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지금 당신은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지금 당신은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초록 대안', 농업에서 찾는다<2> '못 살겠다' 푸념만 해서야…

"아, 은행가고 싶다."

공공건물이라곤 조그만 우체국 하나밖에 없는 남해안의 한 포구로 여름 휴가를 온 고등학생 녀석이 아침 산책을 다녀와서는 민박집 툇마루에 털썩 주저앉으며 내뱉은 말이다. 나는 웬 뜬금없는 소리인가 하고 어리둥절해 있는데 함께 산책 갔던 주위의 어른들이 빙그레 웃다가는 이내 아이와 함께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닫고는 에어컨을 켠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눈앞에서 벌어진 이 광경은 사람들에게 대안적 삶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두고 며칠 째 머리를 싸매던 내게 충분한 동기유발의 계기가 됐다. 냉수 한 잔 걸치고 마당의 나무 그늘 아래 10분만 앉아 있으면 될 것을 도시에서 길들여진 그 짜릿한 시원함을 잊지 못해 쇳소리를 내는 억지바람에 몸을 맡긴다. 한참을 쉬고 나서 다시 해안가로 나가려 하기에 식수는 챙겼냐고 물었더니 마을 상점에서 생수를 사기로 했다는 것이다. 땅 속에서 퍼 올린 이 집 물이 파는 생수보다 훨씬 낫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집 뒤에 있는 파란 플라스틱 탱크에 담겼던 물이라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질 않았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생수가 그보다 훨씬 많은 탱크와 파이프를 거쳐 나오는 줄도 모르고 단지 식품 인증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현지의 자연산 생수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긴 지리산 산속에 별장을 지어놓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공기청정기를 팔아먹는 세상이니….

문명이 지나쳐 사람들을 문맹으로 내몰고 있다. 저마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과학적 지식을 들이대며 똑똑한 척하지만 내가 보기엔 석유 문명이 만들어낸 물신(物神)의 주문에 사로잡힌 듯 했다. 에어컨을 켜도 석유요 생수를 사 먹어도 석유다. 집 안은 물론 집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도 석유가 없이는 꼼짝달싹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석유 문명 시대에 석유를 잘 쓰는 것이 현명한 태도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미안하게도 지금은 석유 문명이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문명이 싹트는 전환기다. 석유 문명이 종말에 가까워졌다는 것은 석유 자원이 고갈 위기에 빠진 측면도 있지만 그 보다는 석유 문명에 의한 온갖 공해와 자연 파괴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두고 미덥지 못한 정권을 두들겨 패기에만 바쁘지 그 근저에 석유 문명의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당장에 석유값이 배럴당 100달러만 돼도 주저앉고 마는 경제 구조를 가지고 겨우 몇 년을 맡을 뿐인 정권에 모든 덤터기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난센스에 가깝다. 진실로 국가에서부터 개인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위기를 넘어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대안적 삶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와 있다.

***왜 지금 여기의 삶에서 벗어나야 하나**

오늘날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은 모두 석유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사용해 경제부국이 된 경우다. 석유 에너지로 쌓아올린 부(富)는 예외 없이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의 패턴을 보이고 있다. 사실 석유 문명만이 이런 패턴을 보이는 게 아니다. 그 옛날 나무와 석탄을 때던 시절에도 한 문명이 몰락의 징조를 보일 때에는 반드시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로 이어지는 거대한 착취구조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의 그것이 특별히 문제가 되는 이유는 착취의 규모와 깊이가 종의 멸절에까지 이를 정도로 악성적이라는 데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돈을 많이 벌어 풍요롭고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면 남들이야 어떻게 되건 적어도 우리는 잘 살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인데, 바로 이런 생각이 몰락을 재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착취에 기반을 둔 세계화 구조 속에서 어느 한 곳으로 부가 집중되면 될 수록 다른 곳에서는 기아와 질병, 전쟁 등이 만연하게 되어 있다. 때로 강대국들은 부의 집중을 촉진하게 위해 기아와 전쟁을 조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늘 평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지구라는 유기체는 이러한 쏠림과 의도적인 파괴행위에 대해 어떤 식으로건 응징을 가한다. 그것은 자연재해나 괴질 또는 사회병리 현상, 테러 등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리고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 체제는 규모의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치밀한 감시와 통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어디 한 군데라도 잘못되면 바로 대규모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하고도 불안정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제를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이 독재와 관료주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로 불행한 것은 일단 이 체제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개인이건 국가건 파국에 이르지 않는 한 빠져나올 길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개별적으로 빠져나올 수도 있겠지만 체제는 이마저도 용납하지 않는다. 고립 속에서 온갖 협박과 회유에 시달리다가 시나브로 자멸하기 십상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대안적 삶을 바라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데에는 대단한 결심과 각오가 필요하다.

