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양균 기획예산처 장관이 11일 정운찬 서울대 총장이 대국민 사과를 발표한 뒤인 11시에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이례적인 일이다. 기획예산처에서 특정 사안에 대해 딱 짚어서 얘기하는 경우는 흔히 보기 어렵다. 게다가 정 총장이 사과문을 발표하고 채 한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진행된 변 장관의 기자간담회는 사실상 미리 준비된 행사였다고 볼 수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일까?
게다가 변 장관은 얼마 전 시위 도중 발생한 2명의 농민 사망 사건으로 경찰청장이 사퇴한 사건을 거론하며 대단히 완곡한 표현으로 정 총장의 진퇴여부와 관련된 언급을 했다. 기획예산처의 전례로 보면 상당히 강한 표현이고, 이 정도면 관료 출신으로 장관에까지 임용된 변 장관의 경력으로 볼 때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런 점은 지금의 맥락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과학기술부는 왜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가**
변양균 장관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부 행정의 절차, 특히 연구개발 사업에 대한 공식적인 행정 절차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에 대해 과학기술부는 사업 관리를 담당하고, 여기에 정부의 예산을 배정하는 일은 기획예산처의 책임이다. 관련 예산 발의는 과학기술부가 하지만, 그 예산이 적절한 것인가를 판단해 금액을 조정하고 배정하는 일은 기획예산처가 하도록 돼있다. 그리고 정부가 연구자 개인과 계약을 맺는 일은 없기 때문에 비영리법인 혹은 영리법인을 통해 연구협약을 체결하도록 돼있다.
원칙적으로 황우석 교수팀이 기업 혹은 기타 재단의 영리법인을 통했어도 상관이 없었겠지만, 황 교수는 서울대학교 산학협력재단을 관리인으로 선택했다. 그래서 이 연구개발 사업에서는 서울대학교가 사업추진 기관으로 지정됐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연구비 중 15%에 해당하는 관리비가 서울대학교에 이른바 '오버헤드' 형식으로 지원된 것이다.
과학기술부는 이번 사안과 관련해 자신이 주관하던 사업에 대해 중간보고 등을 통한 현황 파악도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중대한 하자'가 발견됐음에도 하자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이는 연구협약서 형식의 계약서 상의 '갑', 즉 과기부의 의무를 방기한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서울대 총장의 결정으로 검증을 하기보다는 하자 관리 차원에서 과학기술부의 요청을 서울대가 받아들여 검증을 하는 것이 옳았고, 이때 과기부는 필요한 모든 자료를 요청할 권리와 현장실사권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제 서울대의 조사가 끝났다니 과기부로서는 이 건에 대해 행정적으로는 아무런 권한도 갖고 있지 않으며, 감사원의 피감기관 신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획예산처와 서울대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다음 감사 대상이 어디일까? 기획예산처와 서울대 역시 지금부터는 피감기관이다. 황 교수한테 속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한 다음의 대응에 문제가 있었고 이렇게 문제가 생기도록 관리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서울대학교는 일단 드러난 점만으로도 두 가지의 명백한 하자를 가지고 있다. 기관윤리위원회(IRB)의 작동 과정과 이에 대한 관리 시스템이 없었다는 것은 이미 드러난 첫 번째 하자다.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일단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다.
두 번째 하자는 특허지분 관리와 관련된 문제다. 원칙적으로 정부가 출연하는 연구의 결과물은 정부의 지분만큼 정부가 소유하도록 돼있는데, 주관기관이 비영리법인인 경우(서울대는 비영리법인이다)에는 비영리법인이 그것을 소유하도록 돼있다. 기술개발자도 '기술료'를 지불해야만 이런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돼있고, 기술료 지불이 완납된 다음에는 개발자에게 특허를 양도할 수 있게 돼있다.
