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의 문제 제기로 고 육영수 여사의 피살 의혹이 급부상하고 있다. SBS는 12일 밤 보도에서 7발의 총성 분석을 통해 육 여사가 문세광이 아닌 경호원의 총격에 의해 사망했을 가능성을 비롯해, 당시 박종규 경호실장의 오발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장봉화양 사망의 미스테리를 비롯해 여러 의혹을 제기했다. SBS는 결론부에서 "문세광 사건으로 인해 앞서 1973년 10월의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일본과의 외교에서 궁지에 몰렸던 박정희 정권이 일거에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다"고 보도, 이번 의혹이 '단순 오발사고의 은폐' 차원을 넘어선 고도의 정치적 음모일 가능성도 제기했다.
SBS의 이번 취재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것이 육여사 피살 사건 당시 수사본부에 참가했던 이건우 당시 서울시경 감식계장의 1989년 '양심선언'이다. 이건우씨는 현재는 고인이 되었으나(1999년 사망), 육 여사 사망 15주기 되던 1989년 8월 월간 <다리>(1989년 9월호)와의 인터뷰에서 "육여사는 문세광 총에 죽은 것이 아니다"라는 증언을 해, 그동안 물밑에서 회자되던 육영수 피살 의혹을 최초로 공론화하며 세상을 흔들었다.
소설가 노가원씨와의 인터뷰 당시 67세였던 이건우씨는 33년간 경찰생활을 마친 정년퇴직 상태였다. 강원도 춘천 출신인 이씨는 춘천사범 졸업후 잠시 교직생활을 하다가 한국전쟁 발발후 부산에 피난갔다가 경찰에 투신, 경찰대학 교수계장을 거쳐 서울시경 감식계장(계급 경감)을 끝으로 1983년 정년퇴직했다.
이건우씨는 <다리>지와의 인터뷰에서 "육여사 사건 있지 않소. 보시오 그게, 육여사가 문세광의 총에 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오"라며 "군사정권에서는 그런 조작된 사건이 일어나게 돼 있단 얘기요.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으니, 그들 애부 쿠데타가 없지 말란 법이 없잖소. 10.26을 보시오. 그놈이 그놈 아니오"라는 폭로를 시작으로, 자신이 수사본부의 일원으로 현장에서 발견했던 각종 의혹을 제기했다.
<프레시안>은 <다리>지 인터뷰 전문을 입수, 이건우씨가 제기한 의혹을 사안별로 정리했다.
***사라진 '탄두'**
이씨에 따르면, 당시 '박대통령 저격사건 수사본부'는 김일두 서울지검 검사장을 수사본부장으로 검찰의 정치근 서울지검 공안부장 검사(87년 법무장관 역임), 김영훈 서울지검 공안검사, 중정의 아무개 6국장, 경찰의 김구현 치안국 감식계장과 이건우 서울시경 감식계장 등 6명으로 구성됐다.
이 계장은 사건 다음날인 1974년 8월16일 국립국장 현장검증을 나갔다. 현장검증에서 그는 4발의 탄흔을 발견할 수 있었으나, 탄두는 한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씨는 "왜 탄두가 없느냐 이거요. 이게 중요해. 이 탄두가 있어야 육여사를 관통한 총알이 누구의 총에서 발사되었는지 확인할 거 아니겠소. 그런데,......없었어. 한개도 찾아내지 못했다구."
탄두를 찾지못해 구석구석을 뒤지고 있던 이 계장에게 국립극장 소도구 주임이 "헛수고예요"라며 "그거, 어제 밤에 청와대에서 다 쓸어갔어요"라고 말했다. 이 계장이 "청와대라니?"라고 묻자, 주임은 "경호실이지 어디겠어요"라고 답했다.
이같은 근원적 의문에도 불구하고 현장검증은 16일 하루만에 서둘러 종결됐다.
이 계장은 나중에 또하나의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문세광과 경호실의 권총이 같은 종류의 리볼바였다는 사실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계장은 강한 의혹에 사로잡혔다.
***문세광이 타고온 '위장번호판' 외제 고급승용차**
이계장은 현장감식 과정에 또하나의 의혹을 발견했다. 문세광이 타고온 고급승용차가 위장번호판을 단 차량이었다는 사실이다.
문세광이 타고온 '서울 2바 1091'호의 검은색 승용차는 포드 20M으로, 서민으로서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고급승용차였다. 이계장은 자동차 등록사업소로 전화를 걸어, 이 차량이 누구 소유인가를 물었다.
등록사업소 답은 그러나 "그런 차량번호는 등록돼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 계장은 이에 "뭐요? 그런 차량 번호는 등록되지 않았다고 그럼, .......위장번호란 얘기요? 다시 한번 확인해주시오"라고 재차 조회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 계장은 이를 계기로 국내에 문세광의 '공범'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수사본부는 그로부터 닷새 뒤인 8월21일 "문세광의 친척 등 70여명을 조사했으나 국내공범의 혐의를 잡지 못했다"며, 문세광의 단독범행이라고 발표했다.
***문세광은 자신의 총에 맞지 않았다**
사건 발발후 10일째인 8월24일 이 계장은 처음으로 문세광을 검찰로 송치하는 과정에 처음으로 대면할 수 있었다. 이 계장은 당시 상황을 "문세광의 손에는 붕대가 감긴 채 수갑이 채워 있었고 총상을 입었다는 다리는 얄미울 정도로 멀쩡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그해 10월19일 서울형사지방법원 제8부(재판관 권종근 부장판사)가 문세광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면서 검찰 기소장에 기초해 작성한 판견문에는 "문세광은 국립극장에서 오전 10시23분경 청중들이 박대통령의 연설을 경청하고 있는 사이에 좌석에서 앉은 채로 허리춤에 은닉한 권총을 뽑으려다가 방아쇠를 잘못 건드려 1발이 오발돼 피고인 자신의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게 됐다"고 적시돼 있다. 대퇴부(大腿部)란 흔히 '넓적다리 부위(허벅다리 부위)'를 가르키는 해부학적 명칭이다.
