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4년 8월 15일 발생한 '문세광 사건' 즉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과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 관련 문서가 20일 공개됐다.
한-일 양국은 이 사건에 대해 조총련 등 북한 배후설을 두고 국교 단절 직전까지 가는 등 극심한 갈등을 겪었으며 이 과정에서 한일관계 악화를 부담스러워 한 미국은 ‘파국’을 막기 위해 강온양면전략을 쓰는 등 진화에 적극 나섰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 문세광 사건 배후 조총련 등 북한 강력 제기**
총 17권에 달하는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과 육영수 여사 장례식 등 관련 문서에 따르면 한-일 양국은 저격범 문세광과 배후수사결과에 큰 차이를 보여 한국은 국교단절까지 거론하며 크게 반발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양국의 갈등이 극한 상황까지 치닫게 된 배경에는 북한 배후설과 문세광 개인의 범행 여부에 대한 커다란 시각차가 놓여 있었다.
당시 한국측 수사본부는 저격범 문세광이 1972년 9월 5일 경 조총련에 포섭돼 반정부 활동을 펴오다가 1974년 5월 5일 북한 공작선 겸 무역선인 만경봉호에서 북한공작원으로부터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 대통령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고 서울로 잠입했다고 설명했다.
수사본부는 또 범행을 위해 일본인 요시이 유키오라는 이름의 위조 여권을 사용했던 문세광의 배후에는 50세 가량의 이름을 알 수 없는 북한 공작지도원과 조총련 오사카 이쿠노 서지부 정치부장 김호용 등 2명이 있다고 밝혔다.
문세광의 범행 동기에 대해서도 수사본부는 문세광이 김호용과 접촉하며 북한 및 조총련에서 발간한 각종 팜플렛과 공산서적에 현혹돼 공산사상에 물들었고 김호용은 남한내에서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대통령을 암살, 이를 인민봉기의 기폭제로 삼아야 한다고 문세광을 선동, 성공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밖에 수사본부측은 매월 평균 2차례씩 약 1년간 문세광과 내왕했던 김호용은 1974년 정월에는 한덕수 조총련 의장의 ‘혁명을 위해 일층 노력해주도록’ 이라는 말과 함께 정초 선물로 인삼주와 과실주를 문세광에게 전달했고 1백30만엔의 거사 자금을 1973년 1월과 1974년 7월 24일 각각 50만엔과 80만엔씩 문세광에게 건넸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일본, “문세광 개인 차원 범행” 한국 수사결과에 불만**
그러나 이같은 한국측 수사결과에 대해 일본측은 북한 배후설에 대한 증거를 찾을 수 없다며 조총련에 대한 수사 및 한국 정부의 김호용 인도 요구에 난색을 표명했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북한-조총련-문세광’ 연결고리에서 한국 정부가 핵심 역할로 지목한 김호용과 문세광과의 관계에 대해 ‘김호용이 문세광의 저격 행동을 사전지휘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려 한국측과 큰 시각차이를 보였다.
특히 8월 29일 이날 공개된 외무부 정보보고에 따르면 일본 경시청은 육영수 여사의 저격은 ‘과실살인’임에도 한국 수사당국이 짜맞추기 수사를 하고 무리하게 법을 적용하고 있다며 한국 정부의 수사발표에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과실살인’이란 범행을 국가기관의 행위로 볼 수 없으므로 국가 책임이 성립되지 않으며 특히 일본인 공범의 행위는 개인의 행위로 일본정부의 부작위에 의한 범행이므로 책임이 없다는 논리다.
이에 따라 범행동기도 북한의 배후설이라는 한국측 설명과는 달리 ‘개인’의 결심과 실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세광이 유서에서 ‘김대중 선생 사건, 유엔총회 등을 계기로 1인 독재를 타도하는 것이 한국 혁명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나는 죽음이냐 승리냐의 혁명전쟁에 나선다’고 밝힌 데 따른 것이다.