대안적 삶은 당연히 석유 문명을 넘어 궁극적으로는 재생가능 에너지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어내는 전 과정을 말한다. 따라서 우선은 석유 문명에 찌들어 있는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가 대량생산(유통) 시스템에 복무하는 노동자(판매원)인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그 자리에서 서서히 발을 뺄 것인지, 남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소비하는 기계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과연 나의 영혼과 지구촌의 모든 이웃들을 풍요롭게 하는 현명한 소비는 무엇인지, 나는 오로지 나의 편리만을 위해 스스로 치우지도 못하는 쓰레기를 양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사회 전체의 쓰레기 양을 줄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인지 등등….

이렇게 석유 문명에 철저히 포박된 자신의 삶을 근본에서부터 성찰한 다음 그에 대신하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실현가능한 것부터 하나하나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대안적인 삶의 양식을 실천에 옮기려면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원래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 시스템이란 것이 대부분의 인구를 도시에 몰아넣고 그 안에서 최대한의 경제적 이득을 뽑아내려고 만들어진 것이므로 도시에 살면서 그 체제를 벗어나는 일이 쉬울 리가 없다.

가령 내 손으로는 아무 것도 내게 필요한 것을 생산할 수 없는 도시인이 슈퍼마켓을 통하지 않고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실정이다. 또한 대규모 발전소에서 중앙 집중식으로 공급되는 전력선에 온갖 전기 제품들을 연결해 사용하는 마당에 소규모 대안 에너지 시설을 도입한다는 것도 실현성이 별로 없는 얘기다. 그러므로 대안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에너지가 되도록 적게 들도록 생활을 간소화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안적 삶이 가능한 직업 또는 산업을 선택하는 것이다.

먼저 에너지가 적게 드는 생활을 살펴보자. 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 문명의 특징은 되도록 몸의 사용을 최소화함으로써 외부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를 크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 몸을 써서 자급자족하게 되면 대량 순환 체제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너지 소비를 줄이려면 그만큼 몸을 많이 사용해야 한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에너지가 적게 드는 제품을 선택하고 되도록 몸을 움직여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귀찮더라도 몸으로 대처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많은 가정주부들이 홈쇼핑의 광고에 현혹되어 조금이라도 편리한 가전제품을 구입해 노동력을 절약하려고 드는데, 가사 노동의 어려움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생활양식을 간소화하면 웬만한 일들은 자신의 몸으로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격에 맞지 않는 큰 집을 구해 그 안에 온갖 살림살이를 잔뜩 채워놓고는 살림을 유지 관리하느라 또 다시 노동 절약형 가전제품들을 사들이는 소비의 악순환에 빠져서는 대안적 삶을 얘기할 수가 없다. 에너지 문제도 정부가 주도하는 중앙집중식 화석연료 정책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다 집안에 설치 가능한 대안 에너지 시설을 적극 도입하는 한편 시민 주도형 대안 에너지 개발에 참여함으로써 에너지의 외부 의존도를 줄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간소한 생활 방식과 소규모 생산양식이 바람직한 또 하나의 이유는 세계의 평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어느 구비에서나 먼저 평화를 유린하는 측은 대규모 생산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누군가가 큰 무기를 들고 있으면 그에 대응하기 위해 너도 나도 무기 개발에 나서기 때문에 평화는 늘 설 자리가 없었다. 평범한 시민들이 공원에서 칼 든 강도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절대적 다수에 의해 지켜지는 도덕적 우월감 때문이다. 따라서 지구촌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는 대규모 살상 무기와 생산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강대국들에 대항해 소규모의 대안적 삶을 추구하는 절대적 다수가 연대하여 저들의 큰 손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한다.

