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야당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을 '오기 정치' 또는 '벼랑끝 정치'라 부른다. 그런 야당의 평가가 과장만은 아님을 보여주는 사건이 노 대통령이 '임기 후반 전환점'에 진입한 상징적인 날인 25일 발발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국민과의 대화'를 자청하고 나섰다. 노 대통령은 KBS TV의 '참여정부 2년6개월, 대통령에게 듣는다'라는 프로그램에 출연, 다름아닌 국민을 향해 '울분'을 토로하는 것을 시작으로 특유의 '벼랑끝 정치'를 재가동했다.
***노대통령이 국민에게 던진 도전장**
노 대통령은 "저의 국정운영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는 엊그제 발표로 29%"라며 "책임정치를 하는 나라에서 29% 지지도를 갖고 과연 책임정치의 뜻에 맞는가, 이 수준의 국민적 지지도를 갖고 국정을 계속해서 운영하는 것이 과연 책임정치의 뜻에 맞는가, 이 수준의 국민적 지지도를 갖고 국정이 제대로 수행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는 예기치 못한 폭탄발언을 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질문 던질 거 뭐 있냐? 당신이 결단하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정치제도가 내각제가 아니어서 국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통해서 재신임을 물을 수 있는 방법도 없고, 국민적 지지, 여론조사 결과를 갖고 대통령직을 불쑥 내놓은 것이 맞는 것인지 확신이 없어 고심하고 있다"며 "나는 '29%짜리 대통령과 함께 우리의 미래를 걱정해야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해 국민적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노 대통령 발언은 정치학계에서 흔히 '통치 불능 지지율'로 표현하는 '30% 미만 지지율'로 급락한 데 대해 대통령이 느끼고 있던 위기감이 얼마나 극심한가를 극명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에 앞서 노 대통령은 여러 차례 비공식적 라인을 통해 자신을 '식물대통령'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옆나라 일본에서 최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총리가 정치적 승부수를 던져 밑바닥을 기던 지지율을 극적으로 반전시킨 데 대한 부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노 대통령 발언은 그러나 보다 엄격히 말하면 국민에 대한 '도전장'이었다. 자신의 지지율이 왜 폭락했는지에 대한 '자성'을 하기보다는 '당신들이 그만 두라면 그만 둘 수도 있다'는 식으로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에 대한 '울분'을 토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국민 책임론', '대통령 무오류론'**
노 대통령의 이런 인식은 국민들이 참여정부의 최대 실정으로 꼽고 있는 부동산 정책 실패에 따른 비난여론에 대한 강한 반발과 '국민 탓'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 출범 이래의 잇따른 금리인하와 지역개발이 전국의 부동산값 폭등을 초래했다는 지적에 대해 "금리가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동산 가격 폭등 현상은 금리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다. 지역개발이 일부 투기꾼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역 개발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안할 수 없다"며 정부 책임을 강력 부인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부동산 주택 가격 파동은 얼마간의 투기꾼들에 의해 조성된 것은 아니다. 부동산 정책에 대해 국민이 내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본격적으로 '국민 책임론'을 폈다.
노 대통령은 "역대 정부가 계속 실패했다"는 말로 부동산 실정이 참여정부만의 현상이 아닌 역대 정권의 공통된 실정임을 강조한 뒤, 역대 정권의 실정 이유를 "정책을 하면 총론에서는 찬성하다가 각론 만들 때 `서민부담 가중', `세금 폭탄', `시장원리 위배', `헌법 위배' 등 각종 반대를 들고 나와 주저 앉혀버린다. 총론할 때는 전부 박수소리가 나오는데 정책을 입안하면 그야말로 폭탄을 맞는다. 지난 18일부터 언론 보도들을 한번 봐라. 관계없는 서민들도 `정부정책 때문에 세금 올라간다'고 느끼도록 돼 있다"고 주장, '건설족 언론'에 의해 끌려다니는 국민 탓을 했다.
노 대통령은 재차 "부동산 정책이 역대 정부에서 실패한 이유는 저항 때문"이라고 주장한 뒤, "10.29 대책도 호랑이를 그리려고 했는데 표범보다 조금 작은 호랑이밖에 못 그렸다. 경제부처 장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 `이거는 조세저항이 있고, 이거는 이래서 저항이 있고'식으로 하나씩하나씩 빠지더니 당정협의에서 빠지고, 국회에 가서 왕창 깎인다. 그래서 지난번 것(10.29 대책)도 그리 됐다"고 주장했다.
노 대통령의 주장을 요약하면, 대통령 자신은 제대로 부동산 투기를 잡으려 했으나 자신만 빼고는 경제부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언론 등이 차 떼고 포 떼는 식으로 저항을 해 제대로 된 부동산정책을 펼 수 없었다는 '대통령 무책임론'에 다름 아니었다.
