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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살아남으려면 '노사 빅딜'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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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살아남으려면 '노사 빅딜'밖에 없다"

[긴급기고] 盧후보 노동특보, "아직도 나는 '사회적 대화'를 꿈꾼다"

지난 2002년 대선때 노무현 대통령후보의 노동특보로서 노동공약 작성을 주도했고, 정부 출범후 청와대 노동개혁 TF팀장으로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의 골간을 잡았던 박태주 박사가 <프레시안>에 "아직도 나는 '사회적 대화'를 꿈꾼다"는 제목의 긴급기고문을 보내왔다.

경제기반이 급속히 붕괴되면서 노동자를 포함한 기층대중 모두가 극심한 생존위기에 직면한 동시에, 그나마 한국경제를 버팅기고 있는 금융 및 초우량기업의 지배권이 외국자본에게 넘어가려 하는 작금의 심각한 경제위기를 타파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노-사간에 '혁명적 빅딜'이 요구된다는 요지의 글이다. 사측이 정규-비정규직의 노동진영에는 생존권을 보장하는 대신, 노측은 재벌측에 '국적자본의 지배권' 즉 경영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박 박사는 "이같은 사회적 타협만이 경제위기의 유일한 구원투수"라고 단언하고 있다.

박태주 박사는 기고문을 보내면서 붙인 글에서 현 상황에서 '사회적 대화'를 말하는 고민을 다음과 같이 털어 놓았다.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민주노총 위원장은 이 시점에서 '사회적 교섭'은 무의미하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11월 하순에는 조합원 찬반투표를 거쳐 총파업에 나서겠다고도 했다. 이러한 판국에 뜬금없이 웬 사회적 대화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믿고 있다. 사회적 대화 없이는 노동문제를 비롯한 어려운 경제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이번 비정규직 문제도 '사회적 대화'의 정신아래 풀어야한다. 정부가 비정규직 법안에 매달려 사회적 대화에 마침표를 찍기에는 법안의 무게가 그만큼 무겁지 못하고 게다가 개혁의 과제는 산적되어 있다. 노동조합도 노정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이 글은 이러한 바람으로 쓰였다."

박태주 박사는 앞서 <프레시안>에 실렸던 박승옥씨의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 글이 뜨거운 '노동운동 논쟁'을 불러일으켰듯, 자신의 글이 '제2의 IMF위기'하에서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노사문제를 풀기 위한 뜨거운 사회논쟁의 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프레시안>은 이에 박태주 박사의 글에 대한 반론도 게재할 것을 약속한다. 편집자주

***아직도 나는 '사회적 대화'를 꿈꾼다**

노사정위원회 참가여부를 9ㆍ21 대의원대회에 상정하려던 민주노총 지도부의 바람은 내부논의과정에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민주노총의 참여로 노사정위원회가 기나긴 불임(不姙)의 세월을 벗어나기를 꿈꾸었던 많은 사람들은 손에 다잡은 붕어를 놓친 것만큼이나 아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시집을 가려면 포대기라도 장만해야 하는 법, 준비없이 서두르다가 사회적 대화 그 자체를 놓쳐버리기보다는 차분히 준비할 시간을 번 셈이라 치부하면 위안이 될 듯도 하다.

이 글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사회적 대화를 둘러싼 주요한 논점들을 간략하나마 되짚어보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는 사회적 대화의 필요성과 전제조건, 사회적 대화기구의 상(像), 그리고 사회적 대화의 의제(agenda) 등이 포함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회적 대화는 한국경제의 위기를 배경으로 하면서, 동시에 신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IMF체제와의 일정한 결별'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사회적 대화기구가 성립되고 생산적인 결말을 낳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부의 개혁적인 접근이 요구됨을 밝힐 것이다. 아울러 사회적 대화기구는 기존의 노ㆍ사ㆍ정에 맡겨두기에는 대화의 대표성과 합의의 권위가 떨어진다는 점에서 다양한 사회세력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점을 주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대화의 의제는 국민경제의 전망과 비전을 공유하는 것으로 하되 정부의 공공성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 그리고 노조의 생산성 향상노력의 교환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이를 통해 성장동력의 회복과 사회적 통합이 가능해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타협, 경제위기의 유일한 구원투수**

사회적 대화와 그 결과물로서 사회적 타협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국민경제에서 요구되는 역할과 사회적 대화 그 자체의 성격으로부터 주어진다.

