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박정희 대통령 저격과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3천30여쪽 분량의 다량의 외교문서가 공개됐지만 육영수 여사를 살해한 인물이 과연 문세광인지, 제3의 저격범이 있는 것은 아닌지, 문세광은 입국 후 행사장 진입까지 왜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는지, 공범이 있던 것은 아닌지 등 숱한 의문은 그대로 남아있다.
***육영수 여사는 문세광에 의해 피격됐나**
1974년 8월 15일 육 여사 피격사건에서 가장 큰 핵심적인 의혹은 다름아닌 육 여사가 과연 문세광의 총에 의해 사망했냐는 기본적인 물음이다.
당시 수사결과를 통해 현장의 총탄 발사 상황을 복기해보면 다음과 같다. 문세광은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제29회 광복절 기념식 행사장인 국립극장 뒷자석에 앉아 있다 허리에 차고 있던 스미스 웨슨 38구경 리볼버 권총을 꺼내 들다 방아쇠를 잘못 당겨 자신의 허벅지에 관통상을 당하게 된다.
문세광은 그러나 좌석사이의 통로로 나와 연단으로 돌진, 두 번째 총탄을 발사했고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기념사를 읽던 연설대 왼쪽 편에 맞았다. 그는 계속 권총을 발사했고 세 번째는 불발탄, 네 번째는 육 여사의 우측 머리를 명중시켰다. 그는 다섯 번째 마지막 발을 발사했으며 이는 연단 뒤 게양된 태극기를 맞췄다.
이같은 수사결과는 그러나 서울시경 감식계장으로 있다 99년 10월 사망한 이건우 씨에 의해 강한 의혹을 받게 된다. 이건우씨는 74년 사건 당시 현장검증을 하며 수사본부 요원으로 참여했었다.
그는 89년 월간 <다리>와의 인터뷰에서 “육 여사는 절대로 문세광 총탄에 죽지 않았으며 이 사건이 숱하게 은폐되고 조작됐다”고 주장,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우선 “탄흔에 기초할 때 1탄은 오발, 2탄은 연단, 3탄은 태극기, 4탄은 천장에 맞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당시 수사결과 발표와 한 발의 탄착지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수사결과에서는 한 발이 육 여사를 저격했다고 했으나 그는 천장에 맞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계장은 그러나 “육 여사를 숨지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이 가나 지금은 밝힐 수 없다”고 주장한 뒤 그대로 사망해 그의 진술로 퍼졌던 의혹은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상태다.
***‘제 3의 인물’이 있던 것은 아닌가**
이와 관련해 제기되고 있는 또다른 의문은 극장안에 ‘제 3의 인물’이 있었거나 육 여사는 경호원의 총으로 사망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당시 수사발표에 따르면 현장에서는 모두 7발의 총성이 울렸다. 문세광의 권총은 총 5발이 장착되는 총이며 이 가운데 한 발이 불발탄으로 권총 약실 안에 남아있어 문세광은 모두 4발을 발사한 것으로 결론났다.
불발탄의 총성이 안울렸다는 분석이 가능하다면 나머지 3발의 총성은 누구 총에서 나온 것인지가 의문의 초점이다. 그 중 한발은 박종규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 문세광을 겨냥하다 빗나가 합창단원 장봉화양을 맞춰 장 양은 사망했다.
그렇다면 2발의 행방이 묘연한 상태로 경호원이 쏜 것인지 아니면 ‘제 3의 인물’이 쏜 것인지 불분명하다. 탄흔만 따진다 하더라도 문세광 허벅지, 육 여사, 합창단원 장양, 연단, 태극기, 천장 등 6곳에 불과하다. 이와 관련 이 계장은 “현장검증도 하기 전에 이미 청와대 경호실에서 탄두를 수거해 갔다”고 밝혀 그 이유와 관련해 의문이 일고 있다.
게다가 무대 왼쪽에서 한 명이 육 여사 쪽으로 뛰어 올라가 여사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뒤로 숨는 듯한 모습을 취했으며 동시에 또 다른 한 명이 앞서 올라간 사람 뒤에서 권총을 겨냥하고 있었으나 그 총구는 육 여사를 향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어 의문을 더하고 있다.
***입국에서 행사장 출입까지 손쉽게...공범 존재 여부 **
이밖에도 문세광이 어떻게 아무 제지 없이 입국해서 행사장 출입까지 가능했는지도 의문거리다. 문세광은 김포공항을 입국할 당시 트랜지스터 라디오 케이스에 권총과 탄알을 숨겨 들어왔으나 아무 제지를 받지 않았고 위조 여권을 사용했는데도 재일동포 비자를 받아 입국할 수 있었다.
행사당일의 행적은 더욱 의혹을 사고 있다. 경호가 삼엄한 대통령 행사장에 ‘승차입장’이라는 출입비표도 없이 들어간 것이다. 이와 관련 행사 당일 청와대 경호 과장이 이례적으로 대통령 도착 5분전까지는 차량출입증이 없더라도 통과시키고 몸 수색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증언도 나왔고 극장 로비에서 문세광은 청와대 경호계장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아울러 그가 머물던 조선호텔 방에 제3의 인물이 함께 있었고 그가 타고온 고급 승용차인 포드 20M의 번호판이 위장 번호판이었다는 주장도 나와 그가 과연 단독범행을 저지른 것인지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됐다.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 없나**
이외에 이번 사건과 김대중 납치사건과의 연관 여부이다. 20일 공개된 문서 가운데 8월 21일 한국 외무부 동북아 1과가 작성한 ‘대통령 저격사건과 관련한 대일조치방안’에 김대중 납치사건이 언급돼 있기도 하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육 여사 피격 사건 1년전인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발생했으며 이를 일본 언론은 대서특필하면서 중앙정보부 관련설을 집중 제기했다. 일본 정부도 주권을 침해한 사건이라며 강력 비난했다. 이에 따라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가 특사로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미국에서도 한국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박 정권이 상당히 압력을 받던 시기였다.
이처럼 반한 분위기가 급속히 고조되는 상황에서 저격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정치적, 도의적 책임 비판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일본의 자민당 부총재가 수상 친서를 가지고 한국을 방문하는 등 상황은 역전됐다. 이러한 정황에 따라 일정한 직업이 없던 문씨가 누군가에 의해 포섭돼 범행에 나섰을 것이라는 추론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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