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년여 동안 거의 매일 TV의 뉴스와 정치 토론 프로그램에 등장해 달변을 과시하던 볼프강 클레멘트 전 독일 경제부 장관이 한국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적녹연정' 1기(1998~2002)에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지사를 역임하며 사회민주당(SPD)의 핵심 역할을 했고, 연정 2기(2002~2005)가 되면서 기존의 노동부와 경제부를 통합시켜 탄생한-이른바 '슈퍼부처(Super-Ministerium)'로 불리던-경제노동부 장관으로 임명돼 정권이 중도 하차하는 약 3년 반 동안 전후 유례없는 강한 개혁 드라이브를 추진력 있게 밀고 나갔다.
***클레멘트식 개혁, 뒤늦게 빛 보나?**
'아젠다 2010'으로 불리는 적녹연정 2기의 이 개혁 프로그램은 대규모의 복지 축소와 노동시장 규제 완화 등의 내용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개혁안을 당시 슈뢰더 총리의 후원 하에 스스로 총대를 메고 저돌적으로 추진한 장본인이 클레멘트다. 그는 좌우로부터 '개혁의 과잉'과 '개혁의 부족'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고집스럽고 일관되게 자신의 정책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간 인물로 국민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러한 개혁의 내용적인 적실성이나 그 진정한 성공 여부에 대한 판단은 여전히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 프로그램의 실행 결과 클레멘트가 속한 사민당은 창당 이후 100여 년 만에 가장 큰 정체성 위기를 경험했다. 급기야 일부 그룹이 신좌파정당(WASG)으로 분당하는 사태가 발생했으며, 적녹연정 집권 정부 자체가 끝내 종언을 고하게 된 비운의 정치적 사태도 나타났다. 클레멘트도 자신의 개혁 프로그램의 성공을 권좌에서 누려 보지 못한 채 아쉽게도 지난해 11월 정권 교체로 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다만 지난 조기 총선 결과로 태어난 지금의 '흑적 대연정'이 아젠다 2010 프로그램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면서 계속해서 추진한다는 내용을 담은 '연정의정서'를 체결하고 개혁정책을 꾸려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다소 위안이 될 것 같다. 장관 클레멘트도, 그의 정치적 배경이던 적녹연정이 사라졌지만, 그가 3년여 동안 소리 높여 일관되게 외쳤던 '정책'만은 살아서 차기 정부의 집권 프로그램의 기저에서 꿈틀대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근래에 들어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나 〈파이낸셜 타임스〉 등 소위 보수 경제지들이 독일 경제의 부활을 노래하고 있고, 그 핵심적인 요인으로 아젠다 2010의 '약발'이 통했다는 식의 진단을 내 놓고 있는 상황이니, 아마도 클레멘트는 험난했던 지난 시간이 드디어 자신에게 보람 있는 선물로 되돌아오는 모습을 권좌 밖에서나마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독일병'과 '한국병', 전혀 다르다**
현 시점에서 한국의 경제단체가 그를 초청한 뒷배경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세계화 시대 경제체제의 체질 개혁을 추구해야 하는 전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클레멘트의 지난 3년 반 동안의 무용담은 '귀 기울일 만한 이야기'로 비쳐질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번에 한국의 주요 언론들도 "국민 복지 혜택 줄여서라도 경제 활성화해야"라든지 "기업 규제 풀었더니 경제 살아나더군요"라는 표제를 달고, 그의 한국 방문을 보도했다. 보도 내용을 보니 대체로 규제 완화, 노동시장 유연화, 복지 축소 등 (신자유주의 개혁의 방향성을 담은) 클레멘트의 개혁 내용이 마치 한국 경제를 위해서도 금과옥조의 처방인 양 은근히 선전하는 논조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과연 복지 축소와 기업 규제 완화 등의 정책 내용이 그에게서 배울 핵심적인 교훈일까? 필자는 클레멘트식 '개혁 처방'의 성분을 논하기 전에 먼저 그가 치료한 '병의 성격'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독일병'과 '한국병'의 성격은 같은가?" 간단히 말해, 독일병의 실체가 과잉 복지에 있었다면, 한국병의 실체는 복지 결핍에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진데, 두 병을 치료하는 처방이 같다면 분명 잘못된 효과를 낼 것임에 틀림없다.