첫번째로, 사회적 타협이 요구되는 것은 그것이 진행중인 한국경제의 위기를 돌파할 사실상 유일한 구원투수라는 점이다. 현재 한국경제는 성장뿐만 아니라 분배, 투자, 일자리, 내수 등 거의 모든 지표가 죽을 쑤고 있는데다 앞날의 전망조차 먹장구름에 가려져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경제위기의 이면에는 무엇보다도 '외국(투기)자본에 의한 금융 및 초우량 기업의 지배'라는 IMF체제의 누적된 유산이 녹아있다. 다시 말해 '단기적인 주주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자본의 논리 앞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실종되고 나아가 실물경제의 안정과 발전은 제약당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재벌은 적대적인 M&A(기업 인수합병)에 맞서 경영권 방어에 급급한 나머지, 사회적 책임은커녕 대규모 사업(성장동력산업)에 대한 위험분담자로서의 기능조차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일자리의 요람이랄 수 있는 중소기업은 금융에 대한 접근권조차 잃어버린 데다 불공정한 하도급 구조의 굴레안에서 허덕이고 있기도 하다. 주주이익 극대화 논리가 주인행세를 하는 한국경제에서 일자리나 분배는 말의 미학은 될지언정 그 내용을 얻지는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적 타협은 무엇보다도 기업에 대해 안정적인 투자기반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수단으로 등장한다.

두번째는, '사회적 해체'를 방지하기 위한 사회적 주체간의 역할 분담이다. 빈곤과 차별, 불평등과 사회적 배제는 사회적 병리의 대표적인 표현이다. 일이 없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일하는 사람의 대다수들도 노동이 더 이상 복지가 되지 못하는 '복지없는 노동의 시대'를 살고 있다. 가난이 천형(天刑)처럼 삶을 짓누르는 가운데 때로는 자살이 자유를 향한 탈출구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를 일부 노동조합의 집단이기주의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경제구조의 양극화와 국가의 제도적인 방치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이 어느 한 주체의 노력만으로 해결이 가능하지 않다면 사회적 타협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필요성을 획득하게 된다.

세번째로, 사회적 타협은 신자유주의의 '계승자'이자 동시에 '대안'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거대한 물결을 애써 외면한 채 외딴 섬의 로빈슨 크루소같이 살 수는 없다. 세계는 우리 없이 살 수 있어도 우리는 세계 없이 살 수 없는 탓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전면적인 도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각국은 나름대로의 사회경제적 토대위에서 독자적으로 대응하여 왔다. 영미국가와 유럽대륙국가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륙국가내에서도 가령 독일과 이탈리아가 같지 않은 것이다. 세계화란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흐름에 적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적 대화는 '협의에 의한 적응', 나아가 '규제되고 선택된 세계화'를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어떤 세계화를 택할지를 사회적 주체들간의 대화를 통해 모색해 가기 위한 수순인 것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가 경향적으로 관철된다하더라도 사회적 대화는 이를 일정부분 제어하고 동시에 사회통합적 수단을 개발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정부의 '개혁'이 사회적 대화의 출발점**

사회적 대화는 주체들의 전략적 선택만으로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구조적 전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 전제란 노동조합의 중앙집중화도, 사회주의 정당의 활성화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전제조건들이 전적으로 용도폐기된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먼저 노동조합의 중앙집중화는 합의의 이행을 보장하는 수단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분산된 노동조합 구조에서도 만일 내부의 민주주의가 확립될 경우 사회적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이탈리아의 경우가 잘 보여준다. 이탈리아에서는 사회적 합의가 성립되면 전체 노동자의 투표를 통해 승인여부를 결정한다. 노중기 교수의 지적처럼 '코포라티즘의 아킬레스건'이라 불리는 대중들의 순응문제는 관료주의적인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주적인 조율과정을 통해 해결이 가능한 것이다.

