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년 동안 해법을 찾지 못하고 표류해 온 중ㆍ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부지 선정 문제가 2일의 주민투표를 통해 경주로 일단락됐다. 하지만 실제로 부지로 선정돼 방폐장이 들어서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상당한 진통을 겪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부재자 투표 후유증 예상…'투표 무효 확인 소송'에 정부 긴장**
가장 큰 문제는 주민투표 결과를 해당 지방자치단체와 반대 주민을 비롯한 환경ㆍ사회단체들이 받아들일지 여부다.
우선 경주, 군산, 영덕 등 지자체 간 유치 경쟁이 가열되면서 최고 40%에 이르는 부재자투표를 둘러싼 부정 시비 등 주민투표 과정에서 제기된 관권, 금권 투표 논란이 계속될 전망이다. 이미 환경ㆍ사회단체는 이번 주민투표를 불법, 탈법 투표로 규정하고 투표 무효 확인 소송을 준비 중이다. 환경ㆍ사회단체는 3일 오전 향후 대응에 대한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실제로 환경ㆍ사회단체들이 제기한 지자체 개입에 따른 불법, 탈법 사실이 경찰 수사 결과 사실로 드러날 경우 탈락한 지자체에서 공정성을 문제 삼으며 주민투표 결과를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주민투표 결과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산업자원부 등이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안전성 뒷전, 지원금 '미끼'로 방폐정 부지 선정 비판 면치 못해**
안전성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할 방폐장 부지를 주민투표를 통해 선정한 것도 두고두고 후유증을 남길 전망이다.
중ㆍ저준위 방사성 폐기물은 원자력 발전소나 병원, 연구소에서 사용한 장갑, 작업복, 필터뿐만 아니라 폐기된 원전 설비 등 '사용 후 핵연료'를 제외한 모든 폐기물을 총망라한다. 중ㆍ저준위 방사성 폐기장에도 고도의 안전성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실제로 196~70년대에 건설된 세계 각국의 중ㆍ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에서는 방사성 물질이 주변으로 누출되는 사고가 잇달아 주민들의 반발을 산 경우가 많았다.
그런 점에서 인근에 지진이 우려되는 활성단층이 존재하는 경주가 최종 부지 적합성 판정 과정에서 '부정적 평가'를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부는 철저한 부지 적합성 조사를 통해 예상 부지를 선정하고 주민들의 찬반을 묻는 '어려운' 방식이 아니라 수천억 원의 지원금을 '미끼'로 방폐장 유치 경쟁을 유도하는 '쉬운' 방법을 택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전망이다.
***시급한 고준위 방폐장 처리는 오히려 어렵게 만들어**
이번에 정부가 무리하게 중ㆍ저준위 방폐장 부지 선정을 추진하면서 결과적으로 고준위 방폐장 부지 선정을 어렵게 만든 것도 이번 노무현 정부의 실정으로 역사에 기록될 전망이다.
지금 시급한 것이 중ㆍ저준위 방폐장이 아니라 고준위 방폐장 부지 선정이라는 것은 대다수 원자력계 전문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현재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은 원자력 발전소 안의 임시 저장시설에 보관하고 있지만 2016년이면 고리 원전부터 한계에 이를 전망이다. 중ㆍ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건설에만 20여 년의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지금부터 서두른다 해도 2016년까지 고준위 방폐장 부지를 선정하고 완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 때문에 환경ㆍ사회단체들은 원자력 발전을 확장할지에 대한 사회적 토론을 전제로 고준위 방폐장 부지를 선정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를 시작할 것을 줄곧 제안해 왔다. 고준위 방폐장 부지를 선정하면 중ㆍ저준위 방사성 폐기물은 함께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국토가 좁고 인구 밀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사정을 고려해도 합리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이 정부는 이런 환경ㆍ사회단체들의 제안에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중ㆍ저준위 방폐장 부지에는 고준위 방폐장을 유치하지 않겠다'는 조항까지 만들며 중ㆍ저준위 방폐장 부지 선정을 추진했다. 현 정부에서 방폐장 유치라는 '실적'을 만들어내겠다는 대통령,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치인 관료들의 밀어붙이기가 다음 정부, 다음 세대에게 '갈등의 불씨'를 떠넘긴 셈이다.
***전 세계 '에너지 전환' 흐름에 역행…동해안 '핵 벨트' 가시권**
이번 중ㆍ저준위 방폐장 부지 선정으로 향후 원자력 발전 중심의 에너지 정책이 더욱 탄력을 받게 된 점도 의미심장하다. '탈 화석연료, 탈 원자력'이라는 세계적 흐름에 역행하는 분기점이 됐다는 것이다.
그 동안 원자력계가 방폐장 부지 선정에 총력을 기울인 것은 방폐장 문제가 지속적인 원자력 확대 정책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역으로 환경ㆍ사회단체가 방폐장 부지 선정을 막기 위해 정부, 원자력계 등과 갈등을 빚어온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중ㆍ저준위 방폐장 부지가 선정되면서 계획된 신규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가속도가 붙을 것은 물론이고, 동해안을 중심으로 아시아 최대의 '핵 벨트'를 만들고자 하는 원자력계의 소망도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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