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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다."

[어느 독립PD의 죽음]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였던 이재학 PD의 억울함

형식상 '프리랜서'였던 이재학 PD는 CJB청주방송에서 14년 간 일해왔다. 열악한 근무조건이었다. 2018년 동료 프리랜서들의 처우개선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기는커녕 이것이 빌미가 돼 해고됐다. 이 PD는 자신의 해고가 부당하다며 부당해고 및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등을 제기했지만 올해 초 1심에서 패소했다.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서였을까. 이 PD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지난 2월 4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프레시안>에서는 그의 죽음을 둘러싼 구조적 모순, 재판 판결의 문제점 등을 짚어본다.

CJB청주방송에서 14년 동안 청춘을 바쳐 일 했던 고 이재학PD의 안타까운 죽음을 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고인은 CJB청주방송에서 프리랜서PD로 일 했었다. 그의 별명은 ‘라꾸라꾸(간이침대)’였다고 한다. 집에 가지 못하고 회사에서 잠을 자며 야근을 밥 먹듯이 했기에 얻어진 슬픈 별명이다. <미디어오늘>에 따르면, 2018년 4월경에 자신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동료들의 임금개선, 근로환경 개선을 요구했던 자리에서 들었던 즉각 답변은 "너 그만두겠다는 소리 아니냐"였다. 그리고 며칠 후 "네가 맡은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손 떼라"는 통보를 들었다고 했다.

당시 이재학 PD가 받았던 임금은 월 160만 원 정도였다.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은 이재학 PD는 청주지법에 '근로자 확인 소송'을 제기 했다. 험난한 과정임을 알면서도 재판을 선택한 이유를 이재학 PD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판례를 남기겠다는 서약서를 변호사님과 썼다", "판례를 남기면 당장 회사가 후배들에게 조심하겠고, 어떻게든 전국에 알릴 수 있다. 쉬운 말로 (내가) 14년 못 썼던 계약서를 전국 민방 프리랜서들이 쓸 수 있다”(미디어오늘 기사 인용). 회사가 합의하려 해도 받지 않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겠단 약속이다. 그러나 2년에 가까운 공판의 결과는 패소였고, 며칠 후 38세 나이를 끝으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고인의 유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다."

▲ 방송국 스튜디오 모습. ⓒ프레시안(서어리)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였던 이재학 PD의 억울함에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정규직의 '갑질'이 그것이다. 필자가 한 달 전 고인의 장례식장에서 떠올랐던 단어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었다. 인간 세상에서는 썩 내키지 않은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야생의 정글이 아닌 인간 세상에 버젓이 존속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것도 정의를 말해야 하는 방송사에서 말이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는 사자성어는 자연 생태계의 법칙을 일컫는 말이다. 자연 생태계에서 이 법칙이 작용되고 있다는 것은 상식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자연에는 이러한 논리에 반하는 방식이 존재하고 있으니, 바로 누구나 알고 있는 공생(共生)이다. 그 대표적인 생물이 많이 알고 있는 '목동개미와 진딧물'이다. 진딧물은 식물의 수액을 먹고 당분이 들어있는 액을 항문으로 배출하는데, 이것을 '감로(甘露)'라고 한다. 진딧물의 감로는 개미들이 좋아하는 먹이가 되고, 개미들은 진딧물을 이리 저리 몰고 다니면서 먹이 활동을 돕는다. 그리고 진딧물을 천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겨울에는 이들의 알을 자기들의 집 안에서 보호해주기도 한다. 힘의 균형으로 보자면 한 입 거리 밖에 안 되는 진딧물을 보호해 주면서 개미는 꾸준한 먹이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개미가 많은 개체수를 자랑하면서 지구의 가장 많은 곳에서 보편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상호 적절한 공생을 일찌감치 터득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야기를 잠시 다른 곳으로 돌려본다. 시청자들이 많이 보는 유명 예능프로그램에서 제작현장 장면이 방송으로 나올 때, 출연자 주변에 많은 스태프들을 볼 수 있다. 어떤 프로그램은 그 스태프 인원수가 30여명에 달하기도 한다. 그 중에 정규직 스태프는 적게는 2명, 많게는 4~5명에 불과하다. 오늘날, 예능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방송 콘텐츠가 비정규직 방송노동자가 없다면 '블랙아웃'이다. 방송사가 '비정규직 백화점'이라는 오명과 동의어가 된다. 시청자들이 방에서 편하게 보고 있는 방송프로그램이 비정규직 방송노동자를 갈아서 만들어지는 이 현실. 현재 정규직들의 복지, 임금, 근로환경의 상당 부분을 비정규직의 피땀이 받치고 있다는 것을 부인 할 수 있을까?

이재학 PD의 죽음이 이슈화 되고,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는 와중에 방송 정규직 노동자들의 반성과 선언이 나오고 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의 성명이 그렇고, 한국PD연합회의 성명 또한 그렇다. 한국PD연합회에서는 '상생특별위원회'를 둔다는 소식도 있고, 전국언론노동조합의 2차 성명에는 “다짐으로 끝나지 않고 해답을 찾겠다는 각오로”라며 확고한 신념도 담겨있다. 적극 지지하고, 뜨거운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것이 수뇌부만의 결정이 아닌 모든 조직원들의 가슴에 배어들기를 소망한다. 왜냐하면 지금도 불신의 눈길이 있기 때문이다. 불신의 이유는 에둘러 설명하지 않으련다. 굳이 말하자면 '결자해지(結者解之)한다는 심정'과 '상식(常識)으로 해결하는 이성(理性)'을 주문하고 싶다.

방송사 안팎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산재해 있다. 해방의 주체가 본인이어야 하듯이, 문제 해결의 주체는 모든 방송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갑과 을'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문제 해결에 벽을 쌓을 뿐이다. 함께 머리 맞대고 상호 윈-윈(WIN-WIN)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면 문제 해결의 시점은 분명히 앞당길 수 있다.

'목동개미와 진딧물'의 관계에서, 자연에 존재하는 공존의 방식에서 '약육강식(弱肉强食)'보다는 ‘상리공생(相理共生)’이라는 사자성어가 눈앞의 이익에만 안주하는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가 ‘약자(弱者)’이기에 보살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이 아니라, ‘동료’라는 점을 호소하는 것이다. ‘목동개미와 진딧물’의 관계에서 교훈을 얻으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벌레만도 못할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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