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연대에 1백억 준 사사카와의 '전범 일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연대에 1백억 준 사사카와의 '전범 일지'

무솔리니 숭배, 항일유격대 토벌, 가미가제 창안, 테러-도박산업...

일본 A급 전범의 자금이 90년대 중반부터 연세대에 유입돼 연구기금으로 쓰이고 있는 사실이 또다시 쟁정화하고 있다.

이 문제는 이미 90년대 중반부터 연대 및 역사학계에서는 커다란 논란이 됐던 사안이나, 문제의 일본기금 핵심세력이 후소샤 역사왜곡교사를 만든 '새역모'의 핵심활동가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또다시 사회문제화하고 있다.

특히 연대에 자금을 제공한 A급 전범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는 무솔리니의 숭배자로 일-독-이(日-獨-伊) 3국동맹의 디딤돌 역할을 한 인물이며, 만주 항일유격대 소탕-가미가제 특공대 창설 등 각종 범죄행위를 저지른 대표적 전범이라는 점에서 일파만파의 파문을 예고하고 있다.

***A급 전범 돈 1백억대 연대에 흘러들어와**

연세대 교수협의회(대표 최종철)는 30일 발표한 자료집 '누가 일본 극우세력의 검은돈, 아시아 연구기금을 연세로 끌어들였는가'를 통해 "일본의 A급 전범 사사카와 료이치가 설립한 `일본재단'이 출연한 `아시아 연구기금'의 사무실이 연세대 새천년관에 최근까지 실재(實在)한 것이 확인됐고 일본재단의 자금이 연세대에 연구비로 유입돼 왔다"고 주장했다.

사사카와 료이치는 A급 전범으로 2차 대전 후 3년을 복역한 후 경정(競艇)을 도박산업화해 막대한 부를 축적, 일본 극우정치세력의 막후 '암장군(暗將軍)'으로 행세해왔다. 그는 또 일본재단(Nippon Foundation)을 세워 세계 유수 대학들에 기금을 제공하며 일본의 침략사를 희석시키려 부심해왔다. 때문에 미국의 하버드대를 비롯한 미국과 중국의 많은 대학들이 이 기금을 거부하거나 한도액을 정해 제한적 용도로만 사용했지만 정작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한국의 연세대는 이를 수용했다.

1995년 12월 송자 연대총장은 한일 수교 30주년을 명분으로 일본재단의 기금 출연으로 '한일협력 연구기금(당시 75억원 규모)'을 만들려다가 교수평의회 등 교수 및 학생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자, 그 다음해 6월 '아시아 연구기금'으로 이름을 바꿔 기금을 설립을 강행했다. 아시아 연구기금은 그후 10년동안 송자ㆍ김병수 전 총장과 정창영 현 총장이 이사장을 맡아 운영해왔다.

교수협의회의 조사 결과, 1997년도 아시아 연구기금의 임원진 23명을 살펴보면 송자 당시 총장 등 연세대 관계자가 12명, 일본측 대표가 7명인데 이 가운데는 사사카와를 미화하는 자서전을 집필한 교수 등 일본 극우세력이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일본재단의 현 이사는 역사왜곡의 `주범'인 `새 역사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핵심 활동가들이며 아시아 연구기금의 일본측 이사 가운데에도 이러한 극우인사가 포진된 것으로 드러났다.

교수협의회는 "`새역모'의 온상인 `일본재단'과 손잡은 정창영 총장과 관련자들은 모두 국민 앞에 사죄하고 아시아 연구기금을 즉각 해체하는 것은 물론 이와 관련된 교수는 모두 보직을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이와 관련, 아시아연구기금측은 현재 기금 규모는 1백억원 정도이며 연대교수 이외에 다른대학 교수들도 기금 지원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사사카와는 무솔리니 숭배자"**

A급 전범 사사카와 자금의 연대 유입은 그러나 90년대 중반부터 연대 및 역사학계에서는 커다란 논란이 됐던 사안이다.