일반적인 논의에서 빠져 있는 것은 사회적 합의를 성사시키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다. 이른바 '취약한 코포라티즘'으로 인해 노사의 탈퇴비용(exit cost)은 그다지 높지 않다. 노사의 불참과 탈퇴가 일상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적 대화기구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은 물론 합의를 압박하고 이행을 강제하는 것은 정부의 몫이다. 정부는 사회적 대화의 설계사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부가 노동에 대해 일정 부분 양보할 의사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정부의 노력은 사회주의 정당의 결여라는 구조적 조건을 보상하는 의미를 지닌다. 즉 노조내부 민주주의가 노조의 중앙집중성을 대체한다면 정부의 안정적인 개혁성향이 사회민주당의 존재를 대신한다. 주체의 전략적인 행동도 최소한 멍석이라도 깔려야 가능해진다.

알고 보면 노사 모두 사회적 대화기구의 정상화에 커다란 열의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해당사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에 의거하여 노동조합에 대해 참여의 공간을 제공하기는커녕 경제단체는 어떻게 해서든 노사정위원회의 기능과 역할을 축소시키려 들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대한상공회의소는 "노사정위원회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논제를 노동ㆍ복지에 한정시켜야 하며" 그 성격도 '자문ㆍ협의기구'로 하여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심지어 노동조합조차 사회적 대화를 전술적 활용대상으로 접근하고 있는 실정이고 보면 사회적 합의기구의 미래는 구름속에 갇힌 달 신세를 면키는 어렵다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은 사회적 대화의 성패를 가름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나타난다. 현재의 민주노총 지도부는 노사정위원회 참가를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 바깥에 머물러 있다면 이는 민주노총 내부의 반발 때문인가 아니면 정부의 흡인력 부족 탓인가? 더욱이 참여정부는 사회적 합의를 최소한 노동정책의 밑받침으로 삼아오지 않았던가?

노동정책에 관한 한 최소한 참여정부는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여기에는 노사자율의 원칙과 중층화된 교섭구조로서 산업별 교섭구조의 확립, 차별의 시정, 그리고 국제노동기준의 준수가 포함된다. 그런데 참여정부에 걸맞게 노동조합을 사회적 대화의 파트너로 삼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정책의 집행에 앞서 참여정부가 바라보는 노동조합의 상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파트너십이란 노조의 약화나 갈등 및 동원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고도로 조직된 노동조합과 사용자사이에서 정치경제를 통해 규제되는 교섭관계를 의미한다. 이는 필요할 때 조합원을 동원할 의지와 능력을 갖춘 노동조합이 존재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독일의 파트너십을 연구한 터너(Lowell Turner)의 말이다. 사회적 대화에서 노동조합이 임금인상을 양보한 대가로 노동의 기본권 확장이나 고용창출에 나서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약한 노조는 대화는 할 수 있어도 개혁을 이루지는 못한다. 연기금 운용을 협의하기 위한 공식적인 기구는 물론이거니와 주요 정책결정에 앞서 비공식적인 브리핑 제도를 활용하는 것도 상호이해의 증진에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세력이 참여하는 '경제사회협의회'로 격상해야**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사회적 대화기구의 상이 그것이다. 먼저 참여의 주체문제이다. 노ㆍ사ㆍ정으로만 족한가? 특히 노사가 대표성과 아울러 의제를 설정하고 나아가 합의사항을 이행할 권위를 갖추고 있는가? 결국 핵심은 노ㆍ사ㆍ정외에도 시민사회단체의 참여를 보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회적 대화기구가 노사관계적 의제를 넘어 국민경제적인 의제까지 다루려면 이름도 '경제사회협의회'로 바꿀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제의 확대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이에 걸맞는 이해관계의 대표성과 합의의 권위를 높여낼 필요가 있다. 노동조합으로서는 자신이 가진 배타적 독점권에 안주하기보다는 시민단체를 참가시켜 우리 사회의 개혁을 담보하는 것이 올바른 수순일 것이다. 노조만으로 대표성을 갖기도 어렵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노조의 힘만으로 '사회개혁'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생산의 영역에 기초한 노조운동이 재생산의 맥락에서 구축된 민중운동을 대표할 수 있는가." 레츠너(Norberr Lechner)의 물음이다. 이 경우 시민단체 자체의 대표성이 문제가 된다면 공익위원의 수를 늘리는 대안적인 방안도 있을 것이다. 참고로 아일랜드에서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협의회의 구성을 살펴보면 정부가 다른 이익단체와 협의하여 임명하는 의장 및 부의장 외에 농업부문, 사용자측, 노동조합, 시민단체에서 5명씩이 참가하며 마지막으로는 정부가 임명한 10명(정부 부처 5명, 독립적인 개인 5명)이 추가된다.

