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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의 지붕은 나만의 사유재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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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의 지붕은 나만의 사유재산인가?"

박명준의 '오늘의 유럽' 〈1〉'새로운 평등'

그동안 〈프레시안〉을 통해 부정기적으로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정치와 사회 문제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제시해온 박명준 〈프레시안〉 기획위원이 새해를 맞아 '오늘의 유럽'이라는 제목의 기획연재를 시작한다.

이 기획연재를 통해 박명준 기획위원은 유럽이 새로이 부닥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더 나아가 유럽인들의 실천이 우리의 고민을 풀어내는 데 참고가 되도록 싱싱한 '화두'를 던지기도 할 것이다.

박명준 기획위원은 독일 쾰른 대학에서 노동ㆍ정치사회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쾰른 막스플랑스 사회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편집자〉

튀빙겐이나 하이델베르그 같은 독일의 오래된 중소 도시들에 가보자. 아름다운 거리를 기분 좋게 산책하다가 다소 높은 곳에 위치한 고성이나 성당에 올라 시내를 내려다 보면 또 한번 탄성을 지르게 될 것이다.

시내 집들의 지붕이 하나같이 세모난 모양을 한 채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는 모습이 또 다른 멋진 볼거리를 선사해주기 때문이다. 빨간 지붕들은 주변의 잘 가꾸어진 녹색의 자연과 잘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적록(赤綠)의 조화가 색다른 차원의 도시미학을 창출한다. 고풍스러움을 간직하며 저마다 화려하고 다양하게 꾸며진 시내 건물들의 모습과는 또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이다.

***독일의 빨간 지붕색이 말하는 것**

시내의 집들이 모두 획일적으로 빨간 지붕을 하고 있다는 것은 개별 건물과 주택에 대한 규제가 퍽 까다롭다는 말이다. 이는 건물의 소유자들이 자신의 사유재산인 지붕의 색깔을 선택할 '자유권'을 침해받고 있다고까지 심하게 해석할 수도 있다. "내 돈 내고 내 지붕 색을 정하겠다는데 왜 국가가 (혹은 사회가) 나서서 참견을 하느냐"고 불평을 늘어놓을 법도 하다.

거리의 간판들도 마찬가지다. 독일뿐 아니라 유럽 대부분의 대도시 어디를 다녀도 간판의 크기가 작고 아담하며 거리에 함부로 간판이 튀어나오도록 놔두지 않는다. 이 역시 보기에 따라 상점 소유주들의 '영업 선전의 자유'를 제약하는 행위로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제약과 규제의 결과는 무엇인가? 조화로운 지붕들의 모습을 보면서 고성을 찾은 관광객들은 그 도시에서 강한 매력을 느끼고 남다른 인상을 갖게 되며, 그러한 지붕들이 이루는 장관(壯觀)은 관광자원이 된다. 정돈된 간판들 속에서 기분 좋게 산책을 해본 관광객은 은근히 그 길을 다시 걷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며 그 도시를 또 한번 찾고 싶어진다.

극도의 개인주의는 결국 사회적인 불편과 손해를 초래한다. 사유재가 지니는 공공재로서의 속성을 인지하고 있는 성숙한 개인들만이 진정한 개인적 자유를 향유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법이다. 정돈되고 합의된 사회적 원리의 수용은 결국 '공공의 선'을 함양시키며 사회적 합리성을 증진시킨다.

***세계화 시대에 '새로운 평등'의 균형점 찾는 유럽**

문제는 규제의 수준과 정도에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이야기들은 바로 사유재에 대한 사회적 규제의 수준을 누가 어느 정도로 하느냐의 게임의 원리로 단순화시킬 수 있다.

주지하듯이 냉전 이후 세계의 유일한 보편담론은 이미 좋든 싫든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되어 버렸다. 이는 서유럽의 저변에 깔려 있는 평등주의적 내지 사회주의적 원리와 요소들에 대한 강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쉽게 말해 그것은 그동안 빨간색으로 강하게 규제했던 지붕 색을 이제는 집 주인들이 알아서 택하도록 사회적 규제를 약화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결과 지붕들의 색과 모양은 천차만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며 부유한 주택과 가난한 주택의 지붕은 뚜렷이 구분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이성'이 세계 어느 지역에서보다도 발전한 유럽인들은 그러한 도전 앞에서 자신들이 지난 세기 동안 잘 가꾸어온 사회적 조화의 원리와 미덕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에게 평등과 번영의 두 마리 토끼를 안겨다준 자랑스런 전통과 제도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새로운 방식으로 알록달록하지만 조화를 잃지 않은 지붕들을 만들어보자는 생산적인 역담론(counter discourse)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 새로운 평등(new equality)의 균형점과 방식이 무엇인가를 적극 모색하려는 이러한 역담론은 불평등의 극대화에 대한 절대적인 경계를 내포하고 있다. 평등의 측면에서 후진국인 미국을 향해 유럽인들이 품고 있는 은근한 혐오는 자신들의 사회가 네오리버럴(neoliberal, 신자유주의)해지다 못해 행여나 미국화(Americanization)로까지 치닫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거부하는 심리를 형성시키고 있다.

앙엘라 메르켈 독일 수상의 최근 연두회견은 화두가 '자유(Freiheit)'였다.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그녀는 독일인들 모두에게 '당신이 바로 독일이다'라며 각자 스스로 정체(停滯)를 털고 움직여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당인 기민당(CDU)의 당 대회에서 '새로운 평등'을 주창했다. 이는 사민당(SPD)이 수년 전부터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당내에서 던져온 핵심적인 레토릭을 대연정 하에서 기민당이 적극 수용하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전반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자유와 평등의 조화를 재구성하려는 모습들로 보인다.

***'새로운 조화'를 어떻게 지향할 것인가?**

서울 시내 높은 빌딩에 올라 창 밖으로 낮은 빌딩과 집들의 지붕을 보자. 개별과 전체가 잘 어우러진 조화미가 느껴지는가? 내려와서 시내 어느 거리를 걸으며 간판들을 살펴보자. 이웃의 간판과의 어우러짐 속에 내 가게의 개성을 겸손히 표현하려는 상점 주인의 '사회적 이성'이 느껴지는가?

문득 서울의 어지러운 지붕과 간판을 떠올리며 생각해 본다. 그간 방치된 지붕들, 피곤한 간판들 속에서 익숙하게 지내온 한국인에게 신자유주의는 과연 더 무엇을 어쩌자는 말일까? 그 신자유주의가 사회적 조화라는 원리의 빈곤 속에서 허덕여온 한국인의 심리적 공황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인가? 또 그것은 미래를 향한 새로운 통합의 원리를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분명 우리에게도 생산적이고 구체적인 역담론이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에 대한 솔직하고 엄밀한 자의식부터 형성하고 공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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