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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의 도시', 마르크스주의를 만나다

[화제의 신간] '모순과 해방의 공간' 자본주의 도시 읽기

신개발주의자들의 음모로 도시공간은 개발과 투기의 장으로 전락해가고 있다. 약자들의 삶은 갈수록 힘들어지지만 담론과 정책 영역에서 이들의 득세로 이를 시원스럽게 들추어내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 메리필드의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남청수 외 옮김, 시울)는 도시를 연구하는 필자를 단번에 매혹시켜버렸다. 도시에 관한 우리의 닫힌 인식세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기대와 함께 자본주의 문제로 확대해 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도시 독해가 독자로 하여금 마치 드라마를 보는 흥분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란 프리즘에 비춰볼 때 근대도시는 자본주의의 여러 색으로 분해돼 나타난다. 거기에는 천국의 색깔도 있지만 지옥의 색깔도 있다. 그 프리즘을 우리의 도시에 들이대면 어떤 색깔로 분해돼 비춰질까?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함께 자본주의 도시를 새로 읽는다**

이 책의 줄거리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하의 도시를 논의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그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새로운 관점을 더해 도시를 읽고 실천해 온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인 메리필드는 이 책에 앞서 <변증법적 도시화>(2002년)를 출간했는데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는 자본주의 도시를 변증법적 방법으로 독해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도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변증법적 독해는 이중적이다. 자본주의 역사의 한 시대를 반영하는 도시의 내부 긴장에 대한 한 필자의 해석이 다음 논자의 이야기에서 역동적으로 반전되거나 보완되면서 전체적으로 하나의 통일된 근대 자본주의 도시론이 형성된다. 책의 원제목인 <메트로맑시즘(Metromarxism)>, 즉 '도시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축으로 묶이는 도시론을 말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마르크스와 그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가는 오디세이다.

도시 이야기에 동원되는 마르크스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로는 엥겔스, 벤야민, 르페브르, 드보르, 카스텔, 하비, 버먼이다. 쟁쟁한 마르크스주의자인 이들은 시대와 영역을 달리해 살았지만 마르크스주의란 관점을 공유하면서 시대와 장소의 차이에 의해 규정되는 도시의 모순을 읽고 변혁하고자 했다. 책은 이들의 도시 이야기를 개별 장으로 엮어 놓았다.

번역서의 제목 '......맑스주의를 만난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도시 이야기를 들으면서 독자들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새롭게 만난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여기서 '새롭게 만난다'는 말 또한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도시라는 텍스트를 통해 접하게 될 때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를 거대 담론이나 거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문제로 만나게 된다. 또한 마르크스로부터 버먼에 이르면서 도시의 심층 세계가 변증법적으로 들춰질 때 우리는 도시를 매번 새롭게 만나게 된다. 여기서 가장 큰 만남의 기쁨은 시대를 달리해 살면서 자본주의의 현장으로서의 도시를 해석하고 변혁시키고자 했던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를 만나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도시를 어떻게 해석하고 바꾸려고 했으며, 그들의 이러한 시도는 적실했는가? 우리는 이들의 도시론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마르크스에서 버먼까지, '모순의 공간'이자 '해방의 공간'인 도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발달과 도시화의 관계가 노동 분업에 입각해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가 도시와 농촌의 분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주목했다. 자본주의를 도시로의 쏠림 현상으로 봤던 그는 자본주의 도시화에서 파우스트적 힘, 즉 창조적이지만 파괴적이고 문명적이지만 야만적이며 활동적이지만 불안정한 변증법적 힘을 발견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도시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친구인 엥겔스의 몫으로 남겼다. <영국노동계급의 조건>과 <주택문제>를 통해 엥겔스는 자본 축적과 계급적 역동성을 규명하면서 특히 자본주의 계급적 모순이 주택문제를 통해 드러나는 점을 경험적으로 밝혀냈다. 이렇게 해서 산업화의 자본주의적 운동법칙과 도시화를 변증법적 관계로 연결짓는 도시마르크스주의가 엥겔스에 의해 최초로 정립됐다.