당시 송자 총장에 맞서 반대운동을 치열하게 펼쳤던 박영재 당시 연대 사학과 교수는 계간 <민족 문제 연구> 1996년 봄호에 '전후 일본의 일제 잔재의 문제-사사카와 료오이치의 경우'라는 글을 통해 사사카와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사사카와 자금 유입의 부당성을 강력 제기했었다.

박 교수는 논문을 통해 당시 상황과 관련, "1995년 12월 4일, 연세대학교는 ‘일본 재단’의 기금으로 동 대학의 재단 이사회에 직속되는 ‘한일 협력 연구 기금’을 설치한다고 발표했다"며 "기금 유치를 추진한 연세대 관계자들은 일본재단이 '정치색을 띠지 않은, 일본 정부가 공인한 공익 사업 단체이므로 연구 기금으로써 문제되거나 하자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박 교수는 그러나 "연구 기금으로써 이 재단이 세계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라며 "이 재단은 ‘일본 재단’으로 개명(1995년)하기 이전인 ‘사사카와 재단’ 시절부터 세계 각 유명 대학에 연구 기금을 주겠다며 10년 이상 노력하여 왔으나 호응을 받지 못한 사실은 국외의 동아시아 전문가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재단의 설립자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의 전력이 추악하다는 것과 기금의 목적이 불순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박 교수 연구에 따르면, 사사카와가 본격적으로 우익 활동을 벌이게 된 것은, 1931년 3월 오오사카 정우회(政友會) 원외단에 의해 결성된 우익 단체 국수대중당(國粹大衆黨)의 고문으로 추대, 9월에 총재가 되면서였다. 이 때 그의 심복으로 활약한 인물로는 후지 요시오(藤吉男)와 요시마츠 마사카츠(吉松正勝) 등이 있었다.

일본주의를 지도 정신으로 표방한 국수대중당은 우익 단체 중에서도 이색적인 존재였다. 무솔리니의 숭배자임을 공공연히 표방했던 사사카와는,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을 모방해서 당원에게 흑색 국방복을 착용케 했다. 기관지로는 국방사 시절을 계승해서<국방<을 계속 발간했고, 전위대로 ‘국수정신대’, 외곽 단체로서는 ‘국수의용비행대’를 결성하여, 23개 지부, 1만 5천의 당원과 20대의 자가용 비행기까지 갖추고 왕성한 활동력을 보였다. 행동 우익으로서 폭력단적 성격이 농후한 국가주의 단체였다.

***'가미가제 특공대'의 배후. 만주 항일유격대 토벌도**

박 교수 연구에 따르면, 사사카와는 1931년 만주 사변이 발발하자 곧 군수 산업체인 ‘국수 광산’, ‘일본 광업’ 등의 주식을 매점하고, 사장・감사역에 취임하는 등 투기 활동에 나서는 한편, 이듬해에는 ‘국수대중당’에 ‘국수의용항공대’를 설립하고 ‘1인 1기 1함 격멸주의’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 구호가 ‘카미가제(神風) 특공대’의 창설로 이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1933년에는 자신이 거느리는 인력과 자금으로 오사카에 일본 최초의 민간 ‘방공 비행장’을 건설해 제국 육군에 제공하기도 했다. 육군 장관 토오조오 히데키(東條英機)의 감사장이 뒤따랐다.

1932년 괴뢰 만주국 성립 직후에는, 간부들을 거느리고 만주 주둔지를 방문한 뒤, 허수아비 집정 푸이(溥儀)와 회담도 가졌다. 현지 신문들은 이 일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귀국 후 이듬해 일본의 국제 연맹 탈퇴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대정익찬(大政翼贊)류의 연설 활동으로 대륙에 대한 적극 정책을 홍보하였다. 그의 주장은 곧 일본의 전선 전면화와 ‘중·일 전쟁’의 발발로 이어진다.