또한 이행사항의 점검능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면 협의회내에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이행점검기구를 설치할 수 있을 것이다. 업종별ㆍ지역별 노사정위원회(경사협)의 설치는 당사자간 큰 논란의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업종별 노사정위원회는 업종(산업)별 교섭이 다루지 못하는 정책협의를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초기업별 교섭으로 이행하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노사간 '혁명적 빅딜' 시급**

지금까지 사회적 대화기구의 필요성 및 그 구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러한 기구는 결국은 사회적 타협을 위한 수단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을 논의할 것인가?

여기에서 큰 원칙은 기업은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노조는 생산성의 향상에, 그리고 정부는 공공성의 확충에 나서라는 것이다. 최대의 목표는 '괜찮은 일자리'(decent work)를 만드는 것이고 이를 위해 투자를 활성화시키는 일이며,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통합을 달성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효율과 형평, 성장과 분배, 그리고 경쟁과 연대라는 상호 모순되는 개념들을 잇는(bridging)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는 현실적으로 주고받는 교환의 관계로 나타나겠지만 그 바탕에는 국가의 장기비전에 대한 합의를 전제로 한다.

괜찮은 일자리의 창출이 현재의 경제위기 극복과 맥을 같이 한다면 여기에는 노동에 대한 양보뿐 아니라 자본에 대한 양보를 필요로 한다.

노동의 경우에는 고용안정과 임금안정의 맞교환을 주조로 하면서 동시에 일자리 창출과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적 보호를 담는 내용이 될 것이다. 사회적 주체간 '희생의 교대'가 필요하다면 노동자내부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간 '희생의 교대'가 전제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본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외국자본에 맞서 '국적자본'의 지배권을 인정하면서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형태일 것이다. 지난 번 SK(주)의 경우에서 보듯 끊임없이 외국투기자본의 M&A 위협에 시달리면서 적극적인 투자나 사회적 책임의 이행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적어도 비금융계열사에 대한 재벌의 지배권을 인정함은 물론 필요하다면 정부차원에서 국적기업의 경영권 보호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경우에서 보듯 적대적 M&A가 개시되면 곧바로 신주를 기존 주주들에게만 싼 값으로 발행하여 기업의 경영권을 보호하는 독약처방(poison pill)이나 일시에 이사를 교체할 수 없도록 하는 시차이사제(staggered boards), 또는 스웨덴의 경우에서 보듯 차별의결권의 도입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연기금이나 미국의 예에서 보듯 우리 사주제(ESOP)의 적극적인 활용도 경영권 방어에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다. 대신 재벌은 사회적 책임의 관점에서 사회공헌기금의 출연이나 중소기업 지원재원의 공여, 그리고 일자리 창출 및 비정규직의 보호 등을 교환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타협의 주요 의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기업의 경영권 인정과 사회적 책임(투자활성화, 사회공헌기금의 출연, 경영참여 및 경영의 투명성, 취약노동자의 보호 등)
-외국 투기자본에 대한 감시의 강화, 특히 금융기관의 안정주주화
-중소기업의 금융접근권 확보와 불합리한 하도급 구조의 개선
-인적자본의 양성과 적극적인 노동시장정책
-취약 노동자의 보호 및 사회안전망의 구축
-중층적 교섭구조의 형성과 이해당사자의 연기금 운영참가
-조세제도의 정비
-고용안정과 기능적 유연성 제고
-노동시간의 단축과 사회적 일자리를 통한 고용의 창출
-(대기업의) 임금인상 자제와 비정규직의 보호