***'대통령 무책임론'의 허구**
노 대통령 스스로가 편 '대통령 무책임론'은 제 얼굴에 침 뱉는 행위다. 대통령은 정부 전체를 대표하는 최고통수권자인 동시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회 과반수 이상 의석을 갖고 있던 열린우리당의 사실상 오너다. 이런 막강한 자리의 대통령이 수하인 경제각료들과 집권여당의 저항 때문에 시원찮은 부동산 대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정치적 자해 행위나 다름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주장은 동시에 사실관계와도 정면 배치되는 주장이다. 지난해 6월9일의 노 대통령 발언이 그런 대표적 예다. 4월 총선 때 공약으로 내걸었던 '분양원가 공개'를 열린우리당이 백지화하면서 비난 여론이 일자, 노 대통령이 이때 한 말이 그 유명한 '시장방임론'이었다.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는 개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장을 인정한다면 원가 공개는 인정할 수 없다. 이것은 경제계나 건설업계의 압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소신이다. 장사하는 것인데 10배 남는 장사도 있고 10배 밑지는 장사도 있고, 결국 벌고 못 벌고 하는 것이 균형을 맞추는 것이지 시장을 인정한다면 원가 공개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내 생각을 모르고, 또 내가 정책에 참여하지 않으니까 원가공개를 공약했는데 다시 상의하자. 이는 결론이 어디로 나더라도 개혁의 후퇴가 아니라 대통령의 소신이다."
노 대통령은 물론 1년여 뒤인 지난 6월24일 부동산값이 재폭등하며 비난 여론이 들끓자, "(지난해 그렇게 말했지만) 지나고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더라"며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못 할 것도 없다"고 말을 바꾸긴 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6.9 발언'은 결정적으로 주택가격 안정을 갈망하던 다수 국민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발언이었고, 그 후 부동산값 폭등의 결정적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런 노 대통령이 '대통령 무책임론'을 펴니, 과연 노 대통령이 '대통령 책임제'라는 헌정질서 아래 대통령이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갖고 있으며 동시에 얼마나 큰 책임을 지고 있는가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은 현명하다. 국민을 모독말라**
노 대통령은 이날 자신의 직할권에 있는 정부와 열린우리당을 비난하는 동시에, 건설족 언론에 끌려다니는 국민을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 발언이 있기 직전 실시된 한 여론조사는 대통령의 국민 비난이 얼마나 국민 모독적 발언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내일신문>의 25일 보도에 따르면, 이 신문이 여론조사기관 한길리서치를 통해 서울시민 6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부동산 보유세를 강화하고 1가구 2주택자에 대해 양도세를 중과하는 정책에 대해 서울시민의 62.3%가 찬성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찬성비율은 서울 강북(62.2%)과 강남(64.7%)로 도리어 강남에서 찬성 여론이 높았다. 작금의 부동산값 폭등이 한국 전체를 파국으로 몰아갈 것이라는 위기감의 결과로 풀이된다. 노 대통령이 매도하듯, 국민이 '세금 폭탄' 운운하며 저항을 조직하려는 건설족 언론에 끌려다니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다.
노 대통령이 또하나 주목해야 되는 여론조사 내용은 '정부의 8.31 부동산 종합대책이 아파트값 안정에 도움이 되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전체의 6할 이상이 세금 강화에 찬성하면서도 전체 응답자 중 34.2%만이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답했고 61%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고 응답했다. 세금만을 갖고 부동산폭등을 잡으려는 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의 표현인 것이다.
노 대통령은 요즘 들어 툭하면 "나는 취임 초부터 레임덕이었다"는 식으로 국민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사실과 다른 주장이다. 노 대통령이 2002년 대선에서 박빙의 차이로 대통령이 된 것은 사실이나, 노 대통령 취임 당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무려 국민의 92%가 노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줬다. 우리 국민이 선거 때는 나뉘더라도 일단 대통령이 선출되면 힘을 실어주는 지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은 또 탄핵 후 노대통령이 복귀했을 때도 탄핵 전의 20%대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50%대의 지지를 해줬다. '초심'으로 돌아가 열심히 일을 하라는 의미에서였다.
그러나 노 대통령 지지율은 지금 다시 '통치 불능 지표'인 20%대로 곤두박질쳤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또다시 '하야'로까지 해석가능한 발언을 하며 국민을 압박하고 있다.
물론 대다수 국민은 노 대통령이 진정으로 하야할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목격하듯, "물러나겠다"고 자주 말하는 책임자치고 실제로 물러나는 경우는 거의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측은 노 대통령이 이날 한나라당에 대해 자신이 앞서 제안한 대연정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권력을 통째로 내놓을 수 있다"는 발언을 한 대목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현재 노 대통령의 관심이 도통 '민생'이 아닌 '정치공학'에 쏠려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과연 노 대통령의 이번 '8.25 발언'이 앞으로 어떤 발전과정을 거쳐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는 좀더 냉정히 지켜볼 일이다. 그러나 단 하나 분명한 사실은 함부로 국민을 매도해선 안 된다는 사실이다. 참여정부가 출범 당시 내세웠던 캐치프레이즈가 "국민이 대통령"임을 노 대통령이 잊지 않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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