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은 최고경영자의 매너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최근에 운동을 하다가 가벼운 사고를 당해 병원출입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나라 병원 참 좋아졌더군요. 예전에 비해 시설도 많이 개선되었지만, 더욱 눈에 띄게 변한 것은 의사 선생님들이나 간호원들의 환자를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예전의 무표정하고 권위적이며 불친절하기까지 했던 병원 종사자들만 기억하고 있던 제게는 충격이라 할 만큼 자상하고 친절해졌더군요.
그런데 그 병원에서 저는 사소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교훈이 되는 재미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하루에 두 분의 의사 선생님을 만나뵈었는데 그 두 분의 환자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대조를 이루는 것이어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첫 번째 만난 분은 그 분야에서 명의로 알려져 있는 유명한 의사였습니다. 워낙 널리 알려진 분이라 환자가 많을 것 같아서 아침 일찍 서둘러 갔지만 병원에 도착해보니 이미 많은 대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환자가 많다 보니 진료실에 들어가서도 한참 동안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오래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의사 선생님이 진료실로 들어서시더군요. 오래 기다리다 보니 아무래도 표정이 좀 굳어 있던 제게 이 분이 환한 미소를 띠며 활기찬 걸음으로 들어서더니 "오랫동안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환자분들이 많다보니 본의 아니게 불편을 끼쳐드리게 됩니다"라고 하더니 아주 기분 좋게 진찰을 시작하더군요.
명의라고 해서 막연히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의사 선생님을 기대했던 제게는 그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이 분이 환자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면서 진료를 아주 성심껏 할 뿐 아니라 제가 물어보고 싶었던 사항까지 제 마음을 꿰뚫고 있었던 것처럼 미리 친절하게 설명해주시는 통에 따로 질문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진료를 끝내고는 처방전을 써주시더니 앞으로 지켜야 할 주의사항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하고는 완쾌 후에 새롭게 시작하는 운동의 즐거움에 대해서까지 언급하시더니 다시 한번 미소 띤 얼굴로 인사를 하고는 총총히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이 떠나자 간호원이 처방전과 약의 복용 방법 및 금기사항에 대해서 그 의사 선생님 같은 명랑한 어조로 기분 좋게 보충설명을 해주더군요. 병원에 가서 그렇게 유쾌한 경험을 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분이 명의라는 평판을 듣는 것이 우연이 아니구나 싶었고, 좋은 의사는 역시 환자의 마음까지 다스리는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같은 날 그 치료의 후속조치로 같은 병원의 다른 전공의사 선생님을 만나뵙게 되었습니다. 그 분도 자신의 분야에서는 널리 알려진 분이고 환자 또한 많았습니다. 상당한 시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순서가 되어 진료실에 들어서자 그 의사 선생님은 무표정한 얼굴로 힐끗 쳐다보면서 제 이름을 확인하더니 묵언수행하는 수도승처럼 한 마디 말씀도 없이 한 5분동안 차트만 들여다보시는 것이었습니다.
앉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으려니 이분이 처방전에다 뭐라고 황급하게 몇 자 적더니 의례적인 말만 몇 마디 하고는 나가보라고 하시더군요. 증상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었지만 너무 엄숙한 분위기 탓에 입이 잘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렵사리 질문을 했더니 귀찮다는 듯이 무성의하게 한 마디 하시고는 또 입을 닫아버리더군요.
그 의사 선생님이 특별히 불쾌한 언사를 쓴 것은 아니고 타고난 성품이 좀 과묵한 분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만, 아무튼 그 방을 나서는데 괜히 마음이 무겁고 우울해지더군요.
같은 날 한 병원에서 겪었던 이 두 가지 에피소드는 같은 말이라도 말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다른 느낌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두 번째 의사 선생님이 별달리 매너가 나쁜 분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어찌 보면 그 분의 말투는 우리나라 의사 선생님들의 전형적인 어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권위적이고,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고….
제 생각으로는 우리나라의 최고경영자들의 상당수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듯 싶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 국민 대다수가 유교문화의 전통 탓인지 근엄하고 무표정한 일면이 있지요. 서양사람들이 길에서 마주치는 모르는 사람과도 인사를 나누는 데 반해 우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을 만나도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조직생활을 하는 분들은 직위가 높아질수록 무뚝뚝해지는 성향이 있지요. 아무래도 자리가 높아지면 행동거지가 가벼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회사 초년병 시절에는 쾌활하고 사교적이던 사람들이 직위가 높아질수록 엄숙해지고 권위적으로 변하는 경향이 그 증거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매너가 좋은 것이 결코 가벼운 처신은 아닐 것입니다. 매너가 좋아서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을 경박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한 권위 있는 조사에 의하면 미국의 대표적인 경영자들에게 당신의 성공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요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93%가 '대인관계의 매너'라고 대답했습니다.
대인관계에는 회사 외부 사람들과의 관계는 물론 회사 구성원들과의 관계도 포함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영자들 중에는 대외적인 인간관계는 비교적 잘하면서도 사내의 인간관계는 잘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대외적으로는 매너가 좋다고 알려진 분이 사내에서는 권위적으로 변하는 경우죠. 이런 분들은 최고경영자는 위엄이 있고 엄숙해야 하는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년 〈포춘〉과 함께 "미국의 일하기 좋은 100대 직장"을 선정해 발표하고 있는 '일하기 좋은 직장 연구소(Great Place to Work Institute)'는 일하기 좋은 일터의 첫 번째 조건으로 종업원과 경영진 간의 신뢰를 꼽습니다. 종업원이 경영진을 신뢰하려면 존경심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 존경심은 종업원에 대한 배려에서 시작됩니다.
존경받는 경영자는 직원들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며 그들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고 자주 대화합니다. 대화에 있어서 밝은 표정과 예의 바른 말씨는 기본이지요. 같은 말이라도 좋은 매너로 하면 앞에서 말씀드린 첫 번째 의사 선생님의 경우처럼 훨씬 더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굳은 표정과 딱딱한 말투에서 벗어나는 것은 훈련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훈련은 아나운서들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장님께서도 이번 주에는 상냥한 말투와 밝은 표정을 한번 연습해보시기 바랍니다.
매너의 출발점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입니다. 사실은 저도 그 병원에서의 경험 이후 저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학생들이 저의 태도에서 위압감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교육자는 근엄한 일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거든요.
이제 저도 표정과 말투를 좀 고쳐볼 생각입니다. 교육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쓸데없는 위엄쯤은 버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오늘은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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