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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새 총리 '핏대' 간 나오토는 누구인가?

시민운동 출신… 10선 의원에 정책 중심 활동으로 유명

일본의 간 나오토(菅直人) 부총리 겸 재무상이 4일 오전 민주당 대표에 당선된 데 이어 오후 중의원 본회의 선거를 거쳐 제94대 일본 총리로 지명됐다.

이날 민주당 당사에서 열린 당 대표 경선에서 간 부총리는 민주당 의원 423명 중 291명의 지지를 받아 129명으로부터 표를 받은 다루토코 신지(樽床伸二) 중의원 환경위원장을 여유있게 눌렀다. 이어 오후 진행된 중의원 본회의에서는 전체 유효득표 477표 중 313표를 얻었다.

이로서 민주당은 정권교체 1년이 채 안 된 상황에서 두 번째 리더를 맞이하게 됐다. 간 부총리가 전날 당 대표 경선 출마 기자회견에서 새 내각에 오자와 이치로(小澤一浪) 간사장을 배제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만큼 하토야마-오자와 투톱 체제와는 차별화된 조각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起夫) 총리는 이날 마지막 각의를 끝으로 262일 간의 재임기간을 마치고 정식 사퇴했다. 하토야마 총리는 이날 오전 자신의 트위터에 "재임 중 감사했습니다. 많은 격려 메시지와 엄격한 지적을 매일 읽었다"고 남겼다.

실패 끝에 만들어진 정치인

▲ 간 나오토 신임 민주당 대표 ⓒ뉴시스
올해 63세인 간 나오토 부총리는 시민운동을 거쳐 정계에 입문, 야당 시절부터 정책통으로 이름을 날렸다.

정계와 관련 없는 회사 중역의 아들로 태어나 스스로 정치인생을 개척한 케이스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를 비롯해 자민당 정권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등 전임 총리 대부분이 정치 명문가의 세습 정치인이었던 것과 차별된다.

재수 끝에 도쿄공대 이학부 응용물리학과에 입학, 1970년에 졸업한 그는 세 번의 실패 끝에 이듬해 변리사 시험에 합격한다. 이후 여성운동가 이치카와 후사에(市川房枝)의 선본 참모를 맡아 그를 당선시키면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간 부총리는 1976년 중의원 선거, 이듬해 참의원 선거, 1979년 중의원 선거에 각각 무소속과 사회시민연합(사회민주연합) 대표로 출마했지만 연거푸 고배를 마신다. 그러다 1980년 제36회 중의원 선거에서 처음으로 당선됐고 이후 10선에 성공한다.

관료의 책임을 추궁한 관료

정치 신인 시절부터 시민운동계에서 갈고 닦은 실전 감각을 펼치며 정책통으로 인정받았던 간 부총리는 1996년 여야 연립정부였던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내각에서 후생상으로 처음 입각한다.

같은 해 그는 한 백신 회사가 에이즈 감염 혈액체제를 비활성화하지 않은 상태로 혈우병 환자들에게 사용했다가 에이즈 피해를 늘린 '약해 에이즈 사건'으로 일약 스타가 된다.

간 부총리는 이 사건을 집중적으로 파헤쳐 관료의 잘못을 추궁했고, 피해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등 대중에게 어필했다.

관료주의의 병폐가 큰 문제로 지적되는 일본 정계에서 간 나오토는 '관료에 맞서는 관료'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큰 자산을 얻게 된 것. 관료들 앞에서 거침없이 화를 내는 모습으로 성을 잘 낸다는 의미의 '핏대 간(いら菅)'이라는 별명이 따라붙기도 했다.

민주당 창당 멤버, 세 번째 당 대표

간 부총리는 1996년 9월 하토야마 유키오 당시 의원과 함께 구 민주당을 창당한 원년 멤버다. 당 대표직은 1998년과 2002년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민주당 창당 직전 신당 사키가케에서 정책 조정을 맡고 있던 간 부총리는 민주당 창당에서 당의 이념·정책을 구체화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창당 초기 중·참의원을 합해 55명이 참가했던 민주당은 1998년 4월 다른 당을 흡수하면서 신 민주당으로 거듭난다.

1998~1999년, 2002~2004년 당 대표 시절 선거마다 약진을 이끌어냈던 그는 그러나 2004년 국민연금을 미납한 자민당 의원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본인도 연금을 미납한 사실이 발각돼 대표직을 사임하기도 했다.

간 부총리는 민주당 내에서 하토야마, 오자와와 함께 당내 권력을 좌우하며 민주당의 색깔을 드러내온 인물인 만큼 그의 정책 방향도 전임 총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 인지도나 권위는 하토야마보다 떨어져도 정책 전망이 뛰어나며, 짧지만 각료 경험도 2회나 있어서 하토야마보다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다.

하토야마 "미, 중, 한과의 관계를 잘 부탁한다"

간 나오토 부총리는 하토야마 전 총리와 마찬가지로 외교적으로 아시아 외교를 중시한다는 면에서 한일관계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간 부총리가 일한의원연맹 소속이며 일조(북일)국교정상화추진 의원연맹 고문을 맡기도 했다는 점은 이런 전망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일방적인 대미 추종 외교를 개선해보고자 아시아 중심 외교를 펼쳤다가 반대로 '미일동맹을 경시한다'는 비판에 휘말려 좌초된 하토야마 전 총리의 경우를 볼 때, 바로 후임인 간 부총리의 운신도 제한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간 총리는 하토야마 내각의 아시아 중심 외교를 계승하면서도 전통적인 미일동맹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하토야마 전 총리는 4일 자신이 주재한 마지막 각의에서 간 부총리에게 "일미(日美), 일중(日中), 일한(日韓) 관계를 잘 부탁한다"는 의미심장한 메모를 남겼다고 전해졌다.

다만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의 다른 야당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강경한 입장이다. 그는 두 번째로 민주당 대표를 맡고 있던 지난 2003년 한 토론회에서 "핵 억제는 미국에 맡기고 핵 이외의 공격은 자위대가 해결하는 것이 기본"이라면서 "북조선 같은 것은 빨리 쳐 없애라는 분위기가 국회에도 있다"고 말해 북한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오히려 일부 일본인들은 간 부총리가 북한에 우호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직도 인터넷에서는 '간 부총리가 (조선인인데)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간 부총리가 일본인 납치 공작원을 옹호했다'는 괴담이 떠다닌다.

이는 그가 정치 신인 시절인 1989년, 저널리스트 출신 정치가 덴 히데오(田英夫) 의원의 요청에 따라 '재일한국인 정치범 29명 석방 요청서'에 서명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29명 가운데에는 나중에 드러난 납북자 문제와 관련해 용의선상에 있던 북한 공작원 신광수가 포함돼 있던 것이 후에 문제가 됐다.

현재는 일본 정부로서 무난한 수준의 대북정책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즉 하토야마 전 총리와 마찬가지로 일본인 납북자 문제와 핵 문제, 북일 국교정상화 등 북일간 현안을 '패키지'로 다뤄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소 다로, 아베 신조 전 총리처럼 매파 성향은 아니기 때문에 불필요한 긴장 관계가 형성될 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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