***행복을 위해선 농업만이 대안**

이와 같이 지구촌의 평화와 생태계의 안정, 그리고 거기에 깃들어 사는 개인 또는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대안적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을 가장 잘 구현해낼 수 있는 직업 또는 산업은 무엇일까? 두말 할 것도 없이 농업이다.

예컨대 대규모 선박 건조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경우를 보자. 그가 열심히 일하여 최고 품질의 선박을 만들어내면 그로서는 보람 있는 일을 했노라고 자긍심을 가질 만도 하다. 그는 노동의 대가로 받은 좋은 월급으로 석유 문명의 온갖 편리를 누리며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가 만든 대형 선박은 대량 순환 체제를 유지하는 효율적인 도구로 사용되어 세계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속화시키고 심지어는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 도구로 쓰일 수도 있다.

대량 순환 체제에서는 나의 행복이 남의 불행이 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은 것이다. 하지만 소규모 산업의 경우에는 그렇게 될 위험성이 아주 낮다. 소규모 산업 가운데서도 지구 생태계 보전과 석유 문명으로 인해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데에 농업만한 것은 없다. 무엇보다도 농업은 위에서 언급한 대안적 삶을 실천하는 데 있어 가장 적합한 형태의 직업이다. (여기서 말하는 농업은 석유 에너지에 의존하는 지금의 관행농은 물론 아니다).

먼저 농업을 통해 우리는 생활에 필요한 웬만한 먹을거리와 생필품들을 스스로 조달할 수 있으므로 굳이 대규모 유통시스템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둘째, 농사일이란 것이 주로 몸을 써서 하는 것이므로 아무래도 외부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농업이야말로 다른 어떤 산업보다 대안 에너지를 적용하기 쉬운 분야다. 농경지의 지형 조건에 따라 소수력, 풍력, 태양열, 지열과 같은 다양한 대안 에너지원을 확보할 수 있고 농업 부산물을 이용한 바이오 에너지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셋째, 몸을 많이 쓰고 계절의 리듬에 맞추어 일하기 때문에 생활이 단순하면서도 변화가 있다. 마지막으로 소규모 제조업이나 상업이 농촌에서도 가능하듯이 도시에서도 텃밭이나 베란다, 지붕, 나대지 등을 이용한 소규모 농업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약 도시농업과 주말농장, 계약농업 등을 잘 활용한다면 농업은 현대 산업 구조 속에서 최고의 생산적인 취미활동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석유 문명에 푹 빠져 사는 현대인들이 농촌에 가서도 순간적인 더위를 참아내지 못하고 에어컨을 켜대는 것은 하나의 생물종으로서 자연 생태계에 적응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대인들이 지구상에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에너지가 공급되어야 하는데 이 에너지마저도 이제 고갈 위기에 처해있다. 지금이야말로 이 위기 상황을 온전히 극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 소박 단순한 대안적 삶과 농업에 있음을 알고 주어진 조건에서나마 하나하나 실천에 옮겨야 할 때다.

***필자 소개**

황대권 생태공동체운동센터 대표는 지난 1985년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3년 동안 옥고를 치른 뒤 1998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됐다. 그 뒤 사람과 자연이 함께 더불어 사는 대안 문명을 일구는 데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 <야생초 편지>(도솔, 2002),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두레, 2003) 등의 저서와 <새벽의 건설자들>(코린 맥러플린 외, 한겨레신문사, 2005) 등의 역서가 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