물론 사회적 대화의 의제와 그 내용이 사전적으로 정해질 수는 없다. 특히 그 결과는 물속에 뛰어드는 것만큼이나 불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대화가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그 의제가 경제위기의 구조적 요인과 직결되어야 한다는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적 대화의 의제가 더 이상 노사관계적 사안에 머물 수는 없어 보인다. 이미 빈곤과 차별이라는 노동시장적 갈등이 우리 사회의 주요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는 전반적인 경제상황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비정규직 문제에서 보듯이 노동시장적 상황이 노사관계를 규율하고 있다면 대화의 의제는 더욱 분명하여진다 할 것이다.

***전망은 여전히 암울할지라도**

'노사정위원회'로 대표되는 한국에서 사회적 대화는 IMF 경제위기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지금 한국사회는 IMF체제의 극복을 위해 다시금 사회적 대화를 필요로 한다. 작금의 경제위기를 IMF 위기 이후 최종 승자로 선언된 '시장'에 맡겨둘 수도 없지만, 정부만의 노력으로 해결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주체적인 이해당사자에 의한 '시장개입'이 필요한 것이다. "가장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규제체제는 규제된 시장이 자원을 배분하고 국가가 모든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물질적 복지를 제공하는 경제체제이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쉐보르스키(Adam Przeworski)의 말이다.

경제위기의 극복은 수량적 지표의 개선을 넘어 구조의 변화를 요구한다. 경제위기의 탁류를 가로질러 주주이익의 극대화에서 이해당사자의 참여로 넘어가는 '전환의 계곡'에 다리를 놓는 것은 결국 사회적 대타협일 것이다. 이 경우 핵심은 누가 그 전환의 비용을 부담하는가이며 이 부담의 몫을 결정짓는 게 바로 사회적 대화이다. 위기없이 개혁없다. 그러나 위기에서조차 개혁하지 못하면 한국경제는 침몰하고 말 것이다. 비록 서로 간에 찰거머리 정은 없다손 치더라도 격랑을 함께 헤쳐가야 할 한 배에 같이 탄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사회적 대화를 둘러싼 분위기는 여전히 냉랭하고 전망은 암울하다. 글을 쓰는 있는 이 순간에도 비정규직에 대한 정부의 보호입법안이 발표되고 노동조합은 '노사정지도자회의'의 무기연기를 선언하는 등 노정관계는 다시금 얼어붙고 있다. 사회적 대화에 이르는 길목은 한 마디로 지뢰밭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 보호법안 외에도 공무원 노조법안이나 퇴직연금제 문제, 그리고 한ㆍ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이르기까지 지뢰는 곳곳에 널려있고 그것은 인계철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일랜드정부가 그러하였듯 신자유주의 정책의 강행이라는 위협으로 노동조합을 대화테이블에 앉히고자 하는 전술이 아니라면 - 우리나라에서 이 전술은 불가능하다 -, 정부가 노조에 대해서 그들이 정책결정과정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방안이었을까? 아니면 노ㆍ사에 이어 정부마저 사회적 대화를 포기하고 말았는가? 사회적 대화를 향한 정부의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전략의 부재를 확인할 뿐이다.

경제위기는 더 이상 강 건너 불이 아니다. 경제위기를 넘어 질적인 성장, 나아가 '혁신주도형 성장'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루기 위해서도 사회적 주체의 참가는 필수적이다. 참여정부가 개혁을 통해 이를 달성할 량이라면 개혁을 위한 시간적 여유는 넉넉지 않다. 개혁은 그 자체가 시간이 지나야 효과가 나타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중들은 개혁에 싫증을 낼 뿐 아니라 반대세력까지 활성화된다. 게다가 개혁은 사회적 비용과 고통을 요구함으로써 대중의 인내를 시험하기도 한다. 개혁은 점진적이라기보다 서둘러야 하며 이를 위해서 정부는 하루빨리 이해당사자의 신뢰를 회복하여야 한다. 돌아가는 길이 빨리 가는 길이다. '위로부터의 개혁'은 조바심과 불관용의 표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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