40%니 50%니 하면서 노성일 이사장이 지분에 대한 권리를 요구했다는 것은 주관기관인 서울대 산업협력재단의 특허권 관리가 중대하게 미숙했음을 의미한다. 당해 연도 연구개발비의 40%를 현금 혹은 현물로 노성일 이사장이 지불한 경우에만 특허지분이 양도될 수 있는 게 우리나라 법체계인데, 난자는 생명윤리법상 여기서 말하는 현물로 계상할 수 없다. 명백한 하자가 서울대 측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변 장관이 정 총장의 사퇴를 언급한 이유**
기획예산처 장관이 급히 기자간담회를 열어 우리에게 상기시켜준 것은 바로 이 사실이다. 서울대의 책임이 총장의 사과로 종료되는 것이 아니며, 지금부터는 서울대도 감사를 포함한 행정 절차상 피감기관이라는 사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감사원의 고소·고발에 의해 수사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준 것이다.
포괄적으로 기획예산처도 예산심사 과정에서 경제적 타당성과 실행 가능성 등에 대해 심사기준에 맞게 심사했느냐는 점에서 피감기관의 신분이 된다는 점에서도 변 장관의 발언은 이례적이다. 쉽게 말하면 정운찬 총장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했는데, 이에 대해 기획예산처의 변 장관은 "그게 아니라 서울대와 기획예산처의 책임"이고 "국민들은 법률적인 책임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PD수첩〉의 보도 이후 문제가 있다는 것이 인지된 뒤에 정부기관에서 '문제가 있고, 책임 질 것은 책임을 지자'라는 말이 나온 첫 번째 경우다. 과학기술부와 청와대가 보여준 극단적인 책임회피의 모습만 보다가 기획예산처 장관의 기자간담회 소식을 접하면서, 그래도 그나마 나라가 이 정도라도 유지되고 있는 것은 국민을 세금을 허투루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서슬 퍼런 젊은 예산담당관들이 묵묵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어떻게 하면 자리 보존을 할 것인가 전전긍긍하는 각 부처의 공무원과 정치인들 속에서 스스로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기획예산처 장관의 기자간담회는 감동적이었고, 박수를 받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황우석 사건, 예산심사에 대한 외압의 한 예**
정부 입장에서 황우석 사건은 논문조작이나 사기가 문제가 되는 사건은 아니다. 그런 일은 지금까지도 종종 벌어졌고, 앞으로도 벌어질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이런 종류의 일들을 관리 가능한 시스템 내에 어떻게 집어넣을 것인가일 것이다. 기획예산처는 이런 면에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젊은 과학도들이 수행하는 불과 5천만 원짜리의 조그만 연구용역에 대해서도 서슬 퍼런 예산의 칼날로 휘두르던 예산담당관들이 어떻게 해서 10억 원짜리 과제가 불과 2년 만에 250억 원짜리로 커지도록 무기력하게 방치했던가? 경기도나 보건복지부 등으로 나뉘어 예산신청이 된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기획예산처에 그런 예산신청들이 모두 모이니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예산심사 과정에서 충분히 알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충분히 기본적인 스크린을 할 수 있었을 터인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예산심사의 관행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수많은 힘 있는 인사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기획예산처의 위에서부터 밑에까지 압력을 넣었을 것이고, 그 압력에 굴복해온 지난 2년 간의 기억이 서울대 총장의 사과발표 직후 기획예산처 장관의 기자간담회로 역설적으로 표출된 것이리라.
차제에 대통령의 뜻이나 총리의 뜻이라는 이름을 거론하며 기획예산처의 예산배정에 압력을 넣고 심사결과를 바꾸는 관행이 단절되지 않으면, 지금과 같은 일은 앞으로도 생기고 또 생길 것이다. 이런 우려에서 기획예산처 내 개혁의 뜻이 모여 이번 기획예산처 장관의 기자간담회라는 이례적인 사건이 생겨난 것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황우석 사건, 다들 책임 안 지려 하는데…**
기술경제학의 최근 이론을 빌리자면 황우석 사건은 NIS(National Innovation System: 국가혁신체계)에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실험실 말단에서의 민주주의, 소통체계, 인력관리 문제로부터 맨 상단에서 과학기술을 정치적으로 사용하려 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책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현재의 이 결함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과학기술을 통한 국가발전 전략이라는 것은 모래 위의 성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재의 시스템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단점을 간단한 게임이론을 통해 설명하면, 모두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에 결국 아무도 책임 지지 않는 게 이 게임의 현실적 해법이 된다.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고, 또한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보고 있다.