일본측은 또 문세광이 한덕수 조총련 의장으로부터 연하장만을 받았으며 거사 비용도 ‘스스로’ 마련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박정희 대통령까지 나서 국교단절 경고**
한국 정부는 일본의 이러한 ‘소극적’ 대응에 대해 공동정범에 대한 수사가 부진하고 조총련에 대한 허술한 단속 문제를 거론하고 나섰다. 사건 직후 외무부는 이와 관련 일본 정부의 법률적 책임까지 물을 것인가 고심을 했으나 국제법상 근거가 희박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묻기로 결정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외무부는 이에 따라 8월 27일 ▲정부간 회의 제의 중단 및 지연 ▲스포츠 분야에서 홈 엔드 어웨이를 제외하고는 일본 원정경기 제한 ▲서울대, 고대, 연대 등의 국제법 연구 발표와 세미나 개최 등을 추진했으며 명성왕후 시해사건을 비롯한 과거 한일관계에 대한 연구까지 추진했으며 언론계를 통한 대일 여론 공세도 추진하기로 했다.
이에 더해 당시 기무라 일본 외상이 8월 29일 참의원에서 ‘한국에 대한 북한의 위협이 없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거세게 일고 있던 반일 여론이 더욱 강경 일변도로 치달았으며 외무부는 대만의 일본 국교 단절 배경을 조사하는 등 국교 단절 가능성을 내비쳤다.
국교 단절 분위기에 대해서는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조총련 제재 방안에 일본측이 난색을 표한다는 사실에 “조총련이라는 문구와 한국 전복 활동을 규제해야 된다는 언급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면서 대사 소환은 물론 단교 조치까지 불사할 뜻을 보였다.
이에 일본은 시이나 에쓰사부로 당시 자민당 부총재를 특사로 파견하고 ‘시이나 특사가 조총련 규제에 대한 약속을 친서가 아닌 구두로 전달하겠다’는 절충안을 제시하는 한편 시이나 특사가 보충설명 형식을 빌어 조총련 규제를 약속, 이 내용을 메모로 작성해 양국이 교환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박 대통령은 이와 관련 9월 19일 특사로 파견된 시이나 부총재와 만난 뒤 “일본측 태도는 한국을 너무나 무시한 태도라고 본다”면서 “일본측에서 법적, 도의적인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것은 정치, 외교, 법을 떠나 동양적인 예의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박 대통령은 이어 “한때 일본 정부가 끝내 우리에게 이런 태도로 나온다면 우리는 일본을 우방으로 인정할 수 없지 않느냐는 생각을 했다”면서 “만약 불행하게도 이런 사건이 재발할 시 양국의 우호관계에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날 것을 지극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美, 한-일 관계 악화 긴장 진화 나서. “한국 방위, 일 전제에서만 가능” **
한편 한-일간 극심한 갈등 속에서 한국은 미국에 일본을 압박하기 위한 중재와 협력을 요청했으며 미국은 이에 경고하며 진화에 나섰던 것으로 밝혀졌다.
정부는 당시 주일 미국대사를 통해 방미 일정을 앞두고 있는 일본 다나카 수상과 기무라 외상에게 한국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고 영향력을 행사해 주도록 요청했다.
이에 미측의 하비브 국무부 차관보는 9월 4일 포드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한국 정부 입장을 브리핑하겠다면서 ‘미국은 모두 우방인 두 나라가 원만히 문제를 해결하기 바란다. 조용히 일본측의 답변을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강조했다.
하비브 차관보는 9월 10일에도 주미공사에 전화를 걸어 ‘일본측 친서 내용에 대해 한국이 너무 강경한 태도를취하지 말아달라’고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하비브 차관보는 12일 한국측이 재차 영향력 행사를 요청해오자 ‘미국은 할만큼 했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이후 한국이 ‘예정된 코스’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또다시 강경 자세를 보이자 “한국의 방위는 일본을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한 만큼 한일 관계가 깨지면 한국 방위도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