독일이 현재의 풍요에도 불구하고 안정과 정체 속에서 혹자의 표현대로 '서서히 무너져 가는' 사회였다면, 한국은 사회복지의 결핍을 개인의 근면과 공동체의 활력을 통해 보완해 온 사회였다. 이미 국민경제의 암묵적인 전제로 자리 잡은 고도성장의 신화를 유지하기 위해 여전히 국민 모두가 사회복지의 결핍을 감내하면서 쉬지 않고 뛰도록 강요받으면서도 그 결과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격차가 오히려 더욱 심화되는 양극화의 모순을 겪고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는 늘 분배보다는 성장이 우선시 되는 관행이 하나의 익숙한 경로로 자리 잡혀 있다.
***한국, 클레멘트식과는 다른 길이 필요하다**
'병의 성격'이 다르다면 '약의 성분'도 달라야 한다. 클레멘트가 독일병을 치유하기 위해 처방한 약을 그대로 들고 와 한국병을 치유하겠다고 한다면 전혀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병세가 악화될지 모른다. 사회복지 선진국 독일이 클레멘트식 개혁을 통해 정체를 딛고 활력을 찾고자 노력 중이라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회복지 최하위국 한국은 이제는 분배와 복지를 통해 국민들이 안정의 맛을 조금이나마 누려 볼 때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클레멘트가 감행한 '국가주도'의 '신자유주의화'는 분명 독일의 상황에서 형식과 내용상으로 모두 익숙하지 않은 정치였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의 개혁은 엄청난 정치적 저항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흔들림 없이 개혁의 키를 쥐고 나아갔다. 그것은 지난 10년여 동안 거의 정체 상태에 빠진 유럽경제의 덩치 큰 거인 독일을 회생시켜 내기 위한 일종의 '경로수정(path-correction)'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소위 '독일병'의 치유를 위해서 객관적으로 그 필요성이 명약관화했음에도 그 동안 이익 당사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추진하지 못한 개혁을 그는 과감히 실행했다.
그가 등장한 시점이 독일에서 1990년대 말 노사정 간의 '사회협약'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슈뢰더 정부가 정치적 '해결사'를 필요로 했던 때였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만일 협약정치가 성공했다면, 아마도 슈퍼 부처도, 클레멘트의 악역도 굳이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요, 독일은 대등적 합의주의의 전통을 살려 세계화에 성공적으로 안착해 가는 나라로 꼽히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결국 클레멘트를 택했고, 그의 과단성 있는 경로수정은 비록 적녹연정의 몰락을 앞당겼을지언정 적어도 독일 사회를 일단 움직이도록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은 이미 지난 정부에서 그런 방식과 내용의 개혁정치를 경험했다. 국가가 주도하는 것과 신자유주의 모두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것들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은 그 결과 발생한 '사회적 응집력의 훼손'과 '경제적 양극화'라고 하는 심각한 후유증을 치유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이제는 가급적 국가주도가 아니라 사회주도, 급속한 신자유주의화가 아니라 그 폐해를 치유하는 내용의 신복지주의 정치를 강화해야 하는 것이 절실한 상황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 정치의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이중의 경로수정(double path-correction)을 해야 하는 시대적인 과제를 맞고 있는 것이다.
***정권을 잃을지언정 사회는 살리는 정치**
양극화 해소, 복지강화, 분배강화 등 '한국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필요한 정책들은 내용적으로 분명 한국 경제의 기존의 지배적인 방향성에 경로수정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서 그 어떤 정치가라도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려면 당장 강한 정치적 저항과 시련에 부딪힐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기에 정치가들이 사회협약을 선호하는 것이요, 한 사람의 정치적 해결사가 개혁의 칼을 휘두르는 것보다 사회적인 합의를 추구하면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전체를 위해서 바람직하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사회협약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려는 우리의 상황에서 클레멘트식 정치는 아직 이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으로부터 뭔가를 굳이 배우겠다면, 사회협약이 행여 또 다시 실패한 이후의 상황에서 필요한 정치적 선택과 관련해서 있을 수 있다. 바로 그가 과단성과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소신 있게 경로수정의 길로 나아간 모습이다.
진정성 있는 정책을 과단성 있고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정치가는 행여 정권을 잃을지언정 사회를 살릴 수 있다. "개혁 추진 과정에서 국가와 사회는 잃은 게 없고, 다만 정당(사민당)만 정권을 잃었다." 클레멘트가 한국에서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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