책임 질 사람이 있는가? 폭탄 돌리기 같은 이 게임은 터지는 순간까지 돌고 돌리는 게임이고, 총리실의 손을 떠나 청와대로 갔고, 청와대의 손을 떠나 과기부로 갔고, 이제는 서울대와 기획예산처까지 온 셈이다.
누군가가 여기에서 책임의 기준을 세워주면 이 게임은 사회적으로 훨씬 나은 균형으로 갈 수 있고, 새로운 진화를 시작할 수 있다. NIS라고 부르는 국가혁신체계가 적절하게 진화하면 모두가 이득을 보지만, 참여정부에서 전개시킨 퇴행적 방향으로 강화되면 그건 위기가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서울대 정운찬 총장의 사과는 그 자체로 현재 반성할 수 있고 자기성찰을 할 수 있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과할 수 있는 집단은 그래도 서울대 밖에는 없었다는 식의 새로운 기준에 해당한다. 사업 담당 부서인 과기부는 아직도 사과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감사와 수사를 받으면 받았지 사과할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면에서 정운찬 총장의 사과는 그래도 이 나라에 믿을 만한 사람은 서울대 총장 밖에 없다는 세인의 말을 확인시켜 준 계기라고도 볼 수 있다. 지난 몇 주 동안 세계가 서울대의 조사를 지켜보고 있었고,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먼저 사과한 것은 청와대나 과기부에 비교해보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런 점을 전제로 기획예산처 변 장관의 말을 다시 해석해보자. 우리나라의 누구도 정운찬 총장에게 이 이상의 행동을 요구할 권리도, 권한도, 그리고 능력도 없다. 그러나 변 장관의 말은 기왕 기준을 세울 것이면 조금 더 높게 세워달라는 뜻으로 나한테는 들린다. 간접화법이었지만, 서울대 총장님께서 사퇴를 고려하는 정도가 되어야 이미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기준이 될 것 같다는 것이 변 장관이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정운찬 총장 '책임' 지고 사퇴하는 모범 보여라**
학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이런 요구를 하기가 어렵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정운찬 총장이 후학들을 위해서, 혹은 대한민국 과학과 학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사태에 대한 포괄적 책임을 느끼고 사퇴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NIS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학문의 도덕적 기준 자체가 100년은 더 발전하는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것이 내 조심스러운 예측이다.
친일과 부역, 친미와 부패 등 굳이 과학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의 학자들에게 붙어 있던 근대화 100년 동안의 학자의 기준을 세우는 일이라면 퇴진에 따른 불명예보다는 그 희생에 따라 영원히 기억될 명예가 더 클 것 같다. 이 게임은 최초의 플레이어가 던지는 기준치가 높을수록 전체적인 이득이 높아지는 게임인 셈이다.
아무도 책임 지려 하지 않고, 모두가 남의 등에 숨으려고 하는 이 시스템에서 어쩌겠는가! 가장 높은 도덕성을 가지고 있고 가장 유능한 사람에게 기준을 세우는 그 고행의 짐이 넘겨진 것을!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100년 후의 한국 사회가 황우석 이전과 황우석 이후로 구분되지 않고 정운찬 이전과 정운찬 이후로 구분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아직 우리는 모든 국민이 믿고 존경할 학자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지금 우리는 모두 시대의 기준을 세우는 분기의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이다. 그나마 사과라도 한 사람은 대한민국에는 서울대와 정운찬 총장 밖에 없었다. 과기부에 기대를 하겠는가, 청와대에 기대를 하겠는가, 아니면 총리실에 기대를 하겠는가!
어쩌겠는가,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을…. 한 번도 시대에 영합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걸었던 경제학자 정운찬에게 던져진 질문에 그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에 대한민국의 앞으로의 진화의 길이 걸려 있는 셈이다. 실로 무겁고 고뇌스러운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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