사사카와는 폭력을 동반한 투기 활동도 벌였다. 홋카이도에 광구를 가진 ‘이리도스민 광업’과 ‘오사카 철도’(현재의 긴테츠)의 주식 매점 과정에서 폭력을 동원하다가 폭력단 일제 검거에서 폭력행위 단속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당원 14명과 함께 3년여 동안 오사카 북구 형무소에 수감된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함께 수감된 후지 요시오와 코다마가 옥중에서 조우하게 되어, 출옥 후 코다마는 ‘국수대중당’의 동아부장이 된다. 코다마는 1931년 초 대장대신 이노우에 준노스케(井上準之助) 암살 기도로 체포, 출옥 후 만주에서 항일 유격대 토벌에 참가하기도 하고, ‘독립 청년사’의 맹주로서 고관 암살 계획을 세우는 등 테러와 수감을 되풀이하던 인물이었다.

***日-獨-伊 3국동맹의 디딤돌 역할**

출옥 후 사사카와는 재빨리 ‘재기’를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 1939년 12월 유럽 전선을 시찰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제 ‘야마토(大和)호’로 독일, 이탈리아로 날아가 이듬해 1월 로마에서 무솔리니와 단독 회견을 한 것이다. 회견 사진을 보면 사사카와는 문장이 찍힌 일본 복장을 하고 있는데, 당시 일본에서 외국 요인과 회견할 때 흔히 양복을 착용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 회견은 일본 해군의 ‘군신(軍神)’이라 불리던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의 권고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사사카와는 1930년 말부터 약 3년간 야마모토가 해군 항공본부 기술부장이었을 때 비행기 관계로 면식이 있었다. 일본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된 이 회견은 시기적으로 일-독-이 3국 동맹 체결(1940년 9월) 직전이어서 3국 동맹 성사의 디딤돌이 되었다고 알려졌다. 그에게는 ‘명예 회복’의 계기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우익 활동에 다시 뛰어든 사사카와는 1941년 동남아시아를 시찰하고 ‘남진 협의 사무소’를 설치하는 등 ‘남진론’에 적극적이었으며,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에는 ‘미·영 격멸 국민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42년에는 ‘국수대중당’을 ‘국수동맹’으로 개칭하고 대중 활동을 강화하는 한편, ‘익찬 선거’에서는 오사카 제5구에서 출마하여 중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A급 전범에서 도박산업으로 전후 정-재계의 '암장군'으로**

패전 후 사사카와는 ‘국수동맹’을 개조, ‘전국근로대중당’, ‘전국근로자동맹’을 조직하는 데 관여했지만 미 점령군 당국이 모두 불법화하였다. 그는 1945년 12월 키시 노부스케(岸信介), 코다마 등과 함께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 스가모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사사카와와 코다마는 미 통합 참모본부가 맥아더 사령관에게 내린 전범 용의자 체포 명령 중에서 ‘초국가주의적, 폭력적 결사 및 애국적 비밀 결사의 주요 인물’로 체포・투옥되었다.

사사카와를 심문한 CIC(대적 첩보국)의 심문 내용을 담은 IPS(국제 검찰국) 자료에 따르면, 그는 일관되게 자신의 전쟁 책임을 부인하면서 오히려 군과 정부에 반대해 왔다고 강변했다. 그는 전쟁 책임 혐의로 조사해야 할 대상으로 고노에(近衛), 도조(東條), 스즈키(鈴木) 내각의 전각료 외에 반관제 단체의 간부 등 2~3백 명에 달하는 명단을 내놓기도 했다.

1948년 사사카와는 기시, 코다마와 함께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된다. 사사카와는 옥중에서 <라이프>를 보고 모터 보트 경주가 자금줄이 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얻고, 석방되자 곧 경정(競艇)을 도박사업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사사카와는 1951년 ‘모터 보트 경주법’을 국회에 제출, 그와 유착된 자민당 의원들의 지지로 통과시킨 뒤 ‘전국 모터 보트 경주회 연합회’(약칭 ‘전모련’)를 설립했다. 사사카와는 1955년 ‘전모련’ 회장에 취임해 실권을 장악하면서 감독 관청인 운수성의 입김에서 벗어나 자신의 족벌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1962년에 ‘(재단법인) 일본 선박 진흥회’가 설립되자 그 회장에 취임한다. ‘전모련’ 회장까지 겸임한 사사카와는 이로써 경정에 관한 모든 실권을 한손에 장악하게 되었다.

