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때문에 경쟁 심해"…입사 1년 만에 병 얻어
대전의 한 상업고등학교에 다니던 유 씨는 3학년이던 해 여름 삼성전자에 합격했다. 대학 진학을 원했지만 가정형편 탓에 등록금을 스스로 마련하기 위해 택한 길이었다. 2년 정도 돈을 모아 대학에 가겠다는 계획을 안고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으로 향했다.
"처음 들어가니까 삼성 측에서 어느 라인에서 일하고 싶으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어느 라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 리 없었죠. 그런데 모교 출신 선배들이 주로 몰려 있는 라인이 있다고 해서 그쪽으로 가겠다고 했어요."
유 씨가 배치된 곳은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 반도체 칩에서 불량품을 가려내는 단계인 MBT1 라인이었다. 하루 3교대로 돌아가는 라인에서 유 씨는 주간과 야간 근무를 번갈아가면서 투입됐다. 처음에는 선배 '언니'를 따라다니면서 일을 배우다가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혼자 설비를 다루게 됐다.
유 씨가 하는 일은 전 공정에서 옮겨진 반도체 칩을 고온의 설비에 넣어 테스트하고, 한 번 걸러진 칩을 육안으로 직접 검사해 재차 불량품을 가려내는 일이었다. 검사를 마치고 다음 공정으로 넘어간 칩이 불량으로 판정되면 자신의 책임으로 돌아와 수당 등에서 불이익이 오기 때문에 항상 집중해야 하는 고된 일이었다.
"한 라인에서도 근무 조끼리 경쟁이 굉장히 심했어요. 교대 시간 전에 들어온 물량을 처리해야 제가 처리한 것으로 기록이 되거든요. 성과에 따라 급여가 차이가 많이 나서 하나라도 더 빨리 처리해야 했어요."
유 씨가 가장 바쁠 때는 작업 도중 우선순위로 처리되어야 하는 '긴급 런'이 들어올 때다. 긴급 런을 처리할 때 수당이 높고, 원래 남아있던 물량까지 한꺼번에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맡은 몇 개의 설비 사이를 정신없이 뛰어다니곤 했다고 한다.
"조그만 칩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검사판은 여성들이 들기엔 너무 무거워 회사에서 운반을 전담하는 남성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요. 하지만 긴급 런이 들어올 땐 너무 바빠져서 그들만 믿고 기다릴 수가 없어요. 무거운 판을 처리하다보면 손목에 무리가 가기 쉽고, 동료 중 한 명은 이 때문에 손목 수술까지 받기도 했어요. 지금은 설비가 많이 바뀌어서 그런 건 기계가 다 처리한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일해서 유 씨가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은 기본급 60만 원에 수당을 더해 120만 원 남짓. 국내 굴지의 대기업 공장에서 일하는 생산직 노동자의 급료라기엔 부족해 보이지만 연말에 최대 1000%까지 나오는 성과급이 큰 매력이었다고 한다. 기숙사와 공장을 오가는 생활에 딱히 큰 지출도 없어서 급료도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러다 유 씨가 만 19살이 된 이듬해 병마가 찾아왔다.
ⓒ뉴시스(자료사진) |
"칩 만진 손이 얼굴 닿으면 발진 일어"
입사 1년이 지난 유 씨는 코피가 잦아졌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갈수록 지혈이 잘 안되면서 나중에는 30분이 넘게 코를 막고 있어야 했다. 유 씨 뿐 아니라 동료 중에도 생리불순이나 유산을 겪는 등 각종 질환에 시달리는 이가 많았고 '여긴 오래 일할 곳이 못 된다'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았다고 한다.
"고온 기계에 칩을 심은 보드를 넣으면 그 안에서 녹아버린 불량 칩들을 제거해요. 테스트가 끝나고 설비를 열면 역겨운 냄새가 나는 고온의 증기가 확 올라왔어요. 보드를 꺼내 육안으로 그을음 등이 있는 칩을 골라서 손으로 빼야 해요. 칩이 워낙 작아서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다루기 어려워서 장갑의 손가락 부분 끝을 오려내 맨손으로 집었어요. 칩을 만진 손가락이 얼굴 등에 닿으면 발진이 일기도 했어요. 지하로 내려가서 작업할 때도 있었는데 그곳에 있는 설비는 훨씬 오래된 것들이었죠."
건강에 이상이 생겼을 때 회사는 어떤 조치를 했는지 물었다.
