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덕분에**
이때 탱이는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우리 쌀 살리기 백인 백일 걷기'를 갔을 때다. 상상이는 학교문제가 해결되니 밝게 뛰어놀았다. 집안일도 잘 거들고, 이웃에도 놀러 다니고. 어쩌다 누가 깜짝 놀라며 학교에 안 갔느냐고 물으면, "교장 선생님 허락 받아 집에서 공부한다"고 대답한다. 또 공책 앞장에 학교이름 쓰는 곳에 '집학교'라 써넣었다.
하지만 산골 생활은 심심하다. 텔레비전이 없고 인터넷도 안 된다. 시간 맞춰 어디를 갔다 올 일도 없다. 사람이 귀하니 함께 놀 사람도 귀하다. 하다못해 가겟집이라도 다녀올 수도 없다.
새소리에 귀 기울이며 하루를 시작해, 꽃구경하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 무슨 일을 하지 않으면 따로 할 게 없다. 햇살이 좋은 날은 그래도 괜찮다. 자연스레 밖에 나가게 되고 그러면 자연이 함께 하니 뭘 하더라도 한다. 그런 날은 저녁에 노곤하고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잠이 온다. 그런데 날이 궂은 날. 그것도 며칠째 궂은 날이 이어지면 몸살이 난다. 뭐 재미있는 게 없을까?
어른인 나도 때론 몸살이 난다. 차를 몰고 도시로 나들이 가기도 하고. 가끔 판을 벌여 이웃들과 논다. 하지만 이렇게 지내려면 에너지가 많이 든다. 노는데도 힘이 들고, 생각지 못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다시 고요한 생활로 돌아오려면 자신을 추슬러야 한다.
산골 생활 몇 년에 이제 되도록 심심함을 즐기는 지혜가 생겼다. 심심함을 즐겨 보니 여기에 산골 생활의 맛이 담겨있다. 혼자 논밭에서 일을 할 때, 혼자 산을 다니며 나물을 할 때 참 나를 만날 수 있고, 자연이 가까이 다가온다. 집안에 여럿이 들어앉았을 때는 만날 수 없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내가 이렇게 바뀐 데는 탱이 도움이 컸다. 탱이 말이 심심한 거는 집중할 거를 찾지 못해서란다. 뭔가 집중할 거를 찾으란다.
그동안 나는 진정 하고픈 걸 찾고 싶어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늘 사람 사이에 관심을 두니 사람 사이에 벌어진 일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혼자 고추밭에서 일을 해도 손은 일을 하지만 내 마음은 눈앞에 고추에 집중하지 못하고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곤 하지 않는가. 심심하니 단순해지고, 혼자 있어보니 내가 어떤 상태인지를 알 수 있다.
그동안 나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누군가 밖에 누군가에 집중하곤 했구나. 텔레비전이건, 인터넷이건, 친구건.
심심함을 끌어안고 뒹굴다 보면 진정 자기가 하고픈 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면 한동안 거기 푹 빠져 지내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많은 걸 얻는다. 나는 한동안 자연과 친구하기를 했다. 어디론가 가고 싶으면 뒷산에 간다. 산은 기다리고 있었던 듯 내 친구가 되어준다. 그 덕에 <자연달력 제철밥상>(들녘 펴냄)이란 책을 낼 수 있었다.
상상이 역시 심심함을 이겨나갔다. 상상이는 남자애라 그런지 운동에 집중을 했다. 월드컵 때는 축구. 좀 커서는 농구, 집 앞 길이 포장된 뒤로는 스케이트보드. 몸이 약하니 스스로 생각해도 건강해져야겠다 싶었나 보다. 자기 치유를 시작한 거다. 운동을 하고 땀을 좍 흘리고 나면 개운한 맛. 그 맛에 푹 빠졌다.
또 책 읽는 재미를 알기 시작했다. 글자를 모를 때는 그림을 보고 글자는 읽어 달랬다. 만화책을 들고 제 아버지를 찾아가 밭 한쪽에 앉아 만화책을 읽고 돌아와 혼자서 다시 읽고. 그러다 글자를 깨우쳐 혼자 읽으니 상상이 역시 책을 열심히 읽는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오면 상상이는 그날로 다 읽는 것 같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되풀이해 읽어 자기 것이 되면 그만 읽는다. 운동하고 책 읽고.
상상이가 읽은 책 가운데 인상 깊은 책이 하나 있다. <선이골 일곱 식구 이야기>. 선이골에서 보낸 책이 오후 서너 시쯤 배달되어 왔다. 그날 저녁부터 붙잡고 읽기 시작하더니 그 다음날 늦은 아침 먹는데 거의 다 보았다 한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난 뒤 상상이 자기 방을 열심히 치운다. 그 책에 아이들이 아침마다 방을 치운다는 내용을 보고 자기도 느끼는 게 있었나 보다. 아침에 이부자리 갤 때, 저녁에 이부자리 깔 때, 어디 나갈 때 자기 딴에는 정성껏 치운다.
그밖에 상상이가 집중을 한 것들을 들어보면, 고스톱, 오리 기르기, 메뚜기 잡기, 바둑…. 여기서는 고스톱 이야기를 해보겠다. 지지난해 겨울에 상상이는 고스톱을 독학으로 배웠다. 그러더니 탱이에게 알려주었다. 둘이서 고스톱을 하려니 재미가 없지. 아이들에 휩쓸려 결국 나까지 끼게 되었다.
작지만 따끈따끈한 상상이 방에 나 상상이 탱이 이렇게 셋이 둘러앉는다. 아차, 그 전에 판돈을 준비하는 걸 빠트릴 뻔했다. 고스톱을 그냥 하긴 재미가 없어 판돈을 마련한다. 팝콘옥수수를 튀기거나, 땅콩을 볶거나 해서 세 그릇 나눈다. 그걸 한 그릇씩 차지하고 앉아 한 손으로 먹어가며 한 손으론 화투를 치며 아이들과 노는 재미도 괜찮았다. 그리고 돌아온 봄이 되자 나는 땅콩 농사를, 상상이는 팝콘 옥수수 농사를 열심히 했다. 다음 겨울을 기대하며.
그런데 돌아온 겨울에 상상이가 바둑에 푹 빠졌다. 이번에도 바둑을 독학으로 배웠다. 신문이 오면 바둑 란을 오려 혼자서 공부를 하고 컴퓨터와 대국을 벌인다. 책을 사서 보기도 하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도 바둑 책을 빌린다. 상상이의 지극정성에 제 아버지가 넘어가 하루 한 판씩 둬준다.
그래도 가끔 심심하다. 더구나 인터넷 게임이 하고 싶은 생각이 들면 참을 수 없이 심심하다. 우리 집에는 인터넷 전용회선이 들어오지 않아 인터넷 게임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이 '어디 간다'는 소리만 하면 귀가 쫑긋. 밖에 나가면 어디건 인터넷이 되지 않는가. 오늘도 내일 아침에 내가 면에 나갈 일이 있다니 일찍 잘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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