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상 '프리랜서'였던 이재학 PD는 CJB청주방송에서 14년 간 일해왔다. 열악한 근무조건이었다. 2018년 동료 프리랜서들의 처우개선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기는커녕 이것이 빌미가 돼 해고됐다. 이 PD는 자신의 해고가 부당하다며 부당해고 및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등을 제기했지만 올해 초 1심에서 패소했다.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서였을까. 이 PD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지난 2월 4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프레시안>에서는 그의 죽음을 둘러싼 구조적 모순, 재판 판결의 문제점 등을 짚어본다.
적어도 법원은 진실을 밝혀 주리라 철썩 같이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17개월에 걸친 1심 재판 끝에 받아든 판결문 어디에도 온몸으로 증명할 수 있는 자신의 14년 동안의 근무실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당사자는 법원의 판결문을 받아들고 5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에 "억울해 미치겠다"는 비명을 남긴 채. CJB 청주방송 고 이재학PD의 사건이다.
고인은 2004년부터 2018년 해고되기까지 14년 이상 청주방송 정규직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조연출과 연출 업무는 물론(심지어 정규직들의 2배 가까운 프로그램을 담당했다는 것이 정규직 PD의 증언이다) (조)연출 본연의 업무라 할 수 없는 대외업무, 계약 업무, 보조금 업무, 각종 행정업무 등 사측의 지시가 없었다면 할 수 없거나 할 필요가 없는 업무들도 상당 부분 담당했다. 이처럼 고인은 ‘무늬만 프리랜서’였을 뿐 청주방송의 노동자임이 명확했다. 그런데 1심 판결문은 사실오인, 편향적 증거판단, 방송현장에 대한 몰이해, 법리오해에 기초하여 정반대의 판단을 하고 말았다.
1심 판결의 문제를 하나씩 짚어보자. 첫째, 1심 판결의 문제는 소송 과정에서부터 이미 예견됐다. 사측은 이번 소송 전 이미 노무법인을 통해 고인의 노동자성이 매우 높다는 법률검토를 받았다. 당연히 이는 핵심증거이므로 이번 소송에 반드시 제출돼야 했다. 그런데 법원은 자료가 없다는 사측의 말만 믿고 더 이상 제출받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고인의 소송대리인이 사측에 없다면 노무법인에서 받아서 제출하면 된다고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자 이것도 묵살했다.
1심 판결 이후 최근 해당 자료의 일부가 공개됐고, 역시나 고인의 노동자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이 포함돼 있었다. 더욱이 해당 자료에는 고인의 노동자성을 뒷받침하는, 사측 스스로 인정한 고인의 근무실태까지 포함돼 있었기에 1심 소송에서 매우 결정적인 증거자료가 됐어야 했다. 그럼에도 판사는 이런 자료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둘째, 1심 판결은 유사 소송과 달리 사실관계의 확인 자체가 매우 부실하다. 또한 1심 소송에서 고인측은 총 56개의 증거를, 청주방송은 12개의 증거만을 제출했을 뿐인데 1심 판결문에는 고인측이 제출한 증거를 반영한 흔적조차 없고, 오로지 청주방송이 제출한 증거만이 반영돼 있을 뿐이다. 특히, 1심 판결은 법정 증언이 아니라는 이유로 고인의 근무실태에 대한 동료들의 진술서(고인과 함께 장기간 근무했던 재직 중 동료들의 구체적 진술로서 결정적 증거였다)를 배척한 반면 법정 증언이 아닌 사측 간부들의 진술서는 신빙성을 인정했다. 이와 같은 사실인정의 부실과 편향된 증거판단은 그릇된 결론으로 직결됐다.