사사카와는 모터 보트와 관련된 각종 부대 사업, 예컨대 신문, 주권(舟券)의 인쇄, 발권기, 모터 보트 및 엔진 제작, 유선방송, 광고․선전과 빌딩 관리 등에 이르는 거의 모든 업체에 막내 동생 료오헤이(了平)와 3남 요오헤이(陽平) 등 아들 3형제를 비롯한 친인척들을 우두머리로 앉힘으로써 이른바 ‘사사카와 패밀리’를 구축했다. 이렇게 하여 사사카와는 ‘전모련’과 ‘선박 진흥회’를 양 날개로 막대한 자금을 좌우할 수 있게 되었고 개인적인 치부 구조를 정착시켰던 것이다.

***일본교원노조 탄압, 일본의 재무장 주장**

한편 그는 전전의 파시스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1959년 ‘전일본 애국자 단체회의’(약칭 ‘전애회의’)의 고문에 취임한다. ‘전애회의’는 ‘국체호지(國體護持)’와 ‘반공 협동 전선’을 2대 강령으로 내걸고 일본의 재군비, 천황제 옹호를 주장했으며, ‘일본교원노조’에 대한 탄압으로 악명을 떨쳤다. 또한 평화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여 제5회 전국 대회에서는〈대일본 황국 헌법 초안〉을 채택․결의하기까지 했다. 1960년 ‘안보 투쟁’ 당시에는 기시 노부스케 내각의 미·일 안보 조약 강행 개정에 항의하던 학생과 일반 시민에 대한 무차별 습격을 계획하고 인원을 동원하였다. 기시 내각은 이를 못 본 척 눈감아 주었다. 사사카와는 이 전투적 우익 연합 조직에 적어도 1976년까지 고문의 자리를 유지했다.

1972년 이후로도 사사카와는 ‘일본 선박 진흥회’를 중심으로 ‘B&G 재단’ 등 ‘사사카와 그룹’을 구축하여 도박 산업을 기반으로 조성한 방대한 자금에 의해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속시켜 나갔다. 설립 당시 1억 3천만엔이었던 ‘일본 선박 진흥회’의 자산액은 1980년이 되면 무려 1천2백44억6천만엔에 달했으며, 1990년의 경우 경정 사업의 총 매상고 2조2천억엔 중 3.3%에 해당하는 7백26억 엔이 ‘일본선박 진흥회’의 교부금으로 각 방면에 뿌려졌다.

사사카와 일족에 의한 ‘일본 선박 진흥회’의 지배와 자본 축적, 사사카와 개인의 기행은 여러 차례 일본 언론의 표적이 되어 비판 받았지만, 집권 자민당의 실력자와 재계 지도자들과의 폭넓은 인맥, 자신의 자금․정보력에 의해서 대개 무마되었다.

사사카와는 ‘일본 선박 진흥회’의 교부금 중 국제 관계 협력 원조 사업을 확충하여 재해 원조, 난민 대책, 의료, 보건 위생, 사회 복지와 국제 친선, 학술 연구 등 각 분야별로 자금을 살포했다(1990년의 경우, 82억 5천만 엔). 그는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와 같이 ‘노벨 평화상’을 받고 싶어했지만, 1982년에 ‘국제연합 평화상’을 수상하는 데 그쳤다. 그는 1995년 7월 사사카와가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이같은 사사카와의 전범행위는 이미 1996년 박영재 교수에 의해 적나라하게 제기됐으나 송자 당시 연대총장은 이를 묵살하고 사사카와의 돈을 받아들였으며,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재차 공론화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과연 연대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예의주시할 일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