"다들 알아서 하는 거죠. 선배 '언니'나 대리님에게 말씀드리고 작업장을 나와 화장실에서 코피가 멈출 때까지 지혈했어요. 설비는 계속 돌아가야 하니까 언니들이 설비가 고장(잼)을 일으키지 않는지 봐주고 돌아오면 바로 밀린 물량을 처리해야 했어요. 평소에도 정신없이 바쁠 때가 잦아서 화장실도 잘 못 가 방광염에 걸린 언니들도 있었어요."
유 씨는 한 차례 병가를 내고 진료를 받은 후 다시 복귀했지만 몇 달 뒤인 2001년 11월 눈 혈관이 터지면서 다시 병원을 찾았다. 그는 그제야 골수가 혈소판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재생불량성 빈혈에 걸렸다는 판정을 받았다.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1000만 원짜리 약물치료를 한 달 받고 나서 이듬해 작업장에 복귀했지만 병이 다시 재발했다.
유 씨는 2차 약물치료를 받았지만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갔다. 병가를 다 쓴 그는 결국 회사를 퇴직하고 장기간의 투병에 들어갔다. 몸 안에서 스스로 혈소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탓에 정기적으로 혈소판 주사를 맞아야 했다. 혈소판 주사도 효과가 오래가지 않아 쉽게 피로가 찾아와 정상적인 활동이 힘들었다.
담당의사는 골수이식을 권했지만 이마저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가족 4명 모두 유 씨의 골수와 맞지 않았고 혈액은행에서 찾은 2명의 기증자 역시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일본 등 외국에서 골수를 찾는 방법도 있었지만 어마어마한 비용에 섣불리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지난 13일 유명화 씨의 아버지 유영종 씨 및 동생 유명숙 씨(가운데)와 함께 근로복지공단에 유 씨 등 5명의 삼성반도체 피해 노동자의 산업재해 신청서를 접수하고 있다. ⓒ프레시안(김봉규) |
"그 젊은 나이에 들어가 좋은 시절 아프며 보냈는데, 억울하죠"
유 씨는 2004년 아픈 몸을 이끌고 대전 소재의 한 전문대학 관광학과에 입학했다. 집과 병원만 오가는 투병생활에 지쳐 더 늦기 전에 대학생활을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에서다. 정기적으로 혈소판을 수혈받으면서 3개월을 버텼지만 결국 몸이 견디지 못하고 휴학계를 냈다.
이후 유 씨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다. 몸속의 혈소판 수치는 계속 떨어져 나중에는 혈소판 주사를 한 번에 15대씩 맞기도 했다. 주사를 맞을 때마다 몸에 발진이 생겼고 체내에 철분이 쌓이면서 장기 기능도 나빠졌다. 하지만 혈소판 수혈 없이는 계단을 오르내릴 힘조차 나지 않았다. 한 번은 주사를 맞지 않고 활동량을 최대로 줄여봤지만 배 안의 혈관이 터지면서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다.
유 씨와 가족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 씨의 질병을 삼성과 연관 짓지 않았다. 2007년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했던 황유미 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하면서 반도체 피해 노동자가 여론의 주목을 받았을 때도 온양공장에서 발병한 이가 없다는 사실에 나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박지연 씨가 끝내 숨졌다는 보도를 접하고 한 개인에게 일어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유 씨 옆에 앉아있던 동생 유명숙 씨(24)가 말을 이었다.
"박지연 씨 기사를 보고 연락을 취할 생각을 했지만 쉽지 않더라고요. 좀 전에 본 인터넷 기사가 얼마 뒤에 없어지기도 해서 '반올림'이란 단체 이름을 찾기도 어려웠어요. 결국 기사를 낸 기자들의 이메일로 문의를 해서 한 분이 반올림의 연락처를 보내줬어요. 저희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을 거에요."
반올림의 도움으로 유 씨는 지난 13일 다른 4명의 피해 노동자와 함께 근로복지공단에 집단 산업재해 신청서를 접수했다. 유 씨의 혈소판 수치는 일반인의 100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져 있고 최근에는 백혈구 수치마저 크게 감소한 상태다. 골수이식이 필요한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어 아버지 유영종 씨(54)의 마음은 갈수록 무거워져 간다.
"외국에서 골수를 들여오는 비용이 검사비와 이송비 등을 더해 4000~5000만 원이 들어간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혈소판 주사를 맞을 때 보험도 적용되고 헌혈증도 꾸준히 모이고 있어서 부담이 덜하지만 앞일을 생각하면 깜깜하죠."
현재의 심경을 묻는 말에 유 씨는 "좀 억울하죠"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젊은 나이에 들어가서 좋은 시절을 계속 아프면서 지냈어요. 안 그럴 수도 있었는데 공장에 가서 아팠던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들은 다 한창 좋을 나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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