셋째, 1심 판결은 고인의 업무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 당연한 귀결로 업무내용을 청주방송이 정하는지, 고인 스스로 정하는지, 이에 대한 지휘·감독의 여부와 정도는 어떠한지 등 법원이 노동자성 판단의 핵심으로 제시한 지표들을 경시하는 결정적인 오류를 범했다. 반면 1심 판결은 사용자가 우월적 지위에서 결정할 수 있어 법원이 노동자성 판단에서 부차적인 징표로 취급하는 취업규칙의 적용 여부, 기본급 등의 지급 여부, 4대 보험 적용 여부, 근로소득세 원천징수 여부를 고인의 노동자성을 부정하는 주된 근거로 삼고, 그마저도 매우 형식적인 판단으로 일관하는 등 심각한 법리오해를 범했다.
넷째, 고인은 제작도구 등을 포함해 모든 인적·물적 요소를 청주방송에서 제공 받아 청주방송의 이윤창출을 위해 노무제공만을 했는데, 1심 판결은 이런 경제적 종속성을 무시했다. 또한 고인은 14년 이상 청주방송에 전속돼 근무하며 담당 프로그램이 많아 사실상 타사 업무 수행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타사 업무가 금지되지 않았다고 해도 노동자성 지표인 전속성이 인정된다는 것이 대법원 판례지만 1심 판결은 반대로 전속성을 부정했다.
다섯째, 고인은 방송시간, 정규직 등과의 협업, 촬영스케줄, 보고와 결재 등으로 인해 근무시간의 사실상 구속을 받고, 고인의 근무시간 실태는 실제 정규직 PD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럼에도 1심 판결은 방송 업무의 특수성을 무시한 채 근무시간 관련 요소를 고인의 노동자성을 부정하는 지표로 잘못 판단했다.
여섯째, 청주방송은 고인에게 청주방송 소속 PD로 기재된 명함을 제공했고, 대내외 협업 과정, 각종 공문과 계약서, 방송 자막, 대외업무 수행을 위한 이메일 수·발신 등의 모든 과정에서 청주방송의 PD로 역할을 부여했으며, 실제 대내·외에서 그렇게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1심 판결은 이러한 사정을 무시했다.
일곱째, 1심 판결은, 조연출(AD)은 정규직이 아닌 통상 ‘프리랜서’가 담당한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종속성이 매우 강한 조연출이 통상 프리랜서라는 것은 방송현장에 대한 몰이해를 그대로 보여준다. 더욱이 이는 방송현장에 난무하는 ‘프리랜서’가 ‘진정한 프리랜서’라는 것을 전제한 것으로서 이는 고인이 ‘무늬만 프리랜서’로서 노동자인지를 가려달라는 고인 측 주장을 처음부터 외면한 것이다.
여덟째, 청주방송에서 고인과 함께 근무한 또 다른 소위 ‘프리랜서’ 작가와 조연출의 노동자성이 문제된 법원 판결(서울행정법원 2013구합7810)과 노동위원회 판정(충북2017부해37)에서는 이번 1심 판결과 달리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여러 사정들을 고려해 노동자성을 인정했다. 특히, 위 행정법원 판결에서 해당 조연출이 했던 업무를 뒤이어 고인이 동일하게 수행했음에도 이번 1심 판결이 정반대로 노동자성을 부정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1심 판결은 고인이 2014년에는 보수를 전혀 지급받지 않았다는 사정을 노동자성 판단의 불리한 지표로 삼았다. 그러나 사측이 제출한 고인의 보수지급내역을 보면 2014년에도 상당한 보수를 매월 정기적으로 수령했음이 바로 확인된다. 이는 1심 법원이 서면과 증거에 대한 최소한의 검토조차 매우 부실하게 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떠한 편견도 없이 오로지 진실만을 쫓는 법원의 모습을 이번 소송과정과 판결문에서 발견하기 어렵다. 오히려 처음부터 사측의 손을 들어주고자 결론을 내리고 쓴 편향된 판결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측도 법원도 진실을 외면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기댈 곳 없었던 고인은 세상을 등졌다. 법원이 고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하면 비약일까? 법원과 판사는 다시금 판결의 무게, 법원의 무게를 곱씹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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