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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을 빼앗기면 찾아올 줄 알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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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을 빼앗기면 찾아올 줄 알아야"

김민웅의 세상읽기 〈210〉

〈잿더미〉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시인 김남주 문학의 신호탄과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폐허가 된 뒤에도 여전히 살아남는 희망과 의지를 노래한, 그래서 마침내 꽃을 피우는 뜨거운 사랑의 온도가 담겨 있습니다.

"김남주"라는 이름 석자가 깊게 새긴 역사에 대한 정직한 갈망을 우리는 어느새 잊어가고 있고, 이루어지는 것은 별로인데 마치 대단한 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 〈잿더미〉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꽃은 어디에 있는가/피는 어디에 있는가/꽃 속에 피가 잠자는가/핏속에 꽃이 잠자는가"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피워내야 하는 꽃은 그냥 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피가 우리의 영혼과 이 역사에 흐를 때 이루어지는 거대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잠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가 열망하는 꽃은 피워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시의 다른 대목은 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대는 황혼의 언덕을 내려오다/폐허를 가로질러 또 하나의/새벽을 기다려보았는가 그때/동천에서 태양이 타오르자/서천으로 사라지는 달을 보았는가"

모든 희망이 황혼처럼 물러가고 지나는 길목은 폐허인데, 그곳에 과연 새로운 새벽이 오기나 하겠는가 하고 문득 방황할 때 비로소 목격하게 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고 시인은 장엄하게 묻고 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듯한 세월 속에서 아무도 깊이 눈여겨보지 못하는 때에도 일어나는 변화를 시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대는 겨울을/겨울답게 살아보았는가/그대는 봄다운 봄을 맞이하여보았는가/겨울은 어떻게 피를 흘리고/동토(凍土)를 녹이던가/봄은 어떻게 폐허에서/꽃을 키우던가 겨울과 봄의 중턱에서/보리는 무엇을 위해 이마를 맞대고/눈 속에서 속삭이던가/보리는 왜 밟아줘야 더/팔팔하게 솟아나던가"

그는 고된 역사 속에서도 봄을 준비하는 뜨겁고도 질긴 마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는가 그대는/봄을 잉태한 겨울밤의 진통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그래서 결국 꽃은 피고, 그 꽃 속에는 생명의 피가 흐르는 그런 세월이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런 세월의 얼굴을 이렇게 그립니다. "꽃 속에 피가 흐른다." 잿더미 속에서도 봄은 그리 오는 겁니다.

사실 그 말은 맞습니다. 우리는 "꽃이 피다"라고 말합니다. 하늘에서 땅에 떨어지는 것은 비, 땅에 흐르는 것은 물, 이 말의 본래 고어는 미, 그리고 우리 몸속에 흐르는 것은 피. 그런데 이 "피"는 사람이 아닌 경우 유일하게 꽃에 쓰입니다. 꽃 속에 피가 흐른다는 것입니다.

그건 누군가의 아픔이, 목숨이 땅에 떨어져 피가 되어 스미자 꽃이 되었다는 전설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고, 붉은 꽃의 진한 색깔이 마치 사람의 몸속에 흐르는 피처럼 여겨져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것에는 생명의 피가 흐르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우리의 조상님들에게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건 고된 세월과 혹독한 겨울을 살아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깨우침입니다.

겨울의 그 끈질긴 진통 속에서 봄은 태어납니다. 역사는 냉혹한 추위를 견디면서 새로운 새벽의 불쏘시개를 준비합니다. 개인의 인생도 다르지 않습니다. 잿더미의 폐허를 가로질러 새벽을 맞이하기 위해 달려가는 자는 그렇게 해서 출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빼앗기면 그것을 찾아올 줄 알아야 합니다. 꽃은 우리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잠자는 자는 자기의 꽃이 빼앗긴 줄도 모르고, 봄이 사라진 들판에서 봄 타령도 잊고 맙니다. 우리에게 피워야 할 꽃이 무엇이며 넘어진 곳을 딛고 일어서야 할 자리가 과연 어디인지 생각이 깊어지는 봄이었으면 합니다.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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