엥겔스 이후 근대 도시의 구조와 근대성에 대한 변증법적 경험을 포괄적으로 해석한 사람은 벤야민이다. 초현실주의, 유대적 신비주의, 카프카, 문화비평 등을 마르크스의 <자본론> 및 도시와 혼합시킨 덕분에 그의 변증법은 개방적이면서 비관적이다. '상품의 물신성'을 파리의 원형적 쇼핑몰과 연관시켜 분석한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벤야민은 파리의 화려함과 풍성함에 빠지면서도, 그 이면에 작동하는 무자비한 자본의 탐욕과 억압성에 깊은 혐오를 드러냈다.

일상생활, 공간, 철학, 마르크스주의 등의 지적 자원을 투입해 자본주의의 일상세계와 공간에 내재한 모순과 변혁 가능성을 보다 정치하게 들춰낸 사람은 르페브르다. 그에 의하면 신자본주의의 등장으로 자본 촉수가 생산에서 소비 영역으로까지 뻗어 일상세계인 도시공간은 본격적인 상품으로 변모했다. 공간을 둘러싼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대립은 도시 모순을 심화시키게 되는데, 거리 투쟁이나 축제 등은 이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으로 제시된다. 르페브르의 도시마르크스주의는 이렇게 해서 단절된 초기 인본주의적 마르크스를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르페브르 사상의 많은 부분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 초반 드보르를 선두로 하는 파괴적 정치적 집단인 상황주의자들에 의해 고양되고 발전됐다. 초기와 후기 마르크스, 루카치, 헤겔 등의 지적 유산을 관점으로 해 서술된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드보르는 상품세계가 사물의 세계라기보다 이미지의 세계임을 강조했다. 나아가 그는 거리 시위, 표현주의 예술, 불법점거, 데투르누망(우회), 인종차별 철폐 시위 등을 통해 스펙터클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는 다양한 실천운동을 제안했다.

1960년 후반 대격변기 직후 카스텔은 <도시문제>에서 알튀세의 구조주의 이론을 받아들여 도시를 분석하는 과학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의 도시론을 시도했다. 그에 따르면 후기자본주의인 오늘날 도시는 국가에 의해 제공되는 공적 재화와 서비스, 물품의 '집합적 소비'를 위한 장소로, 그리고 자본주의적 재생산과 위기관리를 위한 공간이다. 1970년대 중반 석유파동으로 국가재정이 위기에 처하면서 집합적 소비의 장은 계급투쟁의 장으로 전락했는데, 카스텔은 공간운동으로서의 도시투쟁을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는 새로운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임을 포기했다.

카스텔이 알튀세의 마르크스주의를 도시논쟁에 끌어들였다면, 하비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논리를 충실히 따랐다. <사회정의와 도시>를 출간 한 뒤 하비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공간 차원을 끌어들여 '자본의 도시화'를 설명하는 이론을 체계화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도시를 잉여자본이 저장되는 건조 환경으로 규정했다. 그에게 있어 건조 환경을 둘러싼 모순과 계급대립의 지점이 곧 바로 계급적 실천의 무대다. 최근 들어 하비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환경에 관한 논쟁에까지 개입하면서 '자본주의의 심화'와 관련성을 시종일관 주장하고 있다.

끝으로 버먼에 이르면, 도시세계에서 마르크스주의는 희망의 원천이라기보다 모험, 즉 책과 실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낭만적 여정이다. 버먼에게 있어서 마르크스주의는 특별한 종류의 인간에 대한 경험이다. <정체된 모든 것은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에서 버먼은 변화에 우선 순위를 둔 마르크스주의적 사고를 드러내는데, 그것은 '자유'로 단정되고 또한 융해적 전망에 입각한 것으로 평가된다. 방랑적인 도스토예프스키적 마르크스주의자라 불리는 버먼은 '우리가 위에서 세계를 바꾸려고 하는 동안 아래로부터 도시를 재건하는 도시마르크스주의'를 실천으로 옮기고 있다.