이 계장은 이와 관련, "제1발이 오발된 것은 사실이지만 (법원 판결문과 달리) 문세광이 가벼운 총상을 입은 부분은 대퇴부가 아니라 오른쪽발 오른쪽 부위였다"며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었다면 현장검증때 문세광이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검찰에 송치할 때, 그러니까 관통상을 입은 10일후 그렇게 멀쩡할 수 있겠는가"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이 계장은 또 문세광이 자신의 오른발을 가볍게 스쳐간 첫번째 총알 발사에 대해 "나는 그 첫발의 총성이 누군가 공범에게 보내는 '이제는 내가 튀어나간다'는 신호였다고 믿고 있소"라며 "그 신호탄으로 수라장이 되었을 때 누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알게 뭐요"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육여사는 문세광 총에 맞지 않았다**
이 계장은 현장검증에서 4발의 탄흔을 발견했다.
이 계감은 당시 수사수첩에 "제1탄은 오발, 제2탄은 박정희 대통령이 서있던 연단 왼쪽 3분의 2정도의 상단에서, 제3탄은 탄상뒤의 벽정면에 게양돼 있던 태극기의 왼편 중간에서, 제4탄은 3탄 발사후 달려가다가 독립유공자석에 앉아있던 서대문세무소 재산세계장 이대산씨가 발을 내밀어 문세광의 다리를 걸자 쓰러지면서 발사된 까닭에 천장에서 발견됐다"고 적었다.
이 계장은 이어 "다섯발째 실탄은 권총에 남아있었음"이라고 적었다. 이같은 사실을 수사수첩에 정리하면서 이 계장은 속으로 '문세광은 육여사를 피격한 범인이 아니다!'라고 확신했다. 문세광이 소지한 리볼바 권총은 다섯발의 실탄밖에 장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계장이 이같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던 또하나의 근거는 육여사가 총알을 맞은 관통상 위치였다. 육여사가 문세광 총에 맞았다면 관통상은 육여사 얼굴의 정면이나 약간 오른쪽이 돼야 했다. 그러나 이 계장이 피격후 육여사가 실려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을 찾아가 수술을 담당했던 최모 조교수를 만난 관통상 부위를 물은 결과, 최 조교수와 다른 의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이 계장은 '보이지 않는 힘'이 어느 새 여기까지 미쳤단 말인가라고 의혹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문세광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10월19일 서울형사지법 판결문에는 "문세광의 제3탄은 불발되고, 제4탄은 약 18.2미터 전방 단상에 앉아있던 대통령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향하여 발사, '우측 두부'에 명중시키고"라고 적시돼 있다. 반면에 육여사 일대기를 다룬 <육영수 여사>에는 육 여사가 총을 맞은 뒤 "육여사의 상반신이 (단상의) 왼쪽으로 기울어졌다"고 적고 있다.
이 계장은 이와 관련, "육 여사가 우측 두부에 관통 총상을 입었다면 과연 상반신이 왼쪽으로 기울어졌을까"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검찰 기소장에는 장봉화양 살해범도 문세광으로 기록**
이 계장은 그러나 이같은 숱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에 보내는 보고서와 검찰 기소장을 거짓으로 작성했다고 밝혔다. 기소장에는 육여사뿐 아니라 합창단에 포함됐다가 참변을 당한 장봉화양까지 문세광이 살해한 것으로 작성했다.
장봉화양의 경우는 사건직후 수사당국이 박종규 경호실장의 오발로 죽었다고 발표까지 했던 사안이나, 검찰 기소장에는 문세광이 죽인 것으로 기록됐다. 이 계장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만약 기소장에 장봉화양이 살해된 것이 박종규 경호실장의 오발에 의한 것이었다고 작성한다면, 검찰에서는 박을 소환해서 조서를 받아야 하고, 기소냐 불기소냐를 결정해야 했소. 그리고 경호실장으로서, 대통령 경호과정에서 장봉화양을 쏘았다고 판단된다면 이는 업무과실치사가 되는 것이고.......그러나 경찰에서 송치되는 기소장에서부터 육여사와 장봉화양의 살해범인은 문세광일뿐이었소. 아니, 애당초 박종규 경호실장은 이 사건과 무관하게 되어 있었지. 결국 이 사건은 시나리오를 짜놓고......."
이 계장은 이같은 거짓 공소장 작성 이유와 관련,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그뿐만이 아니오. 당시 내가 이것을 공개하였더라면 우리는 모두 죽었을 거요"라고 말했다.
이 계장은 또 이번 사건의 배경과 관련, "당시 이 사건으로 경찰 4,50명이 억울하게 면직되었소. 그들은 정말 억울하게 희생되었소. 왜 경찰이 희생당해야 하오. 저희들 내부싸움에 경찰이 왜 모가지를 당해"라고 말해, 이번 사건을 박정희 정권내 암투의 산물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 계장은 "나는 부도덕한 정권 밑에서 권력의 시녀노릇으로 한평생을 보낸 사람이오. 그 정권들이 육여사도 죽게 했소. 이제 불행한 사건들이 없기를 바라오"라며 '경찰 중립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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