금지를 상법에 도입하기 위해 참여연대는 입법청원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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