***상상력과 실천으로, 도시를 '매혹의 공간'으로**

이렇듯, 이 책은 마르크스가 고민했지만 구체화시키지 못한 도시화와 근대 자본주의의 문제를 그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도시 논의를 통해 해명하고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버먼에 이르는 도시 마르크스주의가 최종단계가 아니라 계속 열린 상태임을 저자는 주장한다. 논의를 열어 놓으면서 저자가 궁극적으로 찾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도시의 모순을 해결할 '주체와 희망'이다. 즉 메리필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견한 프롤레타리아의 가능성을 벤야민의 산보자로 흩뜨리고 르페브르의 코뮌으로 다시 집결했다가 드보르의 상황주의자로 분해한 뒤 다시 카스텔, 하비, 버먼의 암울한 도시 근대화를 훑어가면서 음지 속에서 자라나는 버섯처럼 근대 대도시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창출되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두 가지 미덕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자본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도시를 변증법적으로 다룸으로써 도시란 공간 속에 작동하는 다양한 모순들의 관계를 정치하면서도 친절하게 서술하고 분석하고 있는 점이다. 저자 자신의 논평을 빌리면, "얼마나 많은 도시주의자들이 벤야민, 르페브르, 혹은 드보르처럼 파리에 대해 그토록 친절하게 기술할 수 있을까? 볼티모어의 변덕스러움에 대해 어느 누가 하비보다 잘 묘사 할 수 있을까? 혹은 누가 버먼처럼 뉴욕의 거리에 관해 그토록 사랑스럽게 기술할 수 있을까? 그들 모두에게 도시주의는 정치경제학이었고 또한 한편의 시였다."

둘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도시를 이렇게 다루면서 도시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순의 현장이지만 도시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다양한 실천을 모색하고 있다. 도시를 모순과 실천의 장으로 보는 관점은 마르크스 이래 마르크스주의 도시론에서 지속되어 온 입장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도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구축되는 장이면서 동시에 그에 따른 모순 가령 계급 불평등과 적대가 심화되면서 해결되는 장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적 생산양식은 바로 이렇게 도시모순의 극복을 통해 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도시는 '모순의 공간'인 동시에 '해방을 위한 투쟁과 실천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미덕은 우리의 도시상황에서도 유의미하다. 우리의 도시담론은 놀라운 정도로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 주류 도시담론은 대개 연구기관, 교육기관, 정부기구 등에서 생성돼 통용되는 정책담론의 유형을 취하고 있고, 이념적으로 중산층과 시장의 입장과 친화적이다. 비판사회과학의 전통을 따르는 마르크스주의 도시론은, 최소한 우리나라 도시담론 지형에서는 운동담론 속에 일부 녹아 있다. 따라서 도시담론으로서 중심위치에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배척과 배제의 대상이다. 이러한 도시담론 상황은 우리의 도시 인식 세계를 황폐화하고 또한 한쪽으로 기울게 함으로써 도시모순은 물론 도시 자체가 갖는 다양성과 풍부함을 올곧게 해석할 수 없게 한다.

이런 점에서 도시마르크스주의가 우리의 도시담론에 포함된다면 도시에 관한 우리의 상상력은 그만큼 풍부하게 된다. 도시에 관한 상상력이 풍부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도시를 '매혹의 도시'로 만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 '매혹스러움'은 단순히 해석과 인식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시마르크스주의의 이상과 꿈에 따라 도시를 변혁시키는 실천이 전제될 때 담보되는 것이다.

우리의 도시적 상황이 얼마나 살기 힘든 것인지는 새삼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도시마르크스주의적 해석과 그에 따른 실천이 더 없이 기다려지는 때다. 이 책의 탐독은 우리에게 이에 대한 전망과